편집자주='다시 문화다'라는 진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문화다,라는 하나 마나한 말을 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정치’ 너머의 세계를 보다 굳건히 하지 않으면 다시 우리가 ‘정치’를 성취하기 더욱 어렵지 않을까 하는 어떤 불안한 예감 때문이다. 5년은 긴 시간이다. 그 긴 시간을 그럭저럭 모든 것은 다 패배하는 시절이라고만 떠들기엔 우린 아직 젊고, 우리의 마음만은 결코 패배(!)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매주 1회, 주말마다 <미디어스> 기자들이 돌아가며 ‘미디어스 컬트 칼럼;오덕어스'를 연재한다. 때론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의 고백이 될지 모르고 또 어떤 때에 문화와 정치의 이질감을 날카롭게 횡단하는 한 자루의 '검'이 되길 소망한다. 그 주의 가장 ’핫‘한 아이템이라기보단, 끝내 ’핫‘하게 도래할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 영화 '광해'의 포스터

얼마 전 작년의 ‘천만 영화’ <광해>를 뒤늦게 IPTV로 유료결제해서 보았다. 본 감상은, 이렇게 오글오글하게 만드는 것도 분명히 능력이라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때려죽여도, 아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시나리오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광해>가 조선왕조란 시대나 광해군이란 역사적 인물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역사에 꽤 관심있는 이들에게나 유효할 것이다. 그러니 그저 이 영화를 가상의 시대와 가상의 군주를 다룬 환상으로 평가해보자. 그렇다 해도 모종의 문제는 남는다. 어쩌면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일 텐데, 이를 ‘민중주의의 환상’이라 부르도록 하자. 이를 요약하자면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득권층이 민중(혹은 서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민중의 삶과 처지를 아는 보통의 사람이 그 자리를 갈 경우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될 것이다.

'민중을 사랑하는 군주'라는 '민중주의적 환상'

물론 ‘민중주의적 환상’을 즐기는 이들도 이런 일이 언제나 가능할 거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민중주의적 환상’을 믿는다기 보다는 ‘덜 어색하게 여길’ 뿐이다. 대체로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이 군주의 자리에 서게 되면 세상을 더 망칠 뿐이지만, 어떤 ‘탁월한 개인’은 민중을 사랑하는 심성을 유지하면서 세상사를 조율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든 문재인에 대해서든 안철수에 대해서든 개혁적 정치인에 대한 열광은 대체로 이러한 믿음에 기초해 있다. 안철수 후보가 <광해>에 대해 덕담을 하고 문재인 후보가 눈물 흘릴 때, 그들은 이 환상을 즐기는 대중의 통념을 거들었거나 자신도 이 환상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 게다(문재인 후보의 눈물의 경우 ‘허균’ 역할을 한 유승룡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비롯하지 않았겠느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영화 <광해>에서 왕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광대 주인공(이병헌)이 15일 동안 민중적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근거를 도입부에서 허균(유승룡)은 이렇게 설명한다. “글줄은 읽을 줄 압니다.” 여기서 글줄을 읽을 줄 안단 건 아마도 ‘한글’이 아닌 ‘한문’ 독해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대동법과 구명파병 문제에서 그가 허균의 충고를 넘어선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유도 결국 그것이다. 결정적 순간에 그는 ‘책을 달라’고 한 후 자신의 정체를 아는 대전내관과 함께 ‘대동법 공부’에 들어간다.

일단은 ‘한문을 읽을 줄 아는 광대’란 설정도 초현실적이지만, 설령 한문을 읽을 수 있다고 한들 그가 그 문제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대동법을 ‘양반의 편의’ vs ‘백성의 편의’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하나의 관점이다. 대세가 기운 중원의 정세에 개입하기 위해 파병하는 문제를 ‘성리학의 이념’ vs ‘장병의 목숨’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 역시 하나의 관점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가 그러한 관점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몇 백년의 시간을 격한 시점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당시 역사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보통교육이 실시되는 대중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텍스트를 읽기 전에 이런 관점을 지니더라도 실제 상황에서는 대처가 안 될 수가 많다. 가령 ‘단지 한자를 읽을 수 있을 뿐인 광대’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 살며 그 당시 역사를 잘 꿰고 있어 이미 저러한 도식을 알고 있는 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이병헌의 몸에 갇힌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순간을 돌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 단순도식을 뛰어넘는 반대논리가 제출될 것이고, 설령 그것을 돌파한다 해도 절차적 지연이 이어질 것이다. 대체로 우리의 정치가 그렇지 않은가?

▲ 영화 '광해' 관람 후 영화의 여운에 눈물 흘리는 당시 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모습 ⓒ뉴스1

'활동가'와 '관료' 사이 칼날을 걷는 정치인이란 존재

현대인이 조선왕조에 가도 그럴진대 현대인이 현대 한국 사회의 정치를 고민할 때 ‘민중주의적 환상’은 오히려 개혁정치에 방해가 될 것이다. 어떤 좌파나 개혁론자들은 각 사회영역에서 ‘약자의 말을 듣고 그를 구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약자가 대변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각 영역 활동가들의 대안만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일 텐데,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민중주의적 환상’을 가진 생활인들조차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는 ‘민중주의적 환상’을 따르더라도 자신의 전공이나 업무영역에서의 활동가들의 요구에 대해선 “업계현황을 모른다”거나 “더 큰 부작용을 발생시킬 것이다”라고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부 좌파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생활영역에서는 보수적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영역에서만 진보적 견해를 견지하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생활영역에서만이 올바른 개혁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리얼리즘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고 그 외의 영역에서는 적당히 진보적이라 알려진 견해를 취하며 그 영역의 리얼리즘을 ‘기득권의 저항’이라 규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각 영역 활동가들의 요구만을 취합하면 법리적 일관성도 담보할 수 없고 새로운 피해자가 양산될 것이란 사실은 좌파정치인들조차도 이미 아는 바다.

말하자면 정치인은 “이러이러한 것이 잘못 되었으니 고쳐야 한다”는 ‘활동가의 논리’와 “그것은 이러이러하게 작동하게 되어 있다”는 ‘관료의 논리’를 모두 이해하고 매개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길은 활동가에게도 관료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길일 것이 분명하며, ‘민중에 대한 사랑’을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으로 포함하는 훨씬 더 어려운 능력이 요구된다. 이것은 급진좌파에게만 없는 인식이 아니라 ‘소통’이나 ‘공감’만으로 정치를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도 부족한 인식일 것이다.

정치 얘기는 각설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대중문화에서 ‘민중주의적 환상’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얘기가 될 것이다. 세상사와 실재하는 부패한 정치에 지친 우리에게는 위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같은 ‘민중주의’라도 좀 더 세련된 위안은 가능하지 않을까?

'왕자와 거지'물에 대한 대안적 시나리오

<광해>를 보기 전 그 스토리만이라도 대강 들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짰더랬다. 꼭 그런 방식은 아니더라도, 어떤 ‘장삼이사’가 갑자기 왕이 되었다. 그는 물론 뭔가를 잘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백성을 위해 내렸다고 믿는 모든 결정들은 뭔가 어긋나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해 대략 자기를 갈구는 대신의 것에 반대하여 내린 결정은 명백히 그른 것으로 밝혀진다.

심란해서 믿을 수 있는 동네 건달 친구들 몇을 불러 요직에 앉혀 보지만 이 녀석들은 타는 내 속마음도 몰라주고 생애 처음으로 맛 보는 권력의 맛에 도취되어 주지육림에 빠진다.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니었는데 일이 왜 이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왕인데 세상도 나도 점점 더 수렁에 빠지고 있다. 여기까지를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으므로 갑자기 악역이 등장한다. 내가 세상을 망치고 있는 동안 왕이 만만해 보이니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어떤 권력의 흑막이 있는 것이다. 우연히도, 그리고 다행히도, 이 흑막은 일자무식인 내가 보기에도 명백하게 반민중적이며 이 세상을 수렁에 빠뜨릴 위인이다. 나는 내가 내일모레 폐위되더라도 저 녀석만큼은 처리해야 한다고 영웅적인 다짐을 한다.

내가 먹을 것 이외의 것에 이렇게 의욕을 보인 건 처음인 것 같다. 갑자기 몸에 생기가 들고 무언가에 분투한다. 동네 건달친구들 역시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돕는다. 우리가 그 흑막을 괴롭히는 방식은 진짜 왕과 귀족들이라면 차마 할 수 없을 치졸하고 반제도적인 것이지만 그 흑막이 명백하게 나쁜 놈이란 점에서 정당화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고 보니 나는 꽤 자기 일에 충실했던, 나를 갈구던 대신과도 교감을 하게 된다. 결국 절차와 제도를 잘 아는 그의 조언까지 합하여, 나는 흑막을 처단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극이 그냥 끝나면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상상을 전개했을 때, 나는 바로 이렇게 소리지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건 이미 주성치가 다 한 것이잖아?”

하지만 '주성치'가 출동하면 어떨까?

<광해>를 즐긴 한국 관객 중 상당수는 <광해>보다 주성치 영화가 훨씬 유치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민중주의적 환상’과 정치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비교했을 때, 나는 주성치 영화의 유치함(?)이 차라리 리얼리즘을 드러내는 방식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주성치의 영화는 굉장히 많으며 그것을 관통하는 몇몇의 코드들이 있다. 이소룡에 대한 패러디도 있고, 김용 소설에 대한 오마주도 있으며, ‘루저’들의 삶에 대한 애정도 있다. 하지만 몇몇 영화에 뚜렷이 드러나는 주제 중 하나로 ‘민중주의적 환상’이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주성치 영화에 드러나는 ‘민중주의적 환상’이 <광해>의 것보다 더 리얼하며, 우리 대중문화가 아직 따라가지 못한 부분이라고 본다. 즉 우리는 ‘민중의 영웅’(그게 노무현이든 아니면 환상의 창조물이든 간에)을 추억할 뿐 그것조차 패러디하는 건강함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다.

주성치 영화의 ‘민중’과 ‘주인공’은 결코 그 자체로 선량하지 않다. <식신>(1996)의 주인공은 애초에 사기꾼인데, 우리는 그가 (비유하자면) 재벌그룹에 인해 전락하자 감정이입을 하고 그가 ‘소림사 주방장’이 되어 복수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구품지마관>(1994)의 주인공은 애초에 탐관오리인데, 억울한 여인의 송사에서 잠깐 ‘탐관’의 원칙을 어기고 전락한 후 ‘탐관’들을 처단하기 위해 싸운다. <심사관>(1992)의 주인공은 민중을 돕기도 하지만 돈을 밝히기도 하는 ‘율사’(변호사)다.

▲ 영화 '심사관'의 한 장면.

이들은 선량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의 악을 증대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떤 개인적인 계기나 음모를 통해 전락을 맞이한 후에 나타난 ‘대적’을 위해 온갖 노력과 분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노력과 분투의 설득력은 그들의 선량함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의 억울함을 통해 담보된다. 만일 이 이야기들의 구조를 영화 <광해>처럼 갑자기 장삼이사가 왕이 되는 이야기로 변환한다면 여러분은 내가 위에 써본 시나리오와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소보'에서 시작된 변형된 민중주의

말하자면 ‘광해’가 민중을 사랑한 정치인 ‘노무현’에 비교될 수 있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평택의 중산층으로 적당히 살다가 하루아침에 너무 억울하게 해고되어 파업을 하게 된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이러한 투쟁의 결과는 주성치의 해피엔딩과는 달리 너무나 부당하고 비참하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만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들의 설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 주성치에게 딱 맞는 ‘위소보’라는 캐릭터의 옷을 입힌 김용 원작소설을 배경으로 한 <녹정기>(1992)인 것 같다는 점이다. 주성치는 소설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를 연기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 열연했다.

▲ 영화 '녹정기'의 한 장면. '녹정기'는 이후 주성치의 몇몇 영화들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그런데 소설 “녹정기”의 위소보의 경우 이기적인 주인공이지만 나중에 모든 걸 다 들고 내빼는 ‘해피엔딩’일 뿐 반민중주의적인 악역과 대면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설정들을 적당히 들고 와 ‘민중주의적’으로 바꾸어 본 게 <심사관>이나 <구품지마관>이나 <식신>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구품지마관>의 경우 일단은 <판관 포청천>의 패러디이기는 하나 청나라 황제와 친구가 된다는 설정 등에서 <녹정기>의 흔적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데, 물론 극적 갈등의 성격과 그것이 해결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녹정기>에선 황제의 친구가 되면서 여러 사건이 전개되지만, <구품지마관>에선 9품 관리에 불과했던 그에게 사건을 해결할 권력을 주기 위해 황제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식신>의 주인공이 (비유하자면) ‘재벌 빵집’에 대항하기 위해 소림사 주지스님을 만나는 것처럼, 현실적 권력에 휘말려 패배한 그 주인공들을 구원하기 위해선 이런 식의 ‘기연’이 필요하다. 물론 그 ‘기연’ 중엔 전 세계적인 흥행을 한 <쿵푸허슬>(2004)에서처럼 ‘알고 보니 내가 절대고수의 근골’이라는 것도 있다.

▲ 영화 '쿵푸허슬'의 한 장면

'기연'의 환상이 은폐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

이 ‘기연’의 환상 역시 물론 고달픈 현실을 은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엄청난 ‘기연’이 <광해>의 스토리보다 덜 현실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갈등을 이 ‘기연’으로 덮어 버리기 때문에 덮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리(=민중?)라고 권력자와는 달리 선량한 존재라고 자처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권력을 잡는다 해도 세상이 좋아지지는 않을 거란 것, 그리고 그렇게 적당히 타락해 살던 우리가 권력에 의해 파묻히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을 구원할 건 ‘기연’ 밖에 없다는 것(사실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난 결기가 필요하다는 것 등이다(<구품지마관>에서 '탐관'으로 살았단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들이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청렴한 관리'가 되려고 하자 "청렴한 관리가 되려면 탐관오리보다도 훨씬 악독해야 한다. 그들을 이겨야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광해>나 그와 유사한 작품들이 ‘민중주의적 환상의 한계’를 보여준다면, 주성치의 몇몇 영화들은 ‘그 한계 너머의 환상’을 보여준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중 무엇을 더 즐기는 지는 문화적 취향의 문제로 봐야겠지만, <광해> 등이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믿는 분들에게는, 차라리 주성치의 영화들을 권하고 싶다.

▲ 영화 '구품지마관'의 한 장면. 기본적으로 이 영화가 '판관 포청천' 시리즈의 패러디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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