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많습니다.

 

한 가지 가정. 당신은 경찰이다. 하지만 깡패이기도 하다. 당신은 신원을 은닉하고 범죄조직에 잠입해 스파이로 활동해야 한다. 이 낯익은 설정에 출발선을 긋고 영화 <신세계>는 출발한다. 골드문 그룹은 한국최대의 범죄조직이다. 몇 개의 계열사까지 거느린 이 기업형 조직폭력단은 3개 조직의 M&A를 통해 건설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출신 간판만 다른 계파가 아니다. 골드문의 서열 3위 정청(황정민)은 전라도 여수 출신에 '짱개', 화교라는 정체성에 기반 한 폭력조직을 이끈다. 골드문 그룹의 회장이 죽으며 조직엔 후계 다툼의 칼바람이 몰아친다. 그리고 여기에 경찰청의 강 과장(최민식)이 끼어든다. 후계 싸움에 개입하여, 손 쓸 방도도 마땅찮은 거대한 범죄기업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강 과장은 골드문 그룹에 심어둔 경찰 요원, 이자성(이정재)를 이용해 위험한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이름하여, 작전명 ‘신세계’.

이자성은 균열처럼 맞물린 정체성의 복판을 배회하는 불안한 햄릿이다. 강과장의 지령을 받고 조직에 잠입한 지 햇수로 8년. 그는 정청의 신임을 받는 오른팔, ‘브라더’가 된다. 이자성은 시간이 갈수록 깡패란 정체성에 동화되어 간다. 그의 진정한 딜레마는 경찰과 브라더, 어느 한쪽도 온전히 택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난관에 있다. 그는 경찰인 동시에 ‘깡패’다. 혹은 깡패인 동시에 ‘경찰’이다. 이 둘은 화해와 양립이 불가능한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경찰인 동시에 깡패라는 말은 결국, 경찰도 깡패도 어느 쪽도 아니란 얘기와 같다. 복귀를 약속한 시계는 일주를 완료하였건만, 강 과장은 그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요!”

“깡패새끼들도 날 믿는데 경찰인 니들은 왜 안 믿어!” 이 비통하고 절박한 절규는 실은 비교형량이 잘못된 질문이다. 이자성은 깡패들과 8년간 생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경찰은 그를 사지에 던져놓은 채 8년 간 간간히 대면하였다. 강 과장은 이자성을 ‘마크’하고 감시하지만, 정청은 ‘브라더’를 사랑하고 신뢰한다. 강 과장은 음모와 계략의 구슬을 꿰며 깡패들을 이간질한다. 자신이 심어 둔 ‘프락치’들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곤경을 지분거리며 협박한다. 그는 목적과 수단이 도착된 듯 경찰의 ‘업무’를 깡패처럼 수행한다. 깡패를 쫓는 경찰이 깡패보다 야비해지길 서슴지 않을 때, 법치와 범법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아니. 깡패에겐 의리라도 있지만 경찰에겐 의리마저 없다. 그러므로 깡패들도 믿는데 왜 경찰은 믿지 않느냔 항변은 형량의 오류다. 깡패들은 믿고, 경찰은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자. 재차 환기하지만 당신은 경찰의 ‘프락치’ 이자성이다. 당신은 이미 8년씩이나 ‘브라더’의 삶을 살아왔다. 강 과장은 앞으로도 당신을 ‘깡패’들을 낚기 위한 미끼로 사육하며, 언제까지고 위태로운 낚시 바늘에 꿰어둘 것이다. 당신이 경찰이란 것을 아는 인물은 기껏 몇 손가락이다. 당신을 깡패로 알고 있는 이들은 그 몇 십 갑절이 넘는다. 그러니까 ‘깡패’ 이자성을 지우는 것보다 ‘경찰’ 이자성을 지우는 것이 압도적으로 수월한 숙제란 얘기다. 경찰이냐. 브라더냐. 그렇다면 이 햄릿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실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모든 것을 말소하고 ‘나가리’시켜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다.

 

<신세계>의 어떤 인물들은 종종 벗어날 수 없는 숙명에 비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호한 사명감과 ‘수컷’의 나르시시즘에 도취돼 파국의 페달을 밟는다. “니들 이거 정말 자신 있어?” “잘못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경찰국장은 배팅을 하듯 불확실한 프로젝트를 발주하며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다. 그들은 제 육신을 과녁삼아 죽음의 활시위를 힘껏 잡아당긴다. 이중구(박성웅)은 후계자 자리를 내어주고 신변을 도모하기보다, 강 과장이 던진 ‘쥐약’을 먹고 확실하게 죽는 편을 택한다. 골드문의 서열 2위 계파 보스는 굴러 온 어부지리에 흥이 겨워,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들며 이자성에게 살해당한다. 강과장은 도난당한 이자성의 신원을 완전히 삭제한다. 그에게 골드문의 실권을 맡기며 마리오네트의 인형술사가 되려한다. 그리하여, ‘신세계’, 그 대망의 프로젝트의 완성.

 

하지만 이것은 택일 불가능한 사지선다형에 처한 이자성에게, 한 쪽의 선택지를 완전히 소거시켜주는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다. 이자성의 정체를 알고 있던 조직의 다른 ‘프락치’들은 이미 정청에게 제거 당했다. 자. 이제 손아귀에 들어 온 조직을 이용해 국장과 강 과장의 존재를 삭제해버리자. ‘경찰’ 이자성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골드문 그룹의 회장석은 당신을 위해 마련돼 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깡패’ 이자성을 위해 준비 된 새로운 세상, 바로 폭력과 범죄의 <신세계>다.

그간 충무로의 ‘깡패’들은 불나방처럼 뒷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출구를 잃어버린 채 비틀거리며 스러져갔다. 그들은 끝내 문제의 답을 찾아낼 수도, 자신의 ‘신세계’에 도달 할 수도 없었다. 공중전화 부스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자신을 버린 보스에게 “나한테 왜 그랬냐”며 울부짖다가, 비열한 거리 위에서 배신당하고, 복부와 흉부에 42번의 칼침을 맞고선 외마디 명대사를 남기며 장렬히 산화하였다. “고마해라. 마이 무긋다 아니가.” 홍콩 누아르 <무간도>를 거꾸로 세운 <신세계>는 그 실패의 서사가 의례히 멈춰 섰던 길목에서, 경찰을 버리고 깡패를 택한다. 망설이는 대신 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 영화가 흥미롭고 인상적인 것은 전적으로 그 불온하고 전복적인 카타르시스에 있다.

하지만 달리 말해, 이것은 전라도와 화교라는 중첩된 타자성의 주인공이, 법의 이름과 범죄의 갈림길에서 예정된 죄악의 권좌에 안착하는 타락의 서사일지 모른다. 나는 누아르란 장르에 매력을 느끼는 관객이다. 하지만 ‘어딜 짱개 새끼들이 조직을 넘 보냐’는 거침없는 타자성을 구동케 하는 질료로 특정한 지역적 정체성이 배합돼 있다는 점에서, - 예컨대, 정청이 단지 전라도 출신이었다면 ‘짱개’라는 타자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청이 전라도 ‘말투’를 쓰지 않았다면 그의 배다른 타자성은 온전히 ‘식별’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짱개’라는 극적인 타자성을 선연히 부각시키는 건 화교와 전라도, 두 정체성의 융합이다 - 방언과 출신지역으로 폭력배를 소묘하는 ‘한국형 누아르’의 클리셰를 온전히 즐길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의 불결하고 우스꽝스런 거지 행색으로 등장하는, 청부살인집단 ‘연변(족) 거지’들이 왜 이 영화에 필요 했던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개연성에도 동의하기 힘들다.

이자성은 내내 유약하게 번민하였던 인물이다. <대부>의 교차편집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의 클라이막스. 그의 갑작스런 장악력을 해명하기 위한 엔딩의 플래시백은 이자성이 정박한 신세계에 시원성을 부여한다. 동시에 이 회상과 반추의 에필로그는 방기했던 설명을 뒤늦게 보강하는 사족에 가깝다. 배우들의 이름값과 깡패들의 허세 들린 자아도취는 멋지고 그럴싸하다. 하지만 숏의 이음매, 앵글의 운용, 미장센은 범상한 수준에 머무른다. 눈에 익은 설정과 장치로 필름을 덧씌운 한국형 필름누아르 <신세계>. 이 새로운 대륙은 감격적이지도 매혹적이지도 않은 새삼스런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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