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서평자로 선정되면 출판사에서 택배를 통해 서평 도서를 보내주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일반화된 서평-교환형태다. 출판사와 서평자는 그런 추상적인 관계로부터 그들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고 익히 알고 있었고 그런 식으로 몇몇 서평들을 쓰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메일이 날아왔다. 출판사로 직접 와서 책을 받아 가라는 내용이었다. 생소했고 물론 그리 달갑지도 않았다. 하지만 택배로 책을 보내달라는 메일을 쓰는 것도 겸연쩍어서 그냥 한번 가보기로 했다.

책의 편집을 담당했던 편집자의 얼굴을 보고 잠깐 환담을 주고받으며 책을 건네받았다. 일 분도 안 되는 순간을 위해 거의 두 시간에 가까운 이동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그 행위는 분명히 비효율적이며 소모적인, 여가시간의 낭비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소한 그 행위 덕분에 직접 책을 건네받고 즐거워하던 만남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택배로 배달된 책으로는 불가능했을 만남이다.

『크랙 캐피털리즘』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행위의 반란’에 대한 책이다. 여기서 행위란 특별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앞의 작은 사례처럼 택배를 통해 책을 배송 받지 않고 사람에게서 직접 책을 건네받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도 포함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실천이,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는 행위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지금 당장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저자 존 홀러웨이의 독특한 관점이다. 그것은 반딧불의 춤을 닮았다.

“‘조명된’ 절망에 대립시켜야 할 것은, 반딧불의 살아 있는 춤은 바로 어둠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공동체를 만들려는 욕망의 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딧불의 잔존』(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길, 2012)

“반자본주의적 혁명가라는 것에 뭔가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많고 많은 사람들, 수백만 명의, 아니 아마도 수십억 명의 이야기다. (…)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크랙 캐피털리즘』(존 홀러웨이, 갈무리, 2013, 28~30쪽)

홀러웨이는 자본의 도덕을 거부하고 자기결정의 몸짓을 지향하는, 다시 말해 노동의 도덕에 항의하고 행위의 윤리를 향유하는 모든 몸짓들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붕괴는 그러한 작은 균열들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다. 파국과 절망과 멘붕의 시대에 실로 ‘힐링’이 되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사회 비판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와의 싸움이라는 것이 작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결코 다른 혁명적 실천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그는 강력하게 밝힌다.

“중요한 것은 구분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연속의 선을 발견하는 것이다. (…) 하이킹을 가거나 앉아서 좋은 책을 읽는 것, 혹은 야생적인 밤샘 파티에 가는 것은 사빠띠스따 반란이나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 봉기와 나란히 놓일 수 있는가? 이것은 거듭해서 반복되는 결정적 문제이다.”(57쪽)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무엇에 대한 행위이며 어떤 것에 반대하는 행위인가? 홀러웨이는 행위 자체의 현상을 보여준 뒤에, 우리가 어떤 것으로부터 행위를 되찾아야 하는지를 마르크스의 저작들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저작들을 경유하여 찾아낸다. 그는 자본주의가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을 통해 굴러가고 있음을 밝힌다. 이는 마르크스가 이미 지적했던 것이지만 오랜 세월 잊혀져왔다.

홀러웨이는 노동가치론의 기원을 탐색하며 노동-가치의 결합관계 자체를 문제시한다. ‘노동-가치’의 기원에는 가치화되기 이전의, 추상화되기 이전의 ‘구체적 행위’가 존재한다. 이것은 이른바 시초축적 단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추상노동 속에 실존하는 것으로서, 추상화된 노동가치 속에 존재하는, 그것에-대항하는-그것을-넘어서는 행위다. 이것은 추상노동에만 집중하며 노동의 투쟁에만 힘을 기울였던 과거의 혁명론들이 은폐했거나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이다. 홀러웨이는 이제 노동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에 대항하는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회관계 속에 실존하는 일상적인 투쟁이다.

“모든 사회관계는 활동적인 전장이며 살아 있는 적대이다. (…)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투쟁이다.”(243쪽)

그는 모든 곳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모든 사회관계 속에서 투쟁을 찾아낸다. 흔히 비관론자들이 보듯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에 잠식당하고 물화되었다고 그는 결코 보지 않는다. 우리가 노동을 그만둔다면,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창조의 행위를 지향한다면, 이미 자본주의는 멈추어 서게 된다. 이것이 홀러웨이의 급진적인 비판이자 동시에 대안이다. 실로 발본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강조는 쉽게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운동을 펼치는 마이클 하트와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마이클 하트는 부록의 서한에서 홀러웨이에게 이렇게 의문을 표명한다.

“달리 말해, 교환가치에 대해 사용가치를 긍정하는 정치적 기획은 내게는 전자본주의 사회를 다시 붙잡으려는 향수에 젖은 노력처럼 보입니다. 내가 이해하는 바의 맑스의 기획은 이와는 달리, 다른 쪽으로 나오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를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마이클 하트, 401쪽)

확실히 홀러웨이의 대안은 이러한 비판에 취약해 보인다. 그는 자본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행위의 잠재력으로 우리의 눈길을 되돌려 놓는 데는 성공하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우리의 생산력으로 전유할 수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목가적인 문명 비판가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행위할-힘의 발전은 사회화의 거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 도전은 오히려, 균열을 통해 다른 사회화를,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의 특수성에 대한 즉 자기결정을 향한 경향에 대한 충분한 인식에 기초를 둔, 자본주의의 종합보다 훨씬 느슨하게 짜인 사회화를 구축하는 것이다.”(355~356쪽)

그는 고립된 단위로의 낭만적 복귀가 아니라 사회적 상호접속의 다른 종류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수평성, 존엄, 대안경제, 공유지 같은 것들이 그 예시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하기를, 언제나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지금여기에서의 우리의 행위’라고 말한다. 그 어떤 사회화의 구축도 행위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자본주의에 의한 삶의 물화에도 불구하고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자본을 넘어서는 것을 창조한다. 추상노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체적 행위는 가치법칙을 넘어서, 흘러넘치면서 실존한다.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모든 억압에서 이탈할 수 있는 자기결정성을 갖고 있다. 실패하고 좌절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절망과 멘붕과 파괴와 파국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둠의 한복판에서 하나의 반딧불로서 살아 있는 춤을 출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무기, 곧 행위다.

여담을 하나 붙인다. 올해 시작한 것이 하나 있다. 세미나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 세미나를 네 번 했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참고도서도 스무 권 정도 읽었다. 우리는 다시 세미나를 하고 또 뒤풀이를 할 것이다. 이것은 과연 자본주의를 균열 내는 일일까?

확실치는 않다. 홀러웨이 역시 언제나 불확실성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훈육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창조하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세미나의 공간에서 우리는 이윤 생산을 거부하고 담론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균열-창안을 우리의 행위로서 만들어내고 있다. 세미나가 혁명적 행위라면, 그 이유는 이것이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363쪽)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세미나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순간들이 인생의 충만한 순간임은 스스로 느낀다. 행위는, 균열은, 미래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하늘을 밝히는 것은 저 장관적인 폭발만은 아니다. 별들을 바라보라. 맨 먼저 당신은 가장 밝은 별들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오래 바라보라. 그러면 당신은 빛나는 수많은 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21쪽)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