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스런 고백 하나로 들머리를 터야겠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는 동안 어느 틈에 눈꺼풀을 배집고 나오는 눈물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물론 ‘남사’라는 단어로 굳이 감정의 형량을 매긴 건, 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게 유치한 목불인견이란 뜻이 아니다. 극장에 앉아 눈물을 훔친다는 게, 그만큼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건이란 얘기다. 뒤집어 말하면, 나 같은 정서적 벽창호의 트고 메마른 가슴도 무장해제시킬 만큼, 영화가 던지는 최루탄이 강력하다는 반증일 게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이 영화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봉한 지 3주 만에 700만 관객의 울음보를 터트리는 기염을 토한 이 영화에는 대략 두 가지 방향의 의문이 이미 제기돼 있다. 먼저, <7번방의 선물>이 오로지 관객의 눈물샘을 두들기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는 영화란 냉소 섞인 지적. 그리고 지적장애인이란 정체성을 극단적인 코너에 몰아넣고 엔터테인의 소재로 삼는다는 우려 섞인 고갯짓. 내 고민의 외연은 둘 사이 어디쯤이거나, 그 둘 모두와 교차하지 않는 곳에 빗금 그어져 있다.

특정한 영화가 특정한 임무에 특화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폄훼할 수는 없다. 많은 경우, 영화의 기술적인 문제란 것이 본연의 의도를 세련되게 관철하지 못하는 데서 불거진다는 걸 떠올린다면 말이다. <7번방의 선물>은 부지런히 비축해둔 설정과 일관되게 초점을 맞춰온 예승-용구의 관계를, 조바심 내어 탕진하지 않고, 결정적인 국면을 전후해 점진적으로 살포하고 있다. 온갖 개연성의 이탈과 설득력의 파괴에 직면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이탈과 파괴로 가능했던 설정 덕분에, 영화는 반사적이지만 밀도 높은 신파를 연성鍊成해냈다. 영화에 대한 비판은 우선 그 영화에게 귀착되어야 한다. 일의적으로 정의하기 힘들고 영화를 관람한 것 외에는 책임이 없는 관객에게로 수렴되어선 곤란하다는 점에서도 이런 식의 인상 평은 너무 단순하거나, 핵심을 짚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가 놓쳐 버린 윤리적 고민들

하지만 <7번방의 선물>이 기술적으로 조리가 있는 신파임에는 동의하면서도, 스크린과 마주하는 내내 입맛이 텁텁했다. 특히 어떤 대목에 이르러선 이 영화가 비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부터 쏟아낼 토로와 문제제기는 앞서 얘기한 후자의 논평(엔터미디어, 듀나, “<7번방>, 류승룡의 기막힌 연기에 감탄했지만...”)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선 지적장애인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소비한다는 단상을 넘어, 좀 더 세밀하게 중요한 장면을 들추어 보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특정한 정체성을 빌려와 최루의 퍼즐을 완성하면서도 세심한 배려와 성찰, 윤리적 고민을 방기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여섯 살의 어느 무렵에 지능지수의 발달을 멈춘, 주인공 용구(류승룡)을 지나치게 학대한다는 건 아닌지 꺼림칙했다. 러닝 타임 내내, 영화는 손가는 대로 용구의 뺨을 올려붙이고, 내키는 대로 발길질을 퍼붓는다. 영화를 보며 손가락을 접은 장면만 꼽아도, 용구는 대략 여섯 차례에 걸쳐 열댓 번의 구타에 가차 없이 노출된다. 물론 이것은 지적 장애인에 대한 날선 선입견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전략일 수도 있다. 나는 지적 장애인을 향한 우리사회의 정신적 폭력과 차별의 실상이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과연 영화가 재현한 폭력이 관객과 용구 사이, 현실의 낭떠러지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설계된 것인가. 혹은 실제 그 목적을 위해 제대로 복무하고 있는가. 영화의 초입을 지나 서사가 물살을 탈 때 즈음, 아동 성폭행과 살인의 누명을 쓴 용구가 교도소로 이송된다. 이 장면을 전후한 몇 가지 상황의 부재는 영화의 관심사를 판별할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한다. 우선 경찰에 체포된 용구가 교도소로 이송되기 전 일심 재판을 받는 과정의 부조리가 무슨 점프 컷처럼 누락돼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사법체계의 불의와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지나친 선해에 동의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교도소 과장(정진영)은 수화기를 둔기 삼아, 영화 내에서 가장 ‘아프게’ 용구를 가격한다. 둔탁하게 퍼지는 타격음과 고통스러워하는 용구의 모습.

많은 경우, 영화는 허구와 허구 사이 숏의 선택지를 갖고 있는 선택과 배치의 예술이다. <7번방의 선물>은 낯선 공간에 두렵게 노출된 용구란 ‘주체’의 심경에 필름을 할당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감행한다. 부조리한 폭력과 고통의 감각을 용구와 관객이 곱씹을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7번방에 투입시키는 것이다. 홍보 영상 등을 통해 익히 알려진 코믹한 대사. “1961년 1월 18일에 태어났어요. 제왕절개. 엄마 아팠어요. 내 머리 커서.” 영화는 방금 전 용구를 구타하고는 손바닥 뒤집듯 웃음의 도구로 활용한다. 나는 차마 그 장면에서 웃을 수가 없었다. 위악적이고 단선화된 물리적 폭력이 역시 비일상적 공간과 비현실적인 사건을 매개로 행사될 때, 지적장애인을 옭아매는 일상적 편견에 연루된 우리들 모두의 죄의식은 깨끗하게 소거될 것이다. 오직 방관의 자리에서 ‘타인’의 폭력과 ‘타인’의 고통을 관람하며 안락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안전하게 눈물을 훔치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용구를 다루는 방식에 동의할 수가 없다.

 

이 도구화의 증거는 도처에 산재해 있다. 이유 없이 따귀를 맞을 때도, 자신의 선의가 흉물스런 추행으로 매도될 때에도, 반론의 여지가 충분한 사형선고가 원인 없이 언도될 때에도. 용구는 버튼을 누르면 녹음된 음성을 재생하는 곰 인형처럼, ‘예승이’라는 호명만 반복하며 ‘딸 바보’의 정체성을 배정받는다. 영화에는 용구가 ‘예승이’에게서 벗어나 주체적 의사를 발현하는 대목이 두 번 등장한다. 교도소 야외에서 몸을 날려 7번방의 방장(소양호, 오달수)을 겨냥한 칼침을 대신 맞는 장면. 화염이 일렁거리는 교도소에서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과장을 구출하는 장면. 이 두 장면 역시 예승을 교도소에 들여오기 위한, 혹은 과장을 서사에 개입시키기 위한 철저히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여흥과 정서적 정화를 위해 용구의 정체성을 소진한다. 지적장애인이라는 어렵고 곤란하지만 필요한 질문과 대면시키지 않는다.

이런 정체성의 ‘강제’가 지적장애인을 표현하는 상투적인 장치와 만날 때면 사태는 한층 난감해진다. 영화의 종반. 카메라는 교도소 담장 위로 붙박은 듯 멈춰선 풍선 기구에 올라탄 용구와 예승을 Befoer-After처럼 보여준다. 내내 촌스러운 호섭이 머리에 판에 박은 외양이던 용구가 어느새 말쑥한 가르마에 의젓한 풍채로 상공을 바라본다. 이 장면이 지적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이미지로서 전복하고 있다 받아들인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해석이다. 이 영화가 상영시간 내내 그 도식적인 편견을 재료삼아 웃음을 제조했다는 분명한 사실을 떠올린다면 말이다.

 

오히려 용구의 외양이 서로 다른 판본으로 연출될 때, 관객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건 우리가 동일시할 수 없는 ‘지적 장애인’ 아버지다. 그 순간 공고해지는 것은 지극히 즉자적이고 단순한 이미지로 양분된 정상-비정상의 선명하고 뿌리 깊은 경계와 분리다. ‘지적 장애인’ 용구가 사라진 화면에서 현현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딸 바보’들의 판타지를 만족시킬, 사랑스럽고 깜찍한 데다 어른스레 아빠를 보듬을 줄 아는 ‘딸’ 예승의 ‘아버지’ 용구다. 그렇기에 세상을 떠난 ‘아빠’의 자리를 젠틀하고 정의로운 과장(정진영)이 대신한다는 설정은 징후적이다. 관객은 지금 이 애잔하고 안타까운 가족드라마의 어디쯤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있을까.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이야기입니까

 

현재와 과거, 두 번의 재판 시퀀스에 이르러선 이 영화가 비겁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우기가 힘들다. 영화는 IMF란 특정한 연대를 지목하며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김영삼 정권 말기의 교수대 위로 용구의 등을 떠민다. 마찬가지. 감독은 용구를 부당하게 마련된 피고인석에 앉히며 관객이 현실의 사법체계에 가지고 있는 특정한 정향 - 이미 몇 차례 흥행의 부속품으로서 성능이 입증된 바 있는 - 의 지반에 최루탄의 발사대를 장치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반사이득에 온전히 책임을 지려하진 않는다. 혐의를 시인하지 않으면 예승에게 똑같이 복수하겠다는 경찰청장의 협박. 영화는 도무지 이유와 개연성을 알 수 없는 서사의 해명책임을 용구에게 떠넘긴다. 당연히 이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전개를 가능케 하는 건, 현실의 편견으로 뒤범벅된 지적장애인 용구의 ‘가공’된 정체성이다. 감독은 교도소(판타지의 공간)에서 담벼락 밖(현실의 공간)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정박한 풍선처럼, 그가 창조한 ‘가상’의 부조리가 행여나 안온한 신파의 경계를 넘어설까 노심초사한다. 영화의 오프닝. 법정의 다른 곳을 잡은 화면 너머로 판사의 개정 선언이 슬그머니 들려온다. “사법연수원 ‘모의’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엔 어떠한 죄사함도 성사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예승이와 우리는 그리도 그 결말에 감격하며 안도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용구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복도 장면에서는 한 손으론 이미 번진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한 손으론 참담함에 눈을 가리고만 싶었다. 용구는 지금까지 자신과 관계된 어떠한 원인과 결과도 인지하지 못하(도록 감독은 그 정체성을 설계하)였다. 헌데, 자신에게 닥친 숱한 차별과 폭력에 반응하지 못하였고, 지금 이 상황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던 용구가 갑자기 예승과 끌어안고 오열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용구가 걸친 존엄의 진피를 벗기고,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존재의 밑바닥, 죽음 앞에 팽개쳐진 친 채 관객과 마주보도록 앵글을 설정한다. (화면의 구도 상, 용구가 전신을 향하는 먼 곳에는 관객을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이 없다.) 용구는 관객을 향해 한없이 조아리면서 몸을 떨며 애원한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자. 이렇게 용구가 불쌍한데도 당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여섯 살배기 지능지수를 가진 ‘타자’라고 해서 ‘우리’와 같은 감정들, 아무런 분노도, 욕망도, 슬픔도, 의지도 없이 살아갈 거란 얘기를 인정할 수가 없다. 지적장애인이란 정체성에 웃음과 눈물을 의지하고 있는 이 영화에는 희망이나 전망이라는 것이 없다. 오로지 ‘딸 바보’ 용구가 온갖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에 휘말리다가, 힘없는 발버둥도 쳐보지 못한 채 결국 목숨을 잃고야 마는 절망밖에 없다. 이 가학과 피학의 서사에서, 용구에겐 서툴더라도 주체적 의사를 표명하고 저항할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다. 무력하게 희생되고 소비당할 뿐이다. 그를 옹호하고 항변하는 역할은 주변인들에게만 전속돼 있다. 용구에게 주어진 유일한 역할은 허망한 겁박에 속아 죽음을 자초하는 ‘딸 바보’ 용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이야기일까.

 

사랑스런 딸 앞에서 말쑥한 신사에게 뺨을 얻어맞고, 벌건 대낮의 노상에서 살인범으로 어이없이 오인당하고, 기자들의 플래시가 무수하게 터져나가는 경찰서에서 보란 듯이 폭행당하고, 교도소의 배좁은 독방에서 괴롭게 결박당하면서도 세일러 문 가방과 예승이만 되뇌는, 박제된 토끼 같은 용구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혹시나 그것은, 어리석고 무력하지만, 순박하고 따뜻한 타자를 강제하며 온기와 슬픔을 고양하고픈 우리들의 욕망은 아니었을까. <7번방의 선물>이 끝나고 눈시울을 닦아내며 극장을 나서던 나와 당신,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혹은 우리가 눈물로 애도한 대상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용구의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한 우리들이, 한번쯤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아야만 한다고 믿는다.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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