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만 개면 남친(남자친구)가 담배를 끊는대요. 도와주세요~ >_<"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뒤적이다 한 장의 포스팅을 발견했다. 사진 속엔 앳된 얼굴의 여대생이 깜직한 이모티콘과 사랑스런 호소로 도배한 스케치북을 들고 서있다. 아무리 어르고 다그쳐도 금연할 의지가 없는 남자친구가 ‘좋아요’ 만 개에 담배를 끊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아니, 얼마나 애인이 말을 안 들었으면, 별 것 아닌 사랑싸움을 이런 식으로 광고까지 해야 하나. 겨울바람에 시달리는 옆구리를 막아줄 팔짱 하나 없는 나로선 왠지 모를 얄미움(?)마저 느꼈다. 흥미 반, 호기심 반. 얼마간 사진을 바라보다, 흠칫 눈을 치켜떴다. 어라. 포스팅 한 지 8시간. 만 번의 ‘좋아요’란 미션임파서블은 이미 달성돼있었다. 포스팅 하단, “~명이 좋아합니다.”의 공란엔 무려 20000이란 숫자가 기록돼 있었다. 대략 지난 일주일 간, 서로 다른 ‘여친’들이 기염을 토해내며 염원을 달성하는 것을 여기저기서 목도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이채로운 금연 프로젝트는 작은 유행처럼 번져나갔나 보다.

이제 페이스북도 다양하게 진화(?)해 가는 구나, 재밌게 웃고 넘길 수 있는 소소한 사건일 게다. 하지만 이 광경은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머리 한구석을 맴돌았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페이스북 사용자 수는 천만 명을 앞두고 있다." 만 명분의 클릭을 짧은 시간 내에 확보했다는 건, 당연하게도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가 그만큼 일상에 깊숙이 안착했다는 방증. 그리고 또 하나. 현실에 대한 개입, 혹은 참여의 네트워크로서 SNS에 대한 단상이다. 물론, SNS가 세상을 바꾼다는 철지난 구호를 복창하려는 건 아니다. 그건 이 자리에서 논의하기엔 너무 거창하거나, 이미 대략의 판가름은 내려진 얘기일 테니. 다만 이 깜찍한 유행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좀 더 사회적인 무언가의 편린을 유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대표적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지만, 페이스북은 트위터와 여럿 변별되는 지점이 있다. 다소 짓궂은 비유. 트위터가 광활한 수용지에 서로 다른 종을 풀어놓은 사파리라라면, 페이스북은 폐쇄형 군집 동물원이다. 트위터는 임의적이고 일방적인 관계 맺기를 전제한다. 그곳은 관계의 경매장이다. 팔로우와 언팔. 클릭 한 번에 내키는 대로 구매와 반품.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방대하고 다양한 타임라인을 구성할 수 있다. 반면, 페이스북은 좀 더 폐쇄적이다. 신청과 수락을 통해, 쌍방적인 관계가 성립한다.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으면 나는 그의 생각과 일상을 구독할 수 없다. 때문에 트위터가 갖가지 정체성이 뒤엉킨 채 때론 연대하고 때론 뜨고 받는 개방된 익명의 공간이라면, 페이스북은 신원이 확인된 동류집단 내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동심원적 네트워크다.

‘리트윗’(RT)과 ‘좋아요’. 두 매체의 공유 기제의 작동 양상 역시 이런 차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트위터는 정보와 의견을 확산시키는 임무에 특화돼있다. 반면 페이스북은 한 곳으로 수렴하는 구조다. 쉽게 말해 트위터가 작성된 트윗(tweet)의 소유권을 끊임없이 이전시키는 수건돌리기라면, 페이스북은 작성자에게 계속해서 집중시키고 더하는 피라미드 쌓기다. 게다가 리트윗의 용례가 동의와 비난, 양 갈래로 나뉘는 데 비해 ‘좋아요’는 말 그대로 ‘좋아하’는 긍정의 기능만을 수행한다. 글의 내용에 동의하든, 글보다는 글을 작성한 사람에 동의하든, 둘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건 동의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현하든. 혹은 맘먹고 찍어 올린 비싼 음식, 고가의 공연 티켓, 두꺼운 양장본 교양서적, 까페에서의 미필적 고의 같은 연출된 일상이든. 어쨌건 당신의 포스팅이 ‘좋아요’.

우리는 암묵적인 전제처럼 안온한 동의와 관심을 주고받는다. 수집된 ‘좋아요’는 개인의 영향력과 존재감의 지표로 환산돼 그 총량을 드러낸다. 무수한 멘션 중 하나를 클릭해 리트윗 횟수를 확인하는 과정 없이도, 포스팅의 고정된 소유권은 특정한 명의의 ‘좋아요’ 보유량을 자연스럽게 노출시킨다. 때문에 페이스북은 포스팅 작성자의 존재감을 여타 네트워크 구성원들이 대리 구축해주는 효과가 좀 더 분명하다. 마찬가지, ‘좋아요’의 증여자들은 어떤 포스팅을 ‘좋아한다’는 신호를 송출하며 자신의 관심사와 생각을 전시한다.

‘좋아요’ 만 번, ‘남친 금연 프로젝트’는 이런 페이스북의 특성에 내기와 미션의 룰이 결합된 사건이다. 사실 ‘좋아요’ 만 개와 ‘남친’의 금연 사이엔 아무런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소셜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에게 어느 정도의 지지를 획득하건, 두 연인 사이의 문제일 뿐. ‘좋아요’에 동참한 이들이 그 금연으로부터 얻을 실익과 피해가 전무함은 물론, ‘여친’의 내밀한 만류도 거절했던 ‘남친’이 옷자락 하나 실키지 않을 생면부지의 ‘좋아요’들을 참고할 이유도 사실 없다. 이런 빅 이벤트를 개최할 필요 없이 끊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를 결정하면 되는 일이다.

결국 이 좋아요 수집 프로젝트는 금연의 이유보다, 만 개의 관심과 동의, 그 어마어마한 총량으로 당위를 획득하는 공허한 퍼포먼스인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건 페이스북이란 서비스가 네트워크의 참여를 추동하는 구조가 그렇게 설계돼있단 얘기일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엔 ‘남친’의 건강을 위해 정말로 금연을 강제하고 싶다는 실용적 동기, 10000명의 좋아요가 가능한 사건인지 확인하고픈 호기심이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전시하고 그 관계의 일각을 스스로 시험대에 올려 대타자의 환유물 같은 군중들에게 사랑을 승인받고픈 욕망도 있을 게다. 하지만 보다 눈여겨봐야할 게 있다. 이 연인들이 자신들에 관한, 그렇기에 자신들이 해결하거나 결정해야 할 문제의 책임을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에게 이전시켰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들이 정말로 어떤 책임을 방기했다거나, 그렇기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제가 베플이 된다면, 대학로에서 삼겹살을 굽겠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네이트 베플 공약은 나에게 관심을 준다면 이만큼 망가져서 보답을 해드리겠다, 라는 등가적 교환이었다. 반면, 이 경우는 "내가 이런 어려움을 안고 있는데 여러분의 참여로 좀 해결해주세요"라는 전적인 전가와 요청이라는 것.

 

SNS가 일상에 뿌리내리면서, 기업들은 이미지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보다 입체적이고 풍부한 정보를 고정적으로 전달하는 수렴의 구조는 페이스북을 주효한 홍보의 수단으로 만들고 있다. (무작위로 선별해보면, 삼성그룹의 트위터 팔로워 숫자는 59만여 명이지만, 페이스북 친구 숫자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SK 텔레콤의 팔로워는 16만 명 정도, 페이스북 친구는 65만 여 명이다. 마찬가지 현대카드의 팔로워 수는 5만 여 명, 페이스북 친구숫자는 11만 여 명이다.) 특히 근래에는 기업의 홍보와 자선사업을 결합한 일종의 소셜 기부 마케팅이 시도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작년 연말, 삼성그룹은 SNS를 통해 저소득층 자녀를 지원하는 ‘따뜻해유(油)’ 캠페인을 진행했다. 삼성그룹 SNS 페이지 방문자들이 리트윗하거나 ‘좋아요’를 클릭한 만큼 적립금이 누적된다. 삼성이 그 적립된 만큼 비용을 담당하여 공부방의 난방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좋아요’를 누르시는 만큼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나눔이 돌아갑니다."

 

기업의 사회적 환원은 이런 보여주기 식 세레머니, 혹은 마케팅과 인과관계를 맺지 않는 독립적인 논점이다. 적절한 사회적 환원의 방식은 물론, 그 이전에 시혜가 필요한 구조를 가중하고 있는 기업들의 책임, 원론적으로는 단발성 기부가 해결할 수 없는 시스템의 개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게다가, 언뜻 SNS 구성원 개개인이 따뜻한 나눔에 참여하고 있는 듯 뵈는 이 캠페인의 진실은 실제로는 아무런 각출과 나눔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어차피 그들이 감당해야 했거나, 충분히 지불할 여력이 남아도는 기부의 비용을 가상의 모금을 통해 적립한다. 돈 자루를 움켜쥔 채 가난한 이들의 불행을 그 이웃들의 선의로 시험하는 미션을 주관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특히 작년 연말, SK텔레콤은 소셜미디어팬 100만 명 돌파 기념, 경품 수령과 결식아동의 점심도시락 중 양자택일케 하는 성선性善설과 성악性惡설의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 가상의 환원과 참여 속에서 SNS 이용자들은 손가락질 한 번에 시혜의 효능감과 선량한 자존감을 획득한다. 기업은 자신들이 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네트워크 구성원들의 참여로 전가하고 그들을 시혜를 베푸는 책임의 자리에 옮겨놓는다. 적립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기부 액수의 규모는 오로지 참여자들의 클릭 횟수가 결정한다. 기업은 문제의 당사자가 아닌, 환원의 중계자로서 방관하는 것이다. 이 훈훈한 마케팅의 '좋아요' 갯수만큼 늘어나는 것은 기업의 인지도와 소비자 호감도, ‘사람’이 먼저, 혹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기만적인 휴머니즘이다.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이 자신보다 조금 더 불행한 이들에게 가상의 시혜를 베풀며 사라지는 것은,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신의 곤경에 대한 계층적 자의식, 사회적인 문제의식과 연대인 것이다.

 

삼성의 '따뜻해유' 캠페인은 ‘좋아요’와 리트윗 1건당 1000원씩, 나흘간 4700여만 원을 ‘적립’하였다. 전국 공부방 열 곳에 연료비와 방한 제품이 전달되었다. 기업은 당신의 온정이 이웃들의 희망이 된다며 선의를 거래하고, 언론은 SNS를 통해 새로운 기부 풍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공치사로 보조를 맞춘다.

하지만, 좋아요 만 번이면, 정말로 세상이 따뜻하게 바뀔까요? 천만에.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말이다.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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