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스필버그라고 불리는 길예르모 델 토로. 그의 전적은 꽤나 화려합니다. 쿵푸팬더2와 판의 미로, 호빗과 가디언즈 그리고 마더앤 차일드까지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판타지물을 넘나들며 상당히 많은 작품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손을 댔었죠. 기획을 하기도 하고 직접 프로듀싱을 하기도 하며 때론 각본을 제공하고 심지어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하는 등, 장르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 재주를 선보인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독특한 이력의 감독이죠. 하지만 이 감독의 특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역시 공포물을 기획할 때가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공포물에서 흔한 패턴이 되어버린 공포의 정석을 뒤따르지 않고 자신만이 기획한 서글픈 공포의 근원을 쫓아가는 차분한 시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공포를 조성하는 크리쳐들도 신선했고 그 공포를 조장하는 감정 또한 남달랐습니다. 제작에 이어 연출과 각본까지 직접 담당한 판의 미로나 그 초석이 되는 악마의 등뼈와 같은 작품을 살펴보면 이 감독이 얼마나 남다른 감성을 공포로 이끌어내는 천재적인 감수성의 소유자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감독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은 이미 알려진 작품들이 아닌 '줄리아의 눈'이라는 스페인산 마이너 영화였습니다. 물론 이 영화의 감독은 '길예르모'가 아닌 '기옘 모랄레스'였습니다만, 길예르모 감독이 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의 홍보 방향은 판의 미로와 길 예르모였죠. 비록 본인이 선두지휘해서 만들어낸 작품은 아닙니다만 이 줄리아의 눈을 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남다른 감수성의 공포를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영화 '마마'의 홍보 방향은 역시 ‘줄리아의 눈’의 수순을 밟고 있더군요. 분명 길예르모는 이 작품의 연출가가 아닌 제작자일 뿐임에도 온통 이 영화를 소개하는 말은 '길 예르모' 감독의...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저조차도 길 예르모라는 이름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으니 말 다했죠.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의 3분짜리 단편영화를 보고 그에게 함빡 반했다는 길 예르모 감독의 찬사를 믿고 그가 선택했던 또 하나의 신선한 공포 '줄리아의 눈'의 산뜻함을 기억하며 ‘마마’를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마마’라는 제목과 달리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모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잔혹합니다. 별거 중이었던 아내를 총으로 쏴죽이고 어린 딸 둘을 납치해서 설원을 달리는 무책임한 아버지는 심지어 이 불쌍한 아이에게 직접 총구를 겨누기까지 하는군요. 순간 그의 총을 빼앗고 죗값을 치르게 하는 이름 모를 크리쳐. 세월이 지나 아이들은 그것을 '마마'라고 부릅니다. 5년여의 세월 동안 아이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가를 스쳐 지나가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에 올려놓은 아이들의 서툰 그림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신선함을 느꼈던 유일한 한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두 발의 소녀가 점차 네 발이 되고 동생은 피를 토하고 그 모습을 울상으로 바라보는 언니의 그림이 많이 슬프고 가혹하더군요. 아이들은 5년간 마마의 체리를 먹으며 점차 정서가 차단된 동물에 가까운 형태를 띠며 생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5년 뒤에서야 숲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주온이나 링과 같은 일본 특유의 음습하고 불편한 저주와 맞닿아있습니다. 귀신과 인간의 교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요. 한을 풀어주면 성불하는 우리네 착한 귀신이나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해코지는 안 하는 마인드가 애초에 통하지 않는 미친 마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의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인간들의 해결사 노릇이 그야말로 뻘짓으로 느껴져 지루하기만 합니다. 3분짜리 단편 영화를 100분으로 늘리면서 이만큼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겠지만요.

여러 편의 영화를 함께 보고 있는 듯한 진부함을 느끼는 것 역시 마마에서 느낀 불만이었습니다. 장화홍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자매의 잔혹 동화라서만은 아니었지요. 어떤 장면에서는 헬렌 켈러가 떠오르기도 하고 늑대소년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식스센스가 엿보이기도 했으며 이 장면은 분명히 사다코의 공포의 비디오 같았고 심지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한 장면이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반가웠던 카메라 플래시 씬도 역시 ‘줄리아의 눈’에서 이미 써먹었던 아이템이지요. 물론 영화 ‘마마’가 이 모든 영화를 차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만큼 누구의 머릿속에나 한 번쯤 나왔을 만한 이야기를 그대로 교집합해놓은 진부함의 결정체라는 뜻이지요. 심지어 공포의 크리쳐는 정말 이제는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싶은 주온과 엑소시스트의 허리 뒤집은 각기 귀신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게 제겐 공포보다 두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아쉬움만 남았던 작품은 아닙니다. 진부함의 일색이라고는 했지만 공포를 조성하는 방식만큼은 기존의 공포영화와는 다른 기발한 창의성이 느껴지는 부분이죠. 아마 길 예르모 감독이 반한 것 역시 이런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요.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어느 하나 아쉬운 부분 없이 매끄럽게 맞아떨어집니다. 릴리 역의 어린 배우는 워낙 미숙해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 것인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미숙해 보이는 부분마저도 연기였던 것을 알고 나서는 무척이나 감탄했었죠. 길 예르모 감독이 손을 댄 작품들이 다 그러하듯이 공포와 판타지물이 결합된 신비스러운 분위기 또한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장점입니다.

설치류는 새끼를 낳고 그 환경이 새끼를 키울만한 적합한 곳이라 판단되지 않는다면 새끼를 그대로 잡아 먹어버리는 습성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약체로 태어난 새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요. 동물이라서 가능한 행동이라구요? 우리는 이미 많은 기사 속에서 접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선택한 자살을 아이에게까지 강요하며 죽음까지 함께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부성애와 모성애.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나의 만족을 위해 아이를 놓지 못하는 이기심이 만들어낸 처참한 비극을요. 모성이 집착이 되는 순간 아이는 소유물이 되고 죽음마저 함께해야 만족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미친 엄마 유령의 경우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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