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다시 문화다'라는 진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문화다,라는 하나 마나한 말을 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정치’ 너머의 세계를 보다 굳건히 하지 않으면 다시 우리가 ‘정치’를 성취하기 더욱 어렵지 않을까 하는 어떤 불안한 예감 때문이다. 5년은 긴 시간이다. 그 긴 시간을 그럭저럭 모든 것은 다 패배하는 시절이라고만 떠들기엔 우린 아직 젊고, 우리의 마음만은 결코 패배(!)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매주 1회, 주말마다 <미디어스> 기자들이 돌아가며 ‘미디어스 컬트 칼럼;오덕어스'를 연재한다. 때론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의 고백이 될지 모르고 또 어떤 때에 문화와 정치의 이질감을 날카롭게 횡단하는 한 자루의 '검'이 되길 소망한다. 그 주의 가장 ’핫‘한 아이템이라기보단, 끝내 ’핫‘하게 도래할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덕어스’라는 코너 제목을 정했을 때 한번 정도는 톨킨의 무언가에 대해 떠들게 되지 않을까 했다. ‘오덕어스’는 ‘오덕’과 ‘미디어스’의 합성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들어스’(Middle-Earth)를 연상케 하려는 의도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그랬듯 2001년 크리스마스 시즌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1: 반지원정대>를 극장에서 보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소설 내용이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하는 기대감에 심장이 쿵쾅대는 걸 느꼈다. 영화가 끝난 후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곧바로 다시 표를 샀다. 다음 시간대는 매진이라 심야표를 구했다. 그렇게 나와 피터 잭슨의 ‘가운데땅 이야기’(사실 '미들어스‘는 그 세계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한 대륙을 지칭하는 말이다)의 첫 만남은 밤을 새며 이어졌다.

나의 ‘가운데땅’ 입문기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나, 스무살 무렵의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영화가 개봉하기 전, 그러니까 남들보다 몇 년 전에 소설을 읽었다고 으스댔던 것 같다. 그렇게 된 건 내 취향이 아닌 순전한 우연이었는데도 말이다. 청소년기 내 주변엔 <취미가>를 구독하던 종류의 취향인들이 많았고, 그들은 <슬레이어즈>와 ‘PC통신 판타지’를 즐기던 내게 ‘취향의 계보’를 섭렵할 것을 ‘권유’(...라고 쓰고 강요라고 읽는다)했다.

그들이 내게 ‘취향의 계보’를 제시한 방식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좌파 운동권들의 그것과 흡사했다. 가령 그들의 생각으로는, 농업이 여전히 주된 산업인 제3세계 국가의 청년들이 혁명을 꿈꾸기 시작할 때 ‘마오쩌둥’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슬레이어즈>를 알게 된 나는 미즈노 료의 <로도스도 전기>를 이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계보의 정점에 누가 있었는지는 뻔했다. 말하자면 운동권들이 취향과 정파에 따라 상이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결국 레닌을 만나고 또 거슬러 마르크스를 만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 이름도 찬란한’ J.R.R. 톨킨을 영접해야만 했다. (피터 잭슨 영화에 나오는 간달프 영감처럼 자체발광할 것 같은 이미지)

당연한 일이지만 '영접'은 쉽지 않았다. 친구들이 내게 경전처럼 준 것은 예문판 <실마릴리온>과 <반지전쟁>이었다. <실마릴리온>은 맙소사, 진짜로 경전이었다! 나는 억지로 그것을 읽었지만 교과서를 대충 읽은 소년처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해야겠다. 그때 나는 아직 J.R.R 톨킨이 칼 마르크스임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반지전쟁>은 그래도 소설이었다. 그것에 대한 나의 독서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것과 같다.

‘반지원정대’를 읽는 데엔 3주일(혹은 석달)이 걸릴 것입니다... (왜 읽는지 모르는 단계)
‘두 개의 탑’을 읽는 데엔 사흘이 걸릴 것입니다... (그럭저럭 재미있다 생각하는 단계)
‘왕의 귀환’은 읽고 나면 세 시간이 지나있을 것입니다... (정신이 ‘미들어스’로 떠난 단계)

하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독서체험을 한 내가 책을 반납하려 했을 때, 친구들은 뒤에 붙어 있는 부록을 읽는 것이 핵심이라 하였다! 나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아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 부록에는 연표나 계보, 역사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것만으로도 사실 단행본 한 권 분량이었다(훗날 나온 ‘씨앗’판에선 아예 별도의 한 권으로 묶여 나왔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겠다고 손사레를 쳤다. 그렇게 나는 ‘톨킨교’의 세례만 받은 불완전한 신도로 남았다.

영화가 한국에서도 대흥행을 한 후 나는 불완전한 신도라는 사실을 감추고 아는 체를 하기 위해 본격적인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황금가지’판 <반지의 제왕>을 다시 읽었고 ‘씨앗을 뿌리는 사람’판 <반지의 제왕>을 또 읽었다. <톨킨백과사전>을 읽었으며 톨킨의 전기도 뒤졌다. 그러한 ‘탐구’가 어떠한 쓸모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겠으나, 그것이 내 인생의 한 시기를 구성한 것은 사실이다.

‘호빗’은 ‘반지의 제왕’과 달랐다?

사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한국 관객들에겐 갑자기 닥쳐온 무언가였다. 문화평론가 이택광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대해 서구 68세대의 추억의 재연이라고 설명했다. 톨킨 자신이 보수주의자였다는 것과 별개로, 톨킨은 (특히 영국에서) 68세대를 구성한 하위문화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운데땅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후일담이라는 성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관객들에게는 관계없는 얘기였다. 68혁명의 무풍지대였고 이전에 톨킨을 소비해본 적도 없는 한국인들에게 이 영화는 ‘헐리우드산 문화상품’이었고 이것이 소비되고 나서야 소설이 하나의 고전으로 제시되었다. 같은 상품이라도 다른 문맥으로 소비되는 것은 한 사회 내에선 주로 ‘세대’를 타고 나타나는 일인데, 이 경우엔 전지구적으로 팔린 문화상품에 대해 ‘사회’내지는 ‘문화권’이 다른 문맥을 구성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호빗>을 <반지의 제왕>과 구별해서 비판하는 몇몇 논리엔 크게 동의할 수 없다. 누군가는 <호빗>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영화였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반지의 제왕>도 굳이 그 시점에 나와야 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반지의 제왕>이 영화화된 이유가 ‘톨킨의 세계’를 더 그럴듯하게 구현할 기술의 발달과 팔리는 상품에 대한 자본의 요구 때문이었다면, <호빗>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호빗>에 나오는 사건이 소설들에 비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견해 역시 그렇다. 그렇게 치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건들 역시, 특히 “반지원정대”의 경우 헐리우드적으로 과장된 것들이 많다. 소설의 분위기는 영화처럼 암울하지 않았고, 전반부엔 더욱 그러했다. 가령 영화는 “샤이어, 배긴스”라는 두 글자만 듣고 나즈굴들이 흑기사차림으로 모르도르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리지만, 소설에서 사우론은 도대체 샤이어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 전전긍긍하다가 나즈굴들을 맨몸으로 몰래 (그들은 옷을 다 벗으면 보이지 않는다) 떠나보냈다. 허다한 액션씬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분량에 대한 얘기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지의 제왕>이 영화화될 때 상당부의 사건을 생략해야 했다면, <호빗>은 분량상 영화화될 때 그 사건들의 세부적인 내용을 채워넣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호빗>이 <반지의 제왕>과 무언가 다른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될 수 없다고 본다.

자기증식하는 문화상품으로서의 <호빗>은 <반지의 제왕>을 즐긴 관객층을 타겟으로 삼고 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우며, 비난할 일이 아니다. 실제 소설의 집필 순서로 보면 <호빗>이 <반지의 제왕>보다 먼저 쓰여졌지만, 피터 잭슨의 ‘가운데땅 이야기’로 본다면 <반지의 제왕>이 <호빗>보다 먼저다. <호빗 : 뜻밖의 여정>의 첫 부분이 프로도와 빌보의 대화로부터 60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영화만 본 관객들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끔 전작과 비슷한 상황에서 동일한 음악을 사용하는 등의 배려도 충분하다.

동화였던 ‘호빗’이 신화가 될 때

그런데도 피터 잭슨의 <호빗> 시리즈가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원작의 분량이나 집필순서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원작의 성격에 있을 것이다. <호빗>은 애초에 톨킨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동화’였다. 그리고 <실마릴리온>을 쓰던 톨킨이 얘기를 좀 더 재미있게 만들자는 출판자본의 요구와 타협하여 그 ‘동화 주인공’을 포섭해서 쓴 긴 이야기가 <반지의 제왕>이었다. 톨키니스트들은 종종 ‘톨킨 월드’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실마릴리온>에도 호빗의 기원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을 두고 갑론을박하는데, 이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톨킨이 아이들에게 ‘호빗’을 들려주던 당시에 이 종족을 <실마릴리온> 세계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반지의 제왕>은 일종의 타협의 산물이다. 그리고 나는 이 타협이야말로 <반지의 제왕>을 고전의 반열로 끌어올린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톨키니스트들의 선호와 상관없이 <반지의 제왕>이 다음 시대에도 남는 고전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이 이야기가 “동화 주인공이 겪은 신화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지의 제왕>의 매력은 ‘세계사적 사건’이라는 스케일을 가진 ‘서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왜소한 주인공’(존재감 뿐만이 아니라 크기도 왜소한!)이 극을 이끌어 간다는 데에 있다. 물론 프로도 등은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 갈 수는 없기에 얘기는 두 개로 갈라지고 나머지 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라곤이 된다. 하지만 “왕의 귀환”이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편에서도 두 이야기를 하나로 합치며 결국 호빗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톨킨의 의도다.

68세대들이 한 보수적 지식인의 문화적 창작물에 큰 매력을 느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때 영국에서는 ‘호빗’이란 이름을 가진 펍이 많았다고 한다. 톨킨 자신은 호빗의 모델이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에서 만난 영국 농부였다고 한다. 톨킨은 그들이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한다. 말하자면 호빗은 나약한 지식인의 입장에서 본 민중의 건강성을 담지하는 상징이다.

2차 세계대전과 ‘반지 전쟁’을 묶어서 이해하려는 시도에 톨킨이 명확하게 반대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현실의 전쟁에선 호빗과 같은 이들이 주인공이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존재하지 않았던 “동화 주인공이 겪은 신화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욱 매력적이고 희귀한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일 게다.

<반지의 제왕>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역으로 영화 <호빗>이 다소 어색한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다. <호빗>은 원래 “동화 주인공이 겪은 동화 이야기”인데 이것이 <반지의 제왕>의 속편이라는 문화상품으로 구현되려면 <반지의 제왕>과 마찬가지로 “동화 주인공이 겪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빗>은 애초에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호빗 : 뜻밖의 여정>은 이 간극을 3D 영상과 액션신을 통해 메우려고 한다. 물론 영상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놀라운 액션신을 통해 관객들은 다시 한번 ‘신화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가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에 피식하는 패턴이 존재한다. “중간 내용이 지루했다”는 일부의 평가는 그래서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향유 세대에 대한 전망

그렇지만 충분히 즐겼다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분명히 존재한다. 국내에서 다소 흥행이 부진했다 해도 <호빗>은 전지구적 문화상품이며 후속작이 수입이 안 될 리도 없다.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한국 관객에게도 다른 반응을 이끌어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영화 <호빗>이 <반지의 제왕> 관객을 노린 문화상품이라 해도 그것의 수용은 다른 반응을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완전히 참패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영화 <호빗>을 통해 피터 잭슨의 ‘가운데땅 이야기’나 ‘톨킨 월드’에 입문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영화 <호빗>에서 거슬러 올라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며 그것을 보며 <반지의 제왕> 개봉 직전 두근거렸던 나와 같은 이들은 세대차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수십 년 후에 그들과 내가 호빗을 볼 때,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추억을 환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서 언제나 있었던 일이었다.

정보 하나: 영화 <반지의 제왕>의 자막번역이 ‘황금가지’판 소설 번역과 가장 싱크로율이 높았다면, 영화 <호빗>의 자막번역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판 소설 번역자들의 자문을 받고 이루어졌다. 하지만 ‘씨앗’판이 수용한 톨킨 재단의 번역지침은 고유명사를 될 수 있는 대로 해당 언어의 고어로 번역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유럽언어 화자들에겐 ‘완벽한 번역지침’이 될 수 있을지언정 한국어 화자에겐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령 ‘리벤델’이 ‘깊은골’로 번역되어 혼란스러울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머크우드’가 아니라 ‘어둠숲’이라 표기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전작에서 너무 유명해진 고유명사는 손대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령 ‘빌보 배긴스’는 ‘씨앗’판에서는 ‘골목쟁이네 빌보씨’가 될 테지만 그대로 놔뒀다. 그러면서도 ‘배긴스’ 가문과 사이가 나쁜 친족인 ‘색빌배긴스’의 경우는 ‘자룻골골목쟁이’라고 옮겼다. 이 자막만 봐도 이 영화가 <반지의 제왕>의 후속편이라는 점과 함께 한국의 <반지의 제왕> 번역이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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