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서태지의 이름은 마치 혁명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서태지 하면 떠오르는 계몽과 저항, 투쟁이라는 노곤한 이미지와 달리 사실 내가 그의 팬이 되었던 계기를 떠올리면 결국 그가 귀여운 아이돌이라서였다. 동네 친구들과 연극을 보고 돌아오던 어느 저녁, 쇼윈도 안의 조그만 티비 화면에서 미끄러지듯 춤을 추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를 보고 내 심장은 그만,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속도로 터져나갈 듯 피치를 올려댔으니까.

매번 수많은 메시지를 들고 나와 한때 가요계의 이상향이 되곤 했던 그의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가사에 보낸 열광 또한 동그란 안경 아래의 순진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뽀얀 얼굴의 미청년이 붉은 깃발을 올려 투쟁하며 시대에 유감을 표하는 드라마틱한 이미지가 떠올라 더 설렜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일제강점기 시대의 의로운 청년 지식인 같았던 것이다. (실제로 교실이데아가 실려 있는 3집의 콘서트 영상 속의 까만 학생복을 입은 단상 위의 서태지는 마치 레미제라블의 미청년 앙졸라스럽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데 왜 똑같은 길만을 강요하려 하는가'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나도 참!)

명목상 은퇴 앨범이 되어버린 4집에 이르기까지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매한 베스트 앨범에 실린 굿바이로 정확한 이별의 메시지를 고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태지에게서 받은 대중의 인상은 투쟁과 저항이었다. 매번 들고 나오는 그의 메시지는 무수한 논란을 일으켰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메시지를 들고 나올까 대중을 들뜨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아마 서태지의 어깨 위에 놓인 짐 더미의 일부분은 내가 만들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 어쩐지 숙연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은 그들이 발표한 수많은 메시지들 가운데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호전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대한민국의 교육 제도를 향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니. 이만큼 직설적이면서도 절실한 외침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태지보이스의 근간은 어디까지나 '아이돌'이다. 만약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이 온통 싸움의 역사로만 뒤덮여있었다면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이도 적지 않았으리라. 그는 고맙게도 정말 깜찍한 아이돌 같았던 1집에서부터 온갖 메시지로 투영된 3집에 이르기까지 빠지지 않고 꾸준히 팬 러브송을 실어왔다. 사랑을 주제로 담은 노래라지만 기존의 가수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사랑가와는 그 색을 달리했다. 어디까지나 그냥 러브송이 아닌 팬 러브송. (같은 3집에 실린 '널 지우려 해'만큼은 그저 러브송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신기하게도 이 노래의 작사가는 서태지가 아닌 양현석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수많은 팬 러브송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애틋한 연심을 담아낸 곡이 바로 태지보이스의 3집 '영원'이다. 그 어떤 앨범보다 직설적이고 호전적인 투쟁의 메시지로 무장된 태지보이스의 3집은 멜로디 또한 모든 곡을 락+메탈 사운드로 편곡하여 그 강렬한 메시지들의 아우성에 잠시 넋이 빠질 때도 있는데, 이 지친 마음에 유일한 위로와 안식이 되는 음악이 바로 '영원'이었다. 물론 락 사운드에서 해방된 음원으로는 또 다른 발라드 '아이들의 눈으로'도 있지만 이 노래도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는 곡이기에 온전한 의미의 휴식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휴식 같은 노래라고 해서 서태지의 실험 정신이 이 노래에 스며들어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영원은 가장 고요하면서 또한 가장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발라드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가요와 오케스트라를 접목시킨 시도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무려 94년도에 발매된 이 음반에서 쌩 발라드에 오케스트라를 접목시킨 시도는 무척이나 신선하고 각별한 것이었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콘서트에서 구성한 영원의 무대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오데뜨가 떠오르기도 하고 디즈니 음악을 듣는 듯한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한번 꽂히면 백번은 기본으로 챙기는 필자에게 그야말로 첫 귀에 반해버린 이 노래 '영원'은 그야말로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리플레이하는 음악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의 집에서 듣게 된 신해철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이 노래에 대한 내 마음을 더욱 각별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매일 밤 신해철이 진행하는 라디오를 듣던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전람회의 코너를 즐겨 들었다. 거의 싱글로 구성되는 요즘의 음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취이지만 이 당시에는 가수가 앨범을 냈다 하면 타이틀곡 이외의 공을 들인 음악들을 1번부터 마지막까지 살뜰하게 배치하는 것이 당연한 수고였다. 이 코너에서 전람회는 비록 타이틀곡은 아니지만 숨겨진 명곡을 청취자에게 소개하는 구성으로 마이너를 애착하는 나에게 큰 호감을 샀는데, 하필 이날 소개했던 음악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원'이었을 줄이야! 신해철과 전람회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필자가 좋아하는 트리플이 모두 모인데다가 하필 태지보이스의 3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원'을 소개받는다는 것은 크리스마스와 생일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 같은 기쁨이었다.

"여태껏 소위 발라드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발라드라면 역시 우리가 잘하지!'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원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많은 발라드인들이 쇼크를 받았던 곡. '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하고 굉장한 감동과 물결을 일으켰던 바로 그 곡입니다."

김동률은 무엇보다 이 노래의 사운드를 극찬했다. 당시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파격이었을 관현악을 베이스로 발라드를 구성한다는 것이. 그리고 무엇보다 발라드 전문 가수도 아닌 댄스 가수 서태지에게 나온다는 것은 무척이나 이색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3집은 온갖 락 사운드로 무장된 소위 시끄러운 음악들이 아니었던가. 그는 이 음악을 처음 들었던 감상을 '쇼크'였다고 표현했는데,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의 위상이 당시 대단한 것이긴 했어도 또한 경외시되는 존재이기도 했기에 그를 인정한다는 것이 음악가들에게 소위 자존심이 상하는 풍토인 일면도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김동률 정도의 음악가가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하게 그의 음악을 찬양한다는 사실은 내게 꽤나 벅찬 설렘이었다. 더욱이 '발라드' 전문 가수인 김동률이 댄스 가수 서태지의 발라드를 그들의 콧대를 무너뜨렸다는 의미로 표현하면서까지 극찬할 수 있다는 것은 서태지와 김동률 양측의 가수 모두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김동률은 특히 2악장 (2절이겠지만 이 노래에서만큼은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으로 흐르기 전에 나오는 왈츠풍 간주의 신선함을 극찬했는데 노래를 전체적으로 듣지 않고 이 부분의 멜로디만 들어도 서태지라는 인물이 장르에 대한 몰이해나 편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사운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신선한 사운드들은 물론 서태지라는 인물의 뛰어난 창의성이나 흡입력을 베이스로 하는 것이겠지만 결국에는 장르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밑바탕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기획이었던 것이다.

순수하고 애틋한 멜로디만큼이나 영원의 가사 또한 사랑스럽고 서글프기 짝이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세상에 남아있는 연인을 향해 바치는 러브송인 만큼 서태지표 발라드 중 가장 슬픈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도 나의 무덤 앞에서 그냥 그렇게 앉아 있네요. 내 생전에 쓰던 일기장을 꼭 쥐고 앉아서." 은퇴 발표를 담은 4집이 발표되기 이전의 음반 3집에서부터 그는 아마 '은퇴'를 예감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이 곡을 통해서 생각해보게 되는데, 이 노래에 담은 서글픈 메시지가 결국 그가 떠난 다음 팬의 마음을 투영해보는 시점을 담은 가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미 가요계를 떠나버린 서태지와 그럼에도 그를 잊지 않은 팬의 마음을 '영원'이라는 메시지로 담아낸 것을 떠올리면 그가 태지보이스의 마지막 이름으로 발매한 음반의 슬로건인 "END가 아닌 AND로" 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서태지는 그리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이 발매한 음악에서 그와 어울리는 목소리를 낼 줄은 아는 가수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그의 소프트한 목소리가 빛나는 순간은 아무래도 이런 영원과 같은 서태지표 발라드를 들을 때이다. 다른 노래는 몰라도 적어도 이 노래만큼은 서태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이만큼의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참으로 조근조근하고 사무치는 음성을 들려주신다.

거친 사운드와 빡빡한 메시지 속에 숨겨진 하나의 휴식과 같은 곡 영원. 그것은 팬 사랑이 남달랐던 서태지의 은퇴 직전의 사무치는 메시지였다. 이 잔잔하고 평온한 발라드마저도 발라드 전문 가수를 깜짝 놀라게 하는 힘이 깃들여져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이 곡을 추천했던 김동률의 마지막 메시지가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음악을 우리나라 가사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은 그런 곡이라고.

드라마와 예능 연예계 핫이슈 모든 문화에 대한 어설픈 리뷰 http://doctorcall.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