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지금 내가 보여요?”

 

<박수건달>은 바다 비린내 물씬한 뒷골목과 작두를 탄 굿판을 오가는 하이브리드(?) 코미디다. 조직 폭력배에서 하루아침에 신기를 점지 받은 무당이 된 건달의 좌충우돌 드라마. 조직의 중간보스 광호(박신양)은 임무를 놓고 다투던 같은 조직의 태주(김정태)가 찌른 칼을 손으로 받아낸다. 그 흉터로 손금이 바뀌면서 운명의 궤도 역시 노선을 변경해버리는 것. 멀쩡한 대낮에 헛것을 보고, 외진 골목에 버려진 신문지가 혼자서 달려드는 흉조에 시달리다 자신이 신 들렸다는 사태를 깨닫는다. 우여곡절 끝에 결심한 신내림 굿. 광호는 건달과 무당, 투 잡(?)에 뛰어든다. 영화는 이 와중에 발생하는 해프닝을 에너지 삼아 웃음과 드라마를 구동한다. 단적인 예. 무당이 된 광호에게만 보이는 귀신들이 추격전을 벌이듯 하소연하며 매달린다. 돌연사한 조직의 보스가 박수건달 광호를 찾아가 놀라며 내뱉는 말. “니 지금 내가 보이나?”

관객이 배꼽을 파지하게 만들려는 <박수건달>의 전략은 Before-After의 착각과 오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였다는 공식. 영화는 (…)의 자리에 크게 두 가지 배타적인 정체성을 대입한다. 건달인 줄 알았는데 무당이었다는 영화 <친구>의 오컬트 버전.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귀신이더라는 <사랑과 영혼>의 부산 갈매기 버전. 우선 하나의 대전제, 당연하게도 광호에게 무당이라는 새로운 직업은 감추고 싶은 고역이다. 왜? 영화 <친구>의 대사를 변주한 대답. “건달이 쪽 팔리모 안 된다 아이가. 니가 타라 개 작두”

영화는 광호-조직, 귀신-광호-등장인물 사이 인식의 비대칭을 서사의 양 축으로 삼아 일종의 정체성의 게임을 진행한다. 광호-조직 사이의 게임은 두 개의 층위로 구성돼, 광호의 이중생활을 두고 착각과 오인의 숨바꼭질을 전개한다. 먼저 첫 번째 층위. 자신이 무당이란 사실을 숨기려는 광호.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조직.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 채고 폭로하려는 태주. 게임은 세 갈래의 인지와 무지를 톱니바퀴삼아 작동한다. 관객은 그 상위의 층위에서 때로는 오인과 불일치를 관람하거나, 때로는 오인하는 무지의 자리에 비스듬히 어깨가 기운 채 참여한다. ‘박수무당’ 광호가 인터뷰한 티비 프로를 조직의 보스가 보지 못하도록 ‘건달’ 광호가 야단법석을 떠는 소동, 풍어제에서 작두 탈 무당을 구하러 ‘무당’ 광호를 찾아 온 부하들이 ‘건달’ 광호를 알아보지 못하고 을러대는 촌극은 전자에 해당한다. 태주가 풍어제에서 광호가 쓴 탈을 의기양양하게 벗기며 정체를 폭로하는 장면은 후자다. 실은 광호가 이미 부하와 역할을 바꿔치기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관객은 태주와 마찬가지로 뒤늦게 전모를 깨닫고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나머지, 귀신-광호-주변인의 게임은 세 단계의 층위로 설계돼있다. 먼저 광호와 귀신은 서로를 알아보고 소통할 수 있다. 혹은 귀신은 광호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인식의 성립에 놀라며 되묻는다. 인식의 대칭이 성사되는 첫 번째 층위. 하지만 여타 등장인물은 귀신을 볼 수가 없다. 인식이 만나지 않는 두 번째 층위. 영화는 귀신-광호-등장인물이 함께 있는 신에서, 귀신이 화면에 등장하는 첫 번째 층위의 숏과 귀신이 등장하지 않는 두 번째 층위의 숏을 번갈아 보여주며 골계미를 연출한다. 이 인지와 무지를 종합하는 관객의 인식까지 합산한 것이 세 번째 층위다. 예컨대, 태주가 황검사에게 로비를 시도한 포장마차 신에서 처녀귀신은 화면 한 구석에 계속 배석해있다. 관객은 그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녀가 태주에게 건네는 나중의 대사에 이르러 명확해지는 것이다. “혹시 지금 내가 보여요?”

역시 영화엔 뇌사 상태에 빠진 미숙(정혜영)의 딸, 꼬마 귀신 수민이 등장한다. 수민이 태주를 이끌고 미숙을 찾아갔을 때, 관객과 태주는 수민의 존재를 알지만 미숙은 자신의 딸이 거기 있다는 걸 모른다. 수민이 더듬거리는 태주를 탓하며 엉덩이를 때릴 때, 영화는 수민을 화면에 넣었다 뺀다. 바닥을 보며 혼잣말 하고, 혼자서 엉덩이를 움싹거리는 추태를 보며 미숙은 황당해하고 관객은 웃는다. 첫 번째 층위와 두 번째 층위가 어긋난 채 맞물리는 인식의 비대칭성, 그 선명한 부각이 웃음의 전략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런 오인과 착각의 전략은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태주가 황검사를 찾아가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은 비중이 높은 편이다. 컴컴한 취조실 안, 광호에게 빙의한 처녀귀신이 연애사를 회고하며 생전의 연인 황검사를 놀라게 한다. 어느새 화면의 광호는 처녀귀신역의 여배우로 바뀌어 있다. 둘은 오열을 거듭하다 격렬하게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하지만 두 남녀가 프레임 밖으로 이탈했다 재진입할 때는 황검사와 뒤엉킨 사람이 다시 광호로 뒤바뀌어 영화 내 가장 코믹한 순간을 자아낸다. 영화는 이 호모섹슈얼(?)한 러브신을 비축해두었다 보스의 생일축하연 장면에서 재활용한다. 광호의 경쟁자 태주가 취조실 cctv영상을 확보해 - 대체 어떻게 입수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 만인 앞에 공개해버리는 것이다. 험상궂은 두 남자가 끈적하게 나뒹구는 모습을 보며 삽시간에 분위기가 묘연해진다. 좌중은 광호의 성性정체성을 오인하고, 관객은 추이에 귀추를 모으는 순간, 보스가 다시 한 번 뜻밖의 방식으로 이 상황을 오인한다. 적장을 끌어안고 몸을 날린 논개라며 광호의 의기(?)를 드높이 치하하는 것이다. “이 영상이 있는 한 황검사는 우리 손아귀에 있다!”

 

하지만 일련의 전략이 그리 정교하게 설계돼있다 평가할 수는 없다. 영화의 전략은 두 가지 차원에서 논리적 파탄과 작위성, 논점 일탈에 봉착한다. 첫 번째 문제, 조직과 광호의 숨바꼭질, 귀신들과 광호 사이 상호 인지에 기반한 소극. 영화를 지탱하는 이 두 갈래 서사가 합류하며, 영화의 핵심인 정체성의 게임에 연산오류가 발생하기 때문.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듯, 광호는 자의로서 무당이 된 인물이 아니다. 때문에 항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노심초사해야 하는 게 게임의 규칙. 하지만 영화 중반 처녀귀신이 등장하면서 광호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기 시작한다. 굳이 귀신과 커다란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아 혼자 이인분의 음료를 주문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목을 무시한 채 아무도 없는 맞은편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건 더더욱 이상한 일이다. 처녀귀신과 황검사실을 찾아가서도, 광호는 자신이 귀신 들린 영매라며 소문이라도 내듯 조심성 없이 행동한다. 부하건달이 운전하는 차안에서 자신을 쫓아 온 귀신들에게 부대낀 채 대거리하는 것도 순간의 웃음을 위해 회수를 포기한 설정에 가깝다. 이런 무신경한 처신에도 불구, 광호의 정체가 엉뚱하게 꼬리를 밟히는 것도 선선히 동의하기 힘들다.(광호의 신당에 점을 보러온 태주의 부하는 명보살이 부르는 ‘광호’란 이름을 스치듯 듣는 것만으로 낌새를 눈치 채고 비밀을 확인한다) 영화는 광호에게 한편으론 자신의 정체를 비밀에 부치라 지시하며 한편으론 내키는 대로 해도 좋다는 이중지령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결국엔 그 두 가지 모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게임을 종료하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보다 중요하다. 광호의 정체가 탄로 나는 풍어제와 함께, 건달-무당의 정체성의 게임이 마감된다. 영화는 오인의 전략을 소리 없는 눈덩이처럼 굴려 감동의 반전을 기획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서사의 분열과 논점의 일탈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일련의 플래시백에 주의를 둬야 한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 태주 패거리에게 린치당해 쓰러진 광호를 잡은 숏의 꼬리에 묘한 플래시백이 접착돼 있다. 영화의 도입부, 광호의 등 뒤에서 태주가 칼을 찌를 때, 실은 수민이 소리를 지르며 막아내도록 도왔었다는 것이다. 수민은 “우리 아재”한테 그러지 말라며 고함을 지른다. 헌데 광호가 수민과 면식을 튼 건 태주의 칼에 맞아 운명선이 바뀌고 난 후였다. 그 상황에서 수민이 그 장소에 있을 이유가 없을 뿐 더러 - 둘은 그때 전혀 모르는 사이였으니까 - 태주를 “우리 아재”라고 부를 아무런 연결고리가 정해지지 않은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이 플래시백은 기본적인 순차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관객을 움직이려 든 서사 전략의 불안한 파편이다.

 

영화는 플래시백 등에 이어 최루탄을 던지며 한 방을 준비한다. 임종하던 수민의 병실에서, 처음엔 미숙과 수민, 다음엔 미숙과 광호의 부둥킨 오열을 보여주며 귀신-사람의 오인의 전략을 변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 역시 무리한 비약과 근거의 미비에 봉착해있다. 미숙은 이전의 장면에서 광호가 증거삼은 수민의 어릴 적 사연들엔 코웃음 쳤었다. 헌데 유독 엔딩이 되어서야 수민의 입버릇이 광호의 입에서 나왔단 이유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민의 임종신은 광호-수민-미숙의 관계망으로 연결돼 있다. 하지만 수민의 죽음으로 직접 연결돼는 광호와 미숙의 관계는 러닝타임 내내 방기됐었다. 수민-미숙에 대한 설명도 밀도가 부족하다는 점 역시 이 장면의 정서와 내포의 한계를 드러낸다. 영화는 광호와 수민에 얽힌 또 다른 플래시백을 상연하며, 활짝 웃는 수민의 얼굴에 이어 막을 내린다. 이 플래시백은 결과적으로 영화의 무게중심을 광호에서 수민으로 옮겨놓으며 종료하는 효과를 담지한다. 수민의 임종신에서 과잉 연출된 시각 효과와 역시 이전의 플래시백과 마찬가지 이유로 석연찮은 엔딩엔 작위성이 배어있다. 종반, 두 번의 플래시백을 통해 제시된 광호-수민의 지반이 원인 없는 소급에 가깝기에 결국 이 휴머니즘의 구체는 비어있는 물음표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정체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인식의 비대칭을 둔덕 삼아 오인의 전략을 밀어붙였다. 아직 수민을 볼 수 없어 덮쳐오는 신문지를 황망히 피해 다니는 영화 초반의 광호. 그런 광호에게 신문지를 던지며 장난을 건네는 수민이 현현한 영화의 마지막. 영화는 간격이 아주 넓은 Before-After로 두 장면을 묶으며 마치 광호에게 던진 귀신들의 물음처럼 관객에게 조바심을 확인하려 든다. 이 영화에 담긴 웃음과 감동이 혹시 “보이시나요?”

글쎄... 무당이냐 건달이냐. 아니, 웃음이냐 감동이냐. 둘 중 하나만 했더라면 좋았을지도.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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