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패(愼言牌)'가 생각나는 시대이다. 연산군은 자신 앞에서 '입방아'를 찧지 말라는 경고문을 신하들의 목에 걸게 했는데, 이름하야 신언패였다. 이를 어긴 신하들은 사지가 찢기고 혀가 잘리는 형벌을 받곤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의 모습이 사관(史官)의 '기록'을 통해 빚어졌던 걸 생각하면 신언패는 입과 글을 마비시킨 언론탄압, 아니 지독한 '언론봉쇄'였다.

현재 MBC를 보면, 신언패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느낀다. 15일 이상호 MBC 기자가 해고되면서 김재철 MBC 사장 취임 이후 무려 11명의 해직자(이중 이근행 전 MBC노조위원장과 정대균 수석부위원장은 지난해 말 특별채용)가 발생했다. 이 뿐인가? 파업에 참여했던 MBC구성원들은 교육을 받고 있고 <미디어스>와 인터뷰했던 기자는 정직 3개월 징계를 받았다. 바른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대, MBC 구성원들은 입방아를 찧을 수 없는 시대. 하지만 이러한 '엄동설한'에도 MBC를 되살리려는 기자들의 노력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 김효엽 MBC 신임 기자회장 ⓒ미디어스

<미디어스>는 16일 서울 여의도 MBC 옆 카페에서 김효엽 신임 MBC 기자회장을 만났다. 김 기자회장은 <미디어스>와 인터뷰 이후 정직 3개월을 받은 기자들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는 "예전에도 회사 입장과 정반대 이야기를 하거나 회사가 생각하기에 명예를 실추한 기자들에 '태클'이 들어온 적은 있었다"면서도 "지금은 태클 수준이 아니라 해고나 중징계가 내려진다. 외려 정직이 가벼운 수준의 벌이 됐을 정도"라며 현재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인력 구조 정상화가 MBC 정상화의 시작"

MBC 기자회는 230여명의 기자들이 가입돼 있다. 회사가 인정하는 공식 기구가 아닌 임의 단체이지만, 김 기자회장은 MBC기자 162명이 투표해 160표를 얻어 당선됐을 정도로 내부 구성원들에게 큰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MBC 기자회에 대해 그는 "우선적으로 기자들의 복지와 목소리를 대변하는 기구"라며 "6-7년 전부터 직선제로 바뀌었다. 특히 작년에는 박성호 MBC 기자회장이 해고되는 아픔을 겪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박성호 MBC 전 기자회장은 지난해 170일 파업기간 제작거부를 주도했고, 사측은 '보도국 농성과 권재홍 보도본부장의 퇴근길 항의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방적 해고를 통보했다.

김 기자회장은 1996년 입사해 사회부와 정치부, 국제부를 두루 거치며 현재는 시사매거진 2580 취재 데스크를 맡고 있다. 김 기자회장은 '170일 파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해외 연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회장을 맡게 된 연유에 대해 "9월에 돌아왔다. 물론 통화하며 MBC 상황을 대강 알고 있었다"며 "마음의 빚도 있는데다 박성호 전 기자회장이 해고된 상황에서 누군가는 맡아서 해나가야 할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무엇보다 내세웠던 공약은 '인력 구조 정상화'였다. 기자 30여명이 업무와 상관없는 교육을 받는 상황이고, 최일구‧김세용 앵커와 양동암 카메라기자회장, 김재영‧이춘근 PD 등은 17일자로 교육발령이 끝났지만 3개월 연장됐다. 저널리즘 활동을 해야 하는 이들이 브런치 조리법을 배우거나 클래식 청취만 하고 있는 촌극이 펼쳐지고 있다. 김 기자회장은 "뉴스를 만들어 내는 보도의 조직과 뉴스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라며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첫 번째 단추는 현업에서 배제돼 쫓겨나 있는 분들을 복귀시키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아직까지는 추상적인 구상만 하고 있지만, 해고자들의 복직문제도 노조와 발맞춰 해결 방법을 모색할 것"이며 "MBC 뉴스에 대한 감시는 언제나 늘 해오던 것이었다. 이는 MBC노조의 민실위와 함께 머리를 맞댈 것이다"라고 밝혔다.

MBC는 파업의 공백을 대체 인력으로 메우고자 했다. 하지만 대체 인력들은 저널리즘에 기반한 보도를 하기보다 사장과 데스크의 입에 맞는 기사로 지난 대선에 물의를 빚었다. '신경민 막말'·'정동영 노인 폄하' 등 MBC <뉴스데스크>가 보도한 내용들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권고 조치를 받는 '굴욕'을 겪었다. 김 기자회장은 "기존 기자들과 대체 인력 사이에 교류가 없다.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상황"이라며 "많은 걸 포기하고 파업에 참여한 이들이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한 가치를 위해 나온 판국에 대체 인력들은 자리를 꿰찼다"고 설명했다. 김 기자회장은 "정치부의 대부분이 대체인력"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쫓겨난 이들의 복귀 차일피일 미뤄져"

김 기자회장은 MBC 경영진에 대한 비판과 '경쟁력'을 강조하면서도 인력 정상화엔 무관심한 김재철 사장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았다. 김 기자회장은 "내부에서 경영진 몇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항상 '나갔던 사람들은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며 "하지만 그게 벌써 해가 지났고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신천에서 교육하고 있는 사람들도 더 가르칠 게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 기자회장은 다소 높은 목소리로 "나가 있는 사람들이 과연 (MBC경영진이 말하는 것처럼) 좌파이고,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가" "20년차 기자도 나가 있는데, 그들이 위험한 사람들이었다면 진작 MBC에 무슨 일이 터졌을 것"이라며 갈등을 '이념 싸움'으로만 몰아가는 경영진을 꼬집었다.

'기자는 존심으로 살아간다'는 허세 섞인 속설이 언론계에 존재한다. 그만큼 기자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기사를 써야 하고, 그래야만 정치‧자본 권력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다는 나름의 강박일 터. 김재철 사장이 현직 기자들에게 현대판 '신언패'와 다를 바 없는 재갈을 물린 상황에서 내부 기자들의 의욕을 어떨까? 이에 대해 김 기자회장은 "일을 다 하고 있지만, 동기부여가 되질 않는 상황이며 사람들이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기자들이 외부 취재를 꺼려한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대다수의 기자들이 최소한의 수준, 즉 욕을 먹지 않는 수준으로만 기사를 작성한다. 피곤함과 귀찮음을 무릅쓰고 한 군데 더 가보고 한 군데 더 물어보면서 좋은 기사와 보도가 나오는 것 인데 현재는 그러한 열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 같다"며 혀를 찼다.

MBC는 현재 경력직 기자를 채용 중에 있다. 이용마 MBC노조 홍보국장은 이에 대해 "김재철 사장의 편 가르기가 시작됐다. 8 대 2로 나뉜 상황에서 본인 쪽 사람을 채우기 위해 무모한 채용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김 기자회장은 "외견상으로는 논리적으로 하자는 없다"면서도 "어떤 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선발될지 확인이 필요하다. 지금 상황에서 사람 충원만 한다고 좋아할 수는 없다. 경영진과 신뢰가 깨진 상태, 그리고 과거 대체 인력을 선발했던 사례들을 돌이켜 보면 노조의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건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그는 "만약 모 언론사처럼 면접할 때 노조가입 여부를 물어본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과거 KBS신입사원 채용 때 논란이 됐던 '사상검증 문제'를 꼬집었다.

"최근 입사한 기자들이 상승하는 MBC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게 마음 아파"

예비 언론인들에게 MBC는 꿈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조차 MBC 현 상태에 등을 돌리고 독설을 퍼붓고 있다. 그들의 반응으로 추락한 MBC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김 기자회장은 "예비 언론인들이 느끼는 감정,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그들이 느끼는 바대로 현재 MBC는 본연의 '자율'과 '창의'가 사라졌다"며 "서로에게 신뢰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큰 일이 벌어지면 모든 기자가 다 달려 붙었다. 오죽했으면 우스갯소리로 서로에게 'MBC사람들은 다 사장'이라고 말하고 다녔겠나. 그만큼 다들 애착이 많다"고 설명했다.

김 기자회장은 "최근의 MBC는 그 강점만 골라서 다 부서졌다. 연료가 돼 동력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자꾸만 땔감으로 소진돼 사라지는 느낌"이라며 "특히 최근에 들어온 친구들은 MBC가 상승하는 기운을 느껴본 경험이 없다. 그게 안타깝고 참으로 미안하며 기자회장으로서 이 부분을 뼈아프게 반성하고 성찰할 것"이라고 말했다.

50분이 넘어가는 인터뷰 시간 동안 김 기자회장은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로 MBC를 논(論)했다. MBC 기자로서가 아닌 언론사의 기자회장으로서 그는 "타 언론의 기자협회와도 머리를 맞대 저널리즘 회복을 강구할 것"이라는 추상적이지만 확고한 계획도 세웠다. 마지막으로 MB정권 들어 한국의 저널리즘이 망가진 것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방송을 수돗물에 비유하곤 한다. 수돗물은 공공재이다. 내가 단맛을 좋아한다고 설탕을, 짠맛을 좋아한다고 소금을 쳐서 내보낼 수는 없다. 공영방송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시청자들에게 판단의 준거를 정확히 제공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송 아니겠나? 공영방송은 여러 목소리와 시각을 담아서 가장 정갈한 형태로 전달해야 하고 그걸 보고 시청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보도해야 한다. 특히 KBS‧MBC와 같은 방송은 정권에 따라서 이리저리 휘둘리면 안 된다. 진보 정권 때도 그런 현상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좌우 정권의 지배력을 다 끊어내는 경험을 통해 한 차원 상승했어야 했다. 늦었지만 그런 역할을 MBC 기자회장으로서 하는 것이 최종적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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