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병역거부 선언을 하고 활동할 때 사람들이 이렇다는 걸 느꼈다.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내 말과 행동을 보고 겁쟁이와 매국노라고 하고,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반대로 나를 신념의 강자나 용기 있는 투사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이들은 모두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나를 봤다.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 닿지 못했다. 나는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에 둘러싸여 외로움을 느꼈다.

헌데 나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사람을 대할 때도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게 된다. 책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나는 책을 고를 때, 책 저자가 누군지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꼭 알아보고 고른다. 그렇기 때문에 허탕을 칠 가능성은 낮지만, 혼자서 오해를 하고 책을 고를 때도 있다.

<꽃피는 용산>이 바로 그랬다. 이 책을 보면서 읽고 싶었던 내용이 분명히 있었다. 용산참사로 구속된 철거민이 감옥 안에서 딸한테 보낸 만화 편지를 엮은 책이라니,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기대를 했을 것이다. 철거민 수감자 아빠가 어린 딸에게 만화로 설명하는 강제철거의 부당성과 망루에 올라가고 감옥에 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 이런 내용 말이다. 철거민들 이야기를 다룬 책이 여러 권 나와 있지만, 철거민이 직접 자기의 경험을 쓰고 강제철거가 왜 부당한지 주장하는 책은 없었으니까. 어떤 사람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감옥 안에서 딸에게 쓴 네루의 <세계사 편력>까지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서평도 어떻게 써야할지 나름 생각해 놨었다. <내가 살던 용산>에서부터 <꽃피는 용산>까지 용산참사 이후 르포만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까닭을 언론의 역할과 연결시켜서 쓸 생각이었다.

이 책은 이런 우리 기대를 완전히 배신한다. 책에는 철거민들이 얼마나 큰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가는지, 재개발 정책이 무엇이 문제인지 같은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용산 재개발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용산 참사 당시 상황도 나오지 않는다. 감옥 안 풍경이 드문드문 나오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김재호 님 얼굴이 나오기 위해서 나오는 배경일 뿐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서준식 옥중서한>처럼 감옥 안 일상과 그 안에서 한 생각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350쪽이 넘는 두꺼운 만화책은 온통 딸 혜연이와 아내 심연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다. 딸이 어렸을 때 함께한 추억들, 바깥에 있는 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 아빠 노릇 남편 노릇 못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주된 내용이다. 아마도 이 편지들을 처음부터 책으로 내기로 기획을 하고 썼다면, 편집자가 달라붙어 함께 구성을 짰다면 이런 내용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야기를 썼겠지. 그야말로 철거민이 직접 쓴 강제철거의 실상과 용산참사의 진실에 대한 책이 나왔을 거다. 하지만 그건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 보내는 편지다. 그 책이 나왔어도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그건 순전히 독자로서 이기적인 욕심이다. 김재호 님은 자기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화편지를 쓴 것이 아니다.

어쩌면 김재호 님도 병역거부를 했던 시절 나처럼 외로웠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한 쪽에서는 도심테러리스트로 부르고 또 한 쪽에서는 돌아가신 분들은 열사가 되고, 살아 구속된 분들은 투사가 되는 분위기였으니까. 그저 할 수 있는 게 망루 짓고 올라가는 일이었을 뿐인데, 어느덧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투사가 되거나 테러리스트가 되어 버렸던 거다. 도심테러리스트와 용산 철거민이라는 낯선 이름 사이에서, 김재호 님은 무척이나 외로워서 원래 자기가 있고 싶었던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을 거 같다. 자상한 남편이자, 친구같은 아빠. 자기가 꿈꾸던 단란한 가정의 가장 자리 말이다. 이 만화 편지는 아주 평범한 소시민이 어쩌다 철거민이 되고 수감자가 되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쓴 것이다.

▲ 지난 16일 열린 용산 참사 4주기 추모콘서트 '꽃피는 용산'에 참석한 김재호 씨와 사회를 진행한 방송인 김미화 씨 ⓒ 뉴스1

실제로 만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김재호 님의 모습은 빈민운동을 하는 활동가 모습이 아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도로로 화염병을 던져대며 동료와 경찰관까지 죽음으로 몰아가는 폭도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세상에 남겨진 딸한테, 살찌니까 라면 많이 먹지 마라, 엄마한테 짜증내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으라, 자기 전에는 꼭 이를 닦아라 같은 애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빠일 뿐이다. 딸아이가 혼자 다니는 것을 걱정하면서 CCTV가 많이 설치되기를 바라는 모습이나, 경쟁에 뒤처지면 안 된다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모습은 인권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나 스스로 진보주의자라 여기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 가족에 대해 책임감 넘치는 가장, 자상하고 친구 같은 아빠, 주어진 일에 만족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소시민. 만화책에 나오는 김재호 님은 어쩌면 많은 부분에서 보수적이기도 한,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이 되기엔 스펙타클한 재미가 없는 아주 평범한 이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가치와 이 책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재호 님은 강제철거의 부당성을 주장하거나 철거민들의 생존권에 대해 전혀 이야기 않는다. 그저 수감자가 되어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고, 빨리 예전 모습으로 딸과 아내와 도란도란하게 살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아주 소박한 욕심만 이야기하고 있다. 김재호 님의 아주 소박한 욕심이 역설적으로 강제철거가 무엇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평범하고 단란했던 한 가족의 일상이 무참히 파괴된 것은 강제철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아빠와 딸의 행복한 나날이 파괴됐다. 김재호, 김혜연, 심연 이 세 사람의 일상을 강제철거가 산산조각 내었다. 돈벌이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는 집이 시멘트 덩어리가 아니라 돈으로 보인다. 투기의 대상으로 보일 거다. 포클레인이 한 번 움직여 벽 하나를 부술 때마다 그 소음이 돈 굴러들어오는 소리로 들릴 거다. 살던 집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에게도 집은 단순한 시멘트 덩어리가 아니다. 포클레인이 방 하나를 부술 때마다, 그 방 곳곳에 녹아있는 세월들과 추억들, 한 가족의 역사가 함께 부서진다. 행복하고 단란한, 큰 욕심 없는 소시민들의 삶이 부서지는 거다.

세상을 위해 온갖 고난을 겪기로 각오한 혁명가도 아니고, 큰 뜻을 품고 그걸 이루기 위해 고생길도 마다않는 야심가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이 사회가 과연 유지 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설회사가 돈 벌겠다는 게 무슨 큰 죄는 아니겠지만, 이런 사람들의 일상조차도 망가뜨려야만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은 이 사회 전체를 망가뜨리는 일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질문을 했다.

이런 사람들이 망루에 오르고, 감옥에 가야 하는 세상이 계속 지속될 리 없다. 참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거나, 그렇지 못하면 결국 붕괴되고 말거다. 더 이상 벗겨먹을 평범한 사람들이 남지 않게 될 테니까. 세상이 바뀌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될 거다. 붕괴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다치거나 비참하게 죽게 될 거다. 이 책은 그런 지경까지 이르지 말아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문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진보니, 혁명이니, 사회 붕괴니 이런 말 하나도 안 쓰여 있지만, 이 미쳐가는 세상이 파괴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으로써,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이 경고를 무시한다면, 언제든 망루에 오르는 사람들이 생기고 불타는 망루 안에서 또 다시 사람이 죽어 나가는 비극이 일어날 거다. 우리는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PS <꽃피는 용산> 출간기념 북콘서트에서 본 김재호 님 얼굴은 밝아보였다. 하지만 딸 혜연이는 아직 아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병역거부자 친구들이 떠올랐다. 김재호 님과 비교하면 아주 짧은 1년 2개월을 살았고, 그나마도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감옥에 갈 것을 알고 준비도 하고 가지만, 출소 한 뒤 많이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체철거가, 그리고 3년 9개월의 수감 생활이 김재호 님과 가족들 마음에 많은 상처를 냈을 텐데, 그 상처들이 잘 아물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직 감옥에 갇혀 있는 다른 철거민들도 하루 빨리 감옥 밖으로 나오고 아버지와 다른 철거민들과 경찰을 죽였다는 누명을 벗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저 돈이나 벌 생각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경영진들의 폭력을 보고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주의자의 시선으로, 노동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모든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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