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자 조선일보 32면에 실린 최보식 선임기자의 김규한 쌍용차 노조위원장 인터뷰.

―실직 뒤로 본인과 가족을 합쳐 23명의 자살자가 생겼다.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보지 않는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게 맞다. 이들이 죽음의 문제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속이고 있다. 하지만 저들이 약자(弱者)고, 우리는 직장이 있어 참아왔다. 이제는 할 말을 하고, 진실과 왜곡을 가려야 한다."

―무엇이 왜곡이라는 말인가?

"자살이 아니라 질병, 가정 문제로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내 입으로 다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죽음이 모두 구조조정에 의한 자살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보식 기자가 이렇게 묻고 쌍용자동차 기업노조 김규한 노조위원장이 저렇게 답한다. 쌍용자동차 기업노조라 함은 2009년 옥쇄파업 후 협상타결 과정에서 금속노조를 탈퇴한 공장 안 노동자들의 노조다. 최보식 기자는 “여야는 '국정조사'로 다투고, 회사 측과 농성자 측의 주장은 팽팽히 맞서 있다. 김규한(45) 현 쌍용차 노조위원장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 같았다”라고 묘사한다.

농성자들은 그들의 시선에선 노동조합도 아닌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의 소속이고 해고자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물론 언론이 사측과 해고노동자의 입장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있는’ 공장 안 노동자들의 입장도 보도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조선일보가 그간 해고노동자들의 입장을 기사화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처럼 보수언론에선 ‘없는 것’으로 치부되다가 그것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지경으로 번졌을 때에야 ‘다른 시선’의 입장으로 보도된다.

그나마 이 문답은 어처구니없는 ‘왜곡의 콤비 플레이’다. 쌍용차 범대위나 노동계 등 투쟁주체나 이들을 지원하는 쪽에서는 ‘23번째 죽음’ 내지는 ‘23번째 희생자’란 표현을 쓴다. 이 표현을 보고 ‘23명의 자살’을 말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오해는 본인의 것일 뿐 그들의 왜곡은 아니다. 한쪽이 자신의 오해를 발설하고 다른 쪽은 “국민을 속이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이런 견해는 김규한 위원장이 처음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청문회에서 쌍용자동차 이유일 대표이사도 “그 죽음이 모두 자살이거나 구조조정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작년 동아일보 9월 14일자에 송평인 논설위원 역시 “(당시 기준으로) 22명 중 자살자는 12명으로 줄어든다”라고 적은 바 있다. 이에 대해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 이창근은 “일단 12명이라 하더라도, 3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전체 2,646명 노동자 중에서 생긴 자살자라면 굉장히 높은 수치”라고 지적한다.

또 그는, “우리 입장에선 22명조차도 죽은 통계”라면서 “그렇다면 제대로 된 통계를 위해 해고자와 희망퇴직자들의 근황을 조사해 보자”라고 제안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끔찍하지만, 그러면 훨씬 더 심각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 예측”된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링크)

이유일 이사나 김규한 위원장은 모두 차라리 동아일보 논설위원처럼 “자살자는 23명이 아니라 12명”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구체화된 수치를 얘기하면 사람들의 눈길이 12명이라는 여전히 적지 않은 수치에 머물거라는 계산에서일 거다. 대신에 그들은 ‘아는 바가 많지만 차마 말하지는 않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김규한 위원장의 “다만 그 죽음이 모두 구조조정에 의한 자살은 아니라는 것”이라는 논리를 곧이 곧대로 이어가면 자살한 이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구조조정 때문에 자살했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고 따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내 입으로 다 말하기는 어렵다”라며 참은 본심의 말이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구조적인 차원과 개인적/실존적인 차원을 의도적으로 뒤섞은 ‘야바위’다. 그 구체적인 죽음 하나하나에 대해 말한다면야 그 죽음의 원인이 무엇 때문이라 단정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그것은 개인적이며 실존적인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해고/휴직/퇴직 노동자와 그 가족들 사이에서 ‘죽음’이 발생하는 빈도가 같은 나이대의 다른 사회 구성원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면 이는 분명히 그 죽음을 개인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어떤 사회적/구조적인 요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 ‘해직’ 내지는 ‘파업 당시의 폭력적인 진압’이 그 원인일 거라는 추측은 매우 자연스럽다. 이는 죽음의 빈도수에서만 나온 추론이 아니라 해직자나 파업참여자를 심리상담한 이들의 일관된 증언이기도 하다.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 257명의 정신건강 상태를 연구한 한 보고서를 보면 이들 중에 ‘정상’으로 판정받는 이들은 7% 밖에 안 되고, 전체 노동자 중 48.2%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을 겪고 있으며, 전체 중 71%가 심리상담 등의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인명사고를 경험한 기관사나 성폭력 등 각종 폭력에 노출된 서비스 노동자보다 6~7배 높은 수치에 해당한다고 설명된다.

구조조정당한 190명을 조사한 또 다른 보고서는 이들 중 80% 이상이 중증 이상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들의 1년 간 자살률은 일반인의 3.74배, 심근경색 사망률은 18.3배에 달한다고 말한다(이상 <의자놀이>, 공지영, 휴머니스트, p147의 내용). 결국 이유일 이사나 김규한 위원장의 주장은 별도의 조사도 없이 일반인들보다 십 배 이상 높은 확률로 나타나는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은 구조조정과 연관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다. 이들의 방식을 극단적으로 가져가면 파업참여자 중 7%는 ‘정상’으로 판정받았으니 ‘93%가 아픈 것은 그들의 멘탈이 약한 탓’이라고 우길 수도 있다.

“전쟁(파업)을 치르는 걸 구경만 해도 부담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노노(勞勞) 갈등을 빚으며 직접 싸웠고 이들을 몰아냈으니 왜 죄책감이 없겠나. 파업이 끝난 뒤 심리 상담과 치료 없이 곧바로 일을 해야 했다. 사실 우리도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가슴에 응어리가 맺힌 게 많다."라는 김규한 위원장의 말은 새길 구석이 있다. 이는 공장 안에서도 자살자가 나오는 현실을 보며 쌍용차 범대위나 노동계에서도 말하는 바다.

그러나 공장 안 노동자의 처지를 이해한다 해도 김규한 위원장의 문제해결 방안에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가 공장을 잘 살려야 그들에게도 기회가 있다. 다 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은 바깥에서 우리를 흔들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무책임하게 관여하고 있다. 복직 여부는 그런 정치 논리가 아닌 공장의 생산 물량에 달려있다. 쌍용차가 많이 팔리면 복직이 빨라지고, 안 팔리면 지금 인원도 남아도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국정조사가 필요한 이유는 생산물량의 문제와는 별개이고, 정황을 따져봤을 때 당시의 구조조정이나 현재의 복직 논의가 생산물량과 연동된 ‘경제적인’ 문제인 것만도 아니다. 쌍용자동차의 생산물량은 가장 많던 시절에도 15만대를 넘지 못했으며 구조조정 당시에는 10만대까지 줄었었고 현재는 12만대를 넘어선 정도다. 판매부진은 노동자의 책임이 아니었고 판매부진으로 인한 경영상 어려움은 노조 측이 제시한 노동시간 감축 및 그에 연동된 임금 삭감으로 돌파할 수도 있었다. (관련 기사 링크)

사측이 하려 한 것이 ‘다른 모든 수단을 동원한 이후의 정리해고’가 아니라 ‘어떠한 타협안도 받아들이지 않은 정리해고만을 목적으로 한 정리해고’였다는 바로 그 사실이 당시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 정도로 결집된 투쟁을 하도록 한 분노의 원천이었다. 사측은 이 사실조차 인정할 수 없을 것이기에 국정조사를 해보자 하는 것인데, 미리부터 결론을 내리고 이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극단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측과 기업노조위원장의 어법이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어법을 ‘사측’과 ‘농성자’의 중간자(?)적 입장인 공장 안 노동자의 입을 빌려 말할 때 가장 큰 ‘물타기’의 효과가 나올 거란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를 위해 최보식 기자는 짐짓 김규한 위원장의 논리를 공박하는 편에 서서 그에게 최대한의 반론 기회를 보장해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최보식 기자의 염려는 ‘온정주의적 시선’으로 여겨지고, 김규한 위원장의 논법은 이 시선의 나이브함을 극복하는 ‘합리주의’로 돌변한다.

그렇게 노동계의 주장을 최보식 기자의 염려와 같은 ‘비합리적 온정주의’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이 조선일보의 진정한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물타기는 맥락을 따져봤을 때 쌍용차 범대위와 노동계가 ‘23명의 죽음’을 모두 ‘구조조정으로 인한 자살’이라 주장했다는 새빨간 거짓말 위에 서 있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왜곡이 비록 당대에는 조선일보만을 보는, 개인의 죽음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들에 의해 옹호받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이러한 왜곡을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는 향후 어떠한 변명을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로서 남을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론학자들을 잘 구슬려 그것을 ‘조선일보의 특수성’이 아닌 ‘시대의 한계’로 포장하는 것 정도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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