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에서 패배한 민주통합당의 당 쇄신 작업은 여전히 안개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거의 모든 유력 인사가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언론에 한 번이라도 거론된 인사들의 이름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손학규, 정세균, 정대철, 원혜영, 이종걸, 박병석, 이낙연, 이석현, 박영선 등. 이쯤 되면 사실상 ‘정해진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일부에서는 비대위원장에게 당 혁신의 임무가 있음을 강조하고, 일부에서는 공정한 지도부 경선 관리의 임무를 내세운다. 그럴듯한 말들이 오가지만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계파’다. 현재 민주통합당이 처한 상황 속에서 당 혁신의 임무는 결국 어느 계파의 노선이 실현되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친노냐 비노냐, 주류냐 비주류냐의 판단 기준이 모든 상황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계륜 의원이 원내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하자 비주류 의원들을 중심으로 ‘친노가 또 해먹으려는 거냐?’는 우려가 터져 나왔다. 손학규계로 분류되는 김동철 의원이 나서는 모양이 돼 모처럼 선전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또 다른 유력 후보였던 박기춘 의원이 ‘비대위원장은 따로 선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자 상황은 급반전됐다.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겸임하면서 차기 지도부 구성을 준비하도록 하자는 구상은 비대위원장 선출만 따로 떼어내 이후 일정으로 미루면서 미묘한 파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일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단은 박기춘 원내대표와의 오찬 회담에서 ‘선거 패배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과 수수방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은 비대위원장 후보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실상 계파 색이 없는 관리형 비대위원장의 추대를 주문한 것이다.

▲ 민주통합당 박기춘 원내대표가 3일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열린 상임고문단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비대위원장 추대를 둘러 싼 불협화음

그러나 이렇게 비대위원장 자리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것이 되니, 계파를 아울러 추대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상황이다. 손학규 고문은 일찌감치 독일로 유학을 가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정세균 고문은 비대위원장 추대를 정중히 고사했다. 원혜영 의원의 경우 본인은 억울하다고 항변하나 ‘범친노’라는 딱지가 붙어 있어 비주류 의원들의 비토를 받는 상황이다. 이종걸 의원의 경우도 비주류 계파 색이 강해 부담스럽고 박병석, 이낙연, 이석현 의원의 경우 리더십의 문제가 우려되며 박영선 의원의 경우 차기 지도부 선거에 더 관심을 보이는 상황이라는 풍문이다.

박기춘 원내대표는 추대가 안 되면 경선을 해서라도 9일 비대위원장을 반드시 선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이 역시도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이 중론이다. 당장 SNS 등의 공간에서 ‘비대위원장을 경선을 해서 뽑는 것은 처음 봤다’는 얘기들이 흘러나온다. 4일 SBS라디오 <서두원의 시사초점>에 출연한 정장선 전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은 ‘비대위원장을 (경선으로) 선출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면서 ‘비대위원장 하나 선출을 제대로 못하는 과정을 보면 선거에서 진 것이 그냥 우연이 아니다’라는 한탄을 내뱉기도 했다.

도저히 당 내에서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외부 인사를 영입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역시 당 내의 반발 때문에 이마저도 무산되는 분위기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의 경우 지난 2일 MBN 뉴스M에 출연해 ‘윤여준 전 장관 같은 분이 비대위원장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해 추천했으나 당 내의 반대가 심해 마음을 고쳤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그냥 박기춘 원내대표를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인 셈이나 이런 판국에 이것도 쉽게 합의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4일 SBS라디오 <서두원의 시사초점>에 출연한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누구 탓을 할 일은 아니다” 라면서도 “현재 책임을 맡았던 쪽이 실패했으면 물러나는 것이 맞고, 그런 차원이라면 당을 맡아왔던 친노라 불리는 분들이 물러서는 것이 옳으나 굳이 안 물러서겠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 사실상 이 문제가 당내 주류의 기득권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안철수발 정계개편?

민주통합당 쇄신의 또 다른 변수는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안철수 전 후보의 존재다. 안철수 전 후보가 언제 귀국할 지, 어떤 발언과 구상을 갖고 나타날 지, 어떤 방식으로 정치행보를 재개할 지에 따라 야권 전체의 판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 안철수 전 무소속 대선후보가 18대 대통령 선거일인 1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하고 있다. ⓒ뉴스원

이철희 소장은 위의 자리에서 “안철수 전 후보에게 입당을 종용하는 것은 좋지 못한 모습이다”라면서 “민주통합당 전체가 환골탈태해서 따로 가는 것이 힘들고 같이 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 좋다”라고 안철수 전 후보의 민주통합당 입당을 우회적으로 주문했다.

하지만 미묘하게 온도차를 보이는 시각도 존재한다. 같은 자리에서 정장선 전 사무총장은 “민주통합당이 안철수 전 후보를 끌어안고 가자는 시각을 가지면 실패한다”면서 “안철수 전 후보가 야권 전체를 통합하겠다는 전망을 갖고 귀국해야 진전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 안철수 전 후보 중심의 정계개편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진보정의당, 통합진보당 등과의 관계 설정 문제, 향후 민주통합당의 노선을 결정할 주요 지지층의 타겟팅 재설정 문제 등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민주통합당 주요 지지층에서는 SNS 등을 통해 ‘할 일이 태산인데 머뭇거리고만 있는 모습이 답답해 보인다’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온다. 일각에서는 ‘국회에 127개의 의석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런 식인데 언제 정권을 다시 되찾을 수 있겠는가’라는 우울한 물음도 제기된다. 패배한 정치세력치고는 너무 가진 것이 많아 더 심각한 위기로 빠져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민주통합당은 그야말로 미로를 헤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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