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다사다난이란 진부한 표현으로 늘 부족한 한 해가 또 저물어간다. 뭔가를 뺏긴 것 같은, 뭔지 모를 억울함과 허탈감의 시간 속에서도 누군가는 올 한해를 정리해야하고, 그 유산들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미디어스>가 아직 끝나지 않은 2012년을 결산한다. 대중문화, 정치, 미디어 이슈의 순이다. 들뜰 시간도 없이 훌쩍 이른 연말이지만, 부디 차분히 더듬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용두사미. 어떤 이들에게 2012년의 한국 정치를 사자성어로 요약하라 요구한다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연초만 해도 정권교체는 물론 정치권교체가 일어날 분위기였는데, 연말이 되니 “헉 이거 꿈?!”하면서 깨어나야 하는 상황이다. 꿈에서 깬 우리들을 위하여 올 한해 정치를 세 개의 키워드로 요약해 보았다.

안철수 현상과 정당정치에 닥친 위기

▲ 19일 오후 미국으로 출국하는 안철수 전 후보의 모습. 그는 정당정치 바깥에서 1년 동안이나 대선국면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여 왔다. ⓒ뉴스1

2011년 가을바람으로 시작한 ‘안철수 열풍’은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소멸되지 않으며 정치권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야권 후보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는 사퇴하고 말았지만 2002년의 정몽준 후보와는 달리 사퇴 후에도 대선 정국의 주요 변수로 운위되었다.

이는 ‘5+4 원탁회의’를 통한 야권단일화의 열풍이 거세던 2010년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양당제를 향하는 것만 같았던 한국 사회에 아직도 양당제로 수렴되지 않는 정치적 열망이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양당 바깥의 열망’이 진보정당 운동 등 다른 제3정당이 지리멸렬해진 현재의 정세에선 ‘정당 바깥의 그 무엇’으로 출몰할 수 있다는 점도 부여주었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 현상’과 이를 포섭하기 위한 정치권의 대응은 ‘정당정치 위기’ 담론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기성 정당들은 ‘안철수 현상’을 포섭하기 위한 갖가지 방책을 강구했는데, 이는 기존 정당의 문법에서 볼 때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민주당은 이미 작년에 시민사회세력들을 끌어들여 민주통합당으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모바일 투표’로 대변되는 당원의 권리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길을 택했다. 물론 국민경선제와 여론조사 등을 중시하고 확대하는 조류는 ‘안철수 현상’ 이전부터 민주당이 택했던 길이기도 했다.

안철수 후보가 정당정치와 거리가 먼 제안들을 ‘새 정치’의 방안으로 내세우면서 이러한 경향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국회의원 정수 축소, 중앙당 폐지 등의 제안은 최고 통치자와 추상적인 ‘국민’ 사이의 소통만을 강조할 뿐 그것들을 이루어낼 체계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철수 지지자들은 그러한 정당정치 축소가 기득권 내려놓기이며 정치개혁이라는 안철수의 제안을 민주당의 과거를 통해 어렵지 않게 옹호할 수 있었다. 가령 그들은 국회의원 정수 축소는 IMF 직후 김대중 정부에서도 추진한 것이며 중앙당 폐지 역시 열린우리당에서 추진하던 것이라며 ‘선례’를 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선 “오늘의 안철수와 어제의 민주당”을 대비시킨 정치학자 박상훈의 관점이 옳았다. 그는 “문재인이 승리하려면 안철수와 싸울 일이 아니라 민주당의 과거와 싸워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 지난 11월 23일 경향신문 31면 박상훈 칼럼

정당정치의 위기를 보여준 것만은 민주당만이 아니었다. ‘노동자 후보’를 천명하는 두 명의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좌파진영의 현실은 민주노동당(2000년~2011년)과 사회당(1998~2012년), 진보신당(2008년~) 등 정당운동으로 전개되었던 2000년대 진보운동의 퇴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총선 야권연대에 참여했다가 비례대표 경선 부정 사태 이후 갈라선 통합진보당(2011년~)과 진보정의당(2012년~) 후보는 등록 이전 사퇴하거나 투표 이전 사퇴하였다. 진보신당의 경우 무소속 김소연 후보(5번)을 지지하였다. 이는 좌파정치의 역량이 대중조직의 기반을 상실하고 있고 새로운 토양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 내몰렸음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결국 민주당이든 군소 진보정당이든 사회의 각 영역과 접선하는 정당의 역량을 고민하는 것은 물론, 그 각 영역을 대변하는 대중운동 조직의 부재에 대해서까지도 걱정해야 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대체로 민주당은 전자의 문제에, 진보정당은 후자의 문제에 더 집중해야겠지만 당의 역량 강화가 이루어지기 보다는 향후에도 ‘안철수 이후의 안철수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현실이라 하겠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던 구도에서 발생한 서울 역포위

▲ 총선 직후인 지난 4월 12일 국민일보 1면 사진

올해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서울 역포위’였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여론조사 결과와 달리 박원순이 나경원에게 여유 있는 승리를 거두자 정권심판론과 SNS 및 나꼼수 등 뉴미디어의 영향력, 그리고 청년세대의 결집이 총선과 대선에서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낙관론은 ‘서울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드러났다. 총선에서 민주당은 서울에서 강남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경기도 역시 서울에서 가까운, 말하자면 ‘통근 가능한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외 지역에선 호남과 세종시 주변, 제주에서 승리했을 뿐 영남, 대전 및 충남북, 강원에서 전부 패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1987년 이후 총선/대선 결과의 경향성에서 사뭇 달라진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한국 특유의 지역주의 선거구도 속에서 각 정당이 자기 지역을 가져간 다음 수도권에서 이기는 이가 정국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한 극단적인 논리가 노태우(TK), 김영삼(PK),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각자의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김대중이 당선될 수 있다는 1987년 김대중 진영의 ‘4자 필승론’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4자 필승론’은 김대중 후보가 수도권에서도 노태우/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를 차지하는 등 ‘실패’로 드러났지만 수도권에서의 선전이 전체 선거 국면에서의 승리를 좌지우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대체로 야권은 ‘텃밭’인 영호남의 인구 차이에서 발생한 손해를 수도권에서 메우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하는 후보가 승리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12년 총선에서부터 이러한 경향성이 반전되는 ‘서울 역포위’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민주당의 선거전략인 SNS 등을 위한 투표율 재고가 지방에서는 효과가 없었다는 분석, 충청과 강원에서 민주당 출신 자치단체장(안희정, 최문순)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하다는 분석, 이미 과개발된 서울과 아직 부동산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한 지방과의 이해관계의 간극이 있다는 분석 등이 나왔다. 특히 ‘서울 및 그 주변부’와 기타 지역의 부동산 문제의 차이에 대한 고찰은 단지 선거전술의 차원을 넘어 민주당 및 야권의 정치전략의 문제에 회의를 던지는 근본적인 것이었다. 대선 당일 나온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저자 박해천 교수의 "지방 중산층이 MB정권에 느끼는 감정의 색채가 수도권 중산층과는 전혀 다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라는 진단은 야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훨씬 이전에 던져져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충분히 고찰되지 못했다. 안철수 후보는 ‘새 정치’를 통해 청년층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에 골몰했다. 총선 결과도 정당투표로 따지면 야권연대가 새누리당에 앞선다는 식의 ‘정신승리’가 난무했다. 그리고 그 결과 2012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서울과 호남을 제외하곤 문재인 후보가 앞서는 지역이 하나도 없었던 참혹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대전과 세종시, 제주에서조차 문재인 후보가 초박빙으로 박근혜 후보에게 뒤처지는 결과가 나왔다. 표차는 100만표라도 지역구도로 보면 완패였던 셈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원인분석 및 이를 극복할 방법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의 야권의 정치전략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규명하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선거에서도 ‘서울에서만’ 흥을 내다가 패배하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대선날인 지난 19일 경향신문 30면 박해천 칼럼

세대분화 선거의 의미와 오류

▲ 지난 3일 탁현민 교수가 기획한 광화문 유세“춥다!‘문’열어!”에서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울려퍼질 때 등장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모습 ⓒ뉴스1

‘지역이 아닌 세대’, 결국 2012년 대선에서 야권의 선거전술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었다. 세대균열 전술의 유효성과 한계에 대해서는 미디어스에서도 분석을 한 바가 있다. (링크) 민주당 전술의 핵심은 지역구도에서의 열위를 투표율 재고로 인한 세대대결로 극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당이 ‘안철수 현상’을 이해하고 받아 안은 방식이었다.

선거결과는 민주당의 전술이 ‘성사’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직 출구조사 결과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2030세대의 투표율과 문재인 지지율은 각각 65.2%/65.8%(20대)와 72.5%/66.5%(30대)에 달했다. 이는 이 세대 유권자의 2/3 이상이 투표했고 그중 2/3 가량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는 의미로 청년층의 투표율이 낮은 보편적인 현상에 비추어 볼 때 더 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의 세대결집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술은 ‘성사’되었으되 ‘성공’은 아니었다. ‘역풍’이 더 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50대의 기록적인 결집(89.9% 투표)와 박근혜 선택(62.5%)이 결정적이었다. 장년 및 노년세대 역시 청년층의 투표결집에 자극받은 데다 ‘이정희 TV토론’에 분개하여 더욱 결집했다는 분석이 선거 후에 나왔다. 2030세대 유권자의 숫자가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50대 이상 유권자 숫자보다 뒤쳐진다는 것도 ‘패인’으로 지목되었다.

결국 지역과 계층 등의 변수를 고려한 맞춤형 서민전략이 없다면 세대분화만으로는 야권이 승리할 수 없다는 교훈을 던져준 선거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50대의 높은 인구 비중과 높은 투표율 때문에 대선에서 실패했다며, 전략 부재를 환경 탓으로 돌릴 때 실패는 반복된다”라며 “뼈를 깎는 아픔을 감내하고 냉철한 분석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했다. 야권이 내년부터 과연 그러한 분석을 하고 처방을 내릴지에 대해선 향후 언론과 시민사회 역시 감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 지난 24일 한겨레 30면의 한귀영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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