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홍 작가 ⓒ김도연

그에게는 MBC 얘기를 꺼내기조차 미안해진다. '잘 지내시냐'는 말을 던지며 서로의 안부를 묻기 마련이지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이내 가슴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그래도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잘 지내시죠?"라고 묻자, 정재홍 <PD수첩> 해고 작가는 "저희 MBC가 요즘 조용해서 덜 바쁘시죠"라며 외려 기자의 긴장을 풀어준다. 나머지 해고작가들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정 작가는 "한 명은 알바하고 나머지 분들은 놀고 있어요"라고 어린 아이 같이 함박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심각해진 얼굴로 "끝장텐트할 때는 그나마 그 생활패턴을 유지했는데, 텐트가 끝난 뒤 생활리듬 자체가 깨져버렸어요. 지금은 다들 각개격파 돼 있는 상황이고 다른 작가들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3일 오후 4시 서울시 마포구 인문카페 창비에서 열린 정재홍 작가의 신간 <악惡! 소리나는 이야기>(출판사 미다스북스) 기자 간담회는 따끈따끈한 그의 책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자리였다.

정재홍 작가는 "피디수첩은 공동 작업이 많았던 프로그램"이라며 "한 프로그램 당 작가들이 4명 정도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다. 공동이 함께 노력해서 만든 성과이기에 내가 혼자서 책을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간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야만 했을까? 정 작가는 "지난 7월 25일 해고되고 난 뒤, 작가들이 서명과 시위를 하고 각계 각층에 할 수 있는 모든 청원을 다 했다. 그럼에도 그들(MBC 사측)은 꿈쩍도 않더라"며 "보고 느꼈던 것들을 기록하지 않으면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반복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까지 피디수첩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자리에는 정재홍 작가와 함께 해고된 <PD수첩>의 이소영 작가, 이화정 작가, 임효주 작가와 장은정 전 <PD수첩> 작가(현 <휴먼다큐 그날> 작가), 백종숙 MBC 구성작가협의회장, 류종렬 미다스북스 대표가 참석했다.

류종렬 미다스북스 대표는 "조세희 선생님과 6개월 정도 일을 한 적이 있다"며 "그 분이 하신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많이 읽히는 책보다 한 사람의 운명이라도 바꿀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악 소리나는 이야기가 우리 사회를 제대로 되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고, 이 분들이 원래의 위치로 하루빨리 돌아가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어 류 대표는 "정 작가와는 친구 사이"라며 "나는 굉장히 외향적인 것에 비해, 정 작가는 굉장히 인간 관계가 협소하다. 피디수첩 작가이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로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돌아갈까 언제나 염려하는 친구"라고 덧붙였다.

화기애애했던 기자 간담회의 분위기와 다르게 현재 MBC의 미래는 어둡다. 특히 <PD수첩>의 경우, 남아 있던 기존 PD 7명을 제외한 채 시용 PD와 대체 작가로만 방송을 재개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새롭게 방송되는 <PD수첩>은 '고독사' '일본 우익의 문제' 등을 주제로 11일부터 전파를 탈 예정이다.

"고독사, 일본 우익 문제 등을 방송하면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그럴 법하다,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진위를 가려야 하는 문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 문제는 다루지 않거나 부실하게 취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를 테면 피디수첩이 다룬 용산 참사 문제는 경찰의 과잉 진압에 불법 행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외압이 들어오는 것은 일상사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피디수첩이 과연 이와 같은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권력을 냉철하게 비판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MBC가 일방적으로 해고한 정재홍, 이소영, 이화정, 장형운, 이김보라, 임효주 작가.(왼쪽부터) ⓒ김도연

정 작가는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사태' '미국산 소고기' '황우석 사태' '검사와 스폰서' 등 <PD수첩>을 굴지의 탐사보도프로그램 반열에 올려 놓은 프로그램들의 제작 과정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악惡! 소리나는 이야기>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정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해고 전) 마지막 아이템이 230만 표에 달하는 해외동포 선거권이었다. 파업 전에 어렵게 취재를 했었다"며 "민주평통자문회, 재향군인회 등은 선거 운동을 하면 불법이다. 하지만 (민주평통자문회, 재향군인회 등이) 미국이라든지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사조직을 만들어 여당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까지 권력과 불화했다.

<PD수첩>은 노동 강도가 가장 세기로 악명 높다. 작가 세계에서 <PD수첩>은 '군대'라고 불린다. 17년 차 장은정 전 PD수첩 작가도 "3번이나 거절했다"고 스스로 밝힐 정도로, <PD수첩> 작가는 웬만한 책임감과 의식이 없으면 하기 힘든 직업으로 꼽힌다. <PD수첩>을 처음 만들었던 작가도 6년을 하고 나갔단다.

하지만 정재홍 작가는 무려 12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장은정 작가는 이런 정 작가를 "산신령"이라고 부른다. 장 작가는 "정 작가를 화장하면 사리가 많이 나올 것"이라며 "정 작가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정을 소화하며 두통을 달고 다녔다. 2000년 이후에는 국가 기관에서 들어오는 소송과도 싸우느라 참 많은 고생을 했다"고 전했다.

▲ 장은정, 정재홍, 이화정 작가 (왼쪽부터) ⓒ김도연

볼펜 하나로 지금껏 버틴 정 작가의 정신, 모든 것이 권력과 자본에 응축된 사회에서 그의 작가 정신은 빛난다. 그에게 있어 '작가'는 무엇일까? 정 작가는 "오리발"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리는 우아하게 물을 미끄러져 나가지만 오리의 발을 바쁘게 움직인다. 이처럼 밑에서 편집, 구성, 대본 등 궂은 일을 하며 PD를 뒷받쳐주는 것이 방송 작가의 역할"이라며 "우리는 팩트와 스토리 줄거리 등 아주 세세한 부분들까지 감당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래야만 권력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다"고 웃으며 답했다. 결코 타협할 생각이 없는 그였다.

러시아 대문호인 솔제니친은 "위대한 작가는 말하자면 그의 나라에서는 제2의 정부(政府)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권도 별 볼일 없는 작가라면 몰라도 위대한 작가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있는 정 작가이지만, '자본과 권력'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얼굴은 굳는다. 일관된 논조로 '견제'와 '비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고집 센 남자에게 가해지는 탄압은 시대와 권력에 불화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작가 정신'에 대한 '빅브라더'의 반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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