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균-신정아씨가 ‘가까운 사이’라는 청와대의 ‘점잖은’ 발표를 새벽 뉴스를 통해 듣던 순간, 숙취 속에서 퍼뜩 스친 생각은 이랬다. ‘연애질만 하지 웬 권력질?’ 입안이 까끌해 자리끼를 더듬어 들이켰다. 출근 뒤 어느 대선 예비후보 캠프 사람과 통화를 했다. 추측대로 그곳 사람들 아침 화제 역시 같았다. 그렇다면 결론도? 아니었다. ‘권력질만 하지 웬 연애질이냐’였다고 했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숙취가 확 깼다. 요소는 같고 구성만 뒤집히면 양쪽은 닮은꼴인가? 거울 속을 처음 들여다보는 원숭이 기분이 들었다.

연애질과 권력질, 그 불행한 만남

▲ 동아일보 9월11일자 3면.

연애질과 권력질의 만남은 개인에게는 (결과적으로) 불행하고, 사회적으로는 (동기 자체가) 불순하다. 그러나 잘못 합성된 두 관계를 두고 ‘연애’를 문제삼느냐, 아니면 ‘권력행위’를 문제삼느냐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낭만적 사랑이 권력감정의 눈에 콩깍지를 씌운 것일망정, 난 권력질을 제어하지 못한 미욱한 연애질이 그저 안쓰러웠다. 거꾸로, ‘연애질이 으깨어버린 권력’이라는 대선 캠프의 사금파리 같은 시각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이 경우 도치(倒置)는 순서의 뒤집힘이 아니라 가치관의 뒤집힘이다. 곧 정치적 의제다.

내가 연애질을 권력질보다 귀히 여기는 건 개인 취향 문제를 넘어선다. 여성편력, 그런 깜냥은 애저녁에 없다. 난 오히려 ‘카사노바’ 류(類)에게는 도무지 가닿을 수 없는 데서 오는 열등감을 느낀다. 그저 너무 가파른 세상에 사랑만한 위안도 없다고 믿을 따름이다. 반면 가파른 세상은 권력감정으로 인해 더욱 가팔라진다. 사랑의 기본속성이 ‘소통’과 ‘공유’라면 권력의 기본속성은 ‘배타’와 ‘독점’이다. 양쪽은 거울 속처럼 정확히 대칭된다. 사랑 우위의 가치관과 권력 우위의 가치관이 정치적 대립관계로 배치되는 사정이 거기에 있다.

연애질과 권력질의 오버랩을 경계하는 건 당연하지만, 연애와 권력이 짝패를 이루는 것도 우리에겐 익숙한 삽화다. 언뜻 꼽아봐도 카이사르-클레오파트라, 현종-양귀비, 연산군-장녹수 같은 동서양의 따르르한 커플들이 모두 그렇다. 변양균-신정아 커플이 같은 반열에 오르기에는 힘에 부쳐 보이지만, 둘의 관계를 매개한 연애질마저 그에 못 미친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들이 스스로를 설명한 ‘예술적 동지’가 아니면 또 어떤가. 이 나라 방방곡곡 성업 중인 러브호텔들이 온통 화성인들로 채워지는 게 아니라면, 그들의 연애질은 ‘러브호텔 객실수 분의 1’이다. 그래서 피의 사실이 확정되더라도 두 사람에게 마땅한 건 권력질에 대한 징치일 뿐, ‘주홍글씨’는 아니다.

▲ 조선일보 9월11일자 1면.

권력의 눈으로 연애를 바라보는 미디어들

빤한 얘기가 아니다. 한국 언론의 보도 행태를 보라. 그날 이후 긴 시간이 흘렀지만, 내가 보기에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이들은 한사코 권력의 눈으로 연애를 바라본다. 짐짓 권력질이 메인이고 연애질은 가십이라고 연출하고 있어도, 이메일 내용에 대한 호기심을 은유법으로 부추기는 교묘함과 숙소 사이의 거리를 실측해 두 사람의 관계를 공학적으로 확증하는 집요함은 정작 가십의 본질을 드러낸다. 가십은 지배권력이 공포를 희화화하는 문법이다. 연애질은 권력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자, 비웃음거리로 만들어야만 비로소 안도할 수 있는 낙인의 대상이다.

▲ 한겨레 9월11일자 3면.

언론의 이런 문법은 정확히 포르노그라피의 문법과도 일치한다. 포르노가 다루는 것은 외설이 아니라 적나라한 권력감정이다. 포르노의 성애가 감미롭게 ‘소통’되지 않고 폭력적으로 ‘관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신문이 알몸사진을 실어 살구색 지면을 핑크빛으로 물들인 것은 일종의 키치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다른 매체들이 의뭉스럽게 헛기침하며 포르노 사진을 성화(聖畵)로 채색할 때, 씩씩하고 당당하게 “국민의 알권리와 남성(권력)의 볼거리는 하나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폭로, 그 ‘자뻑’이 없었다면 운전석의 달력사진이 루브르박물관에 걸릴 뻔했다.

얼마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문제의 신문에 ‘사과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불확실한 ‘성로비 가능성’을 정확성·공정성·객관성을 담보하지 않은 채 선정적으로 보도했다며 지면에 사과문을 게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가히 신문(언론)스럽고, 가히 윤리하다. 이 결정이 신문스러운 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양 시치미를 뗐기 때문이고, 윤리한 건 정치적 사안에 천연스레 윤리의 잣대를 갖다 댔기 때문이다. 은유와 직설의 차이가 윤리와 비윤리를 가르는 경계인가? 성로비 가능성이 확실했으면 문제의 신문은 윤리적인가? 여기서 비윤리적인 건 정작 탈정치화다.

가히 ‘신문스럽고 윤리한’ 신문윤리위의 결정

신정아가 권력질을 하려고 연애질을 이용한 건지, 변양균이 연애질을 하다 보니 권력질까지 하게 된 건지 알 길은 없다. 연애질은 검찰의 조사 대상도 아니니 두 사람만의 비밀로 남을 공산이 크다. 아니, 꼭 그래야 한다. 그 달콤했던 첫맛도, 그 쓰디쓴 뒷맛도 온전히 그들의 몫이어야 한다. 다만 확연한 것은 언론에 의해 신정아는 마녀가 되었지만 변양균은 악마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연애질만 하지 웬 권력질?’과 ‘권력질만 하지 웬 연애질?’이 닮은꼴이 될 수 없는 이유도 꼭 그만큼 확연하다.

계절을 넘겨 이어져온 ‘변-신 사태’는 시나브로 수굿해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연애질로 매개되지 않았다면 이 사태로 날밤 새는 신문·방송의 열대야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정윤재 전 청와대 비서관 사건 보도와 견줘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두 사람 얘기가 잦아들고 있는 것도 더는 권력감정을 투사할 새로운 버전의 연애질이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검찰이 방향을 잃고 있는 지금이 정작 언론이 나서서 권력질을 파헤쳐야 할 때가 아닐까.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광기는 폐허만 남긴 채 사라질 것인가. 그러고 보니 머지않아 무서리 내릴 때가 됐다.

1993년 <한겨레>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줄곧 사회부 쪽에서 일했다. 지금은, 사상 초유의 정파(停波) 사태를 겪고 눈물겨운 투쟁 끝에 새 방송을 시작하는 OBS경인TV에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문제연구소장’을 자처하고 산다. ‘쿨하다’를 날씨 상태에 대한 표현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송진처럼 끈적한 386의 시대적 아비튀스에 갇혀 있지만, 일상의 억압에 관한 미시담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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