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은 끝까지 임단협 타결과 공정방송 수호를 위해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싸울 것을 조합원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약속드린다. 13대는 (한다면) 합니다. (11월 23일 KBS노조 특보)
사장으로 KBS에 첫 발을 내딛을 꿈에 부풀어 있는 길환영 부사장에게 통보한다. 역사를 뒤로 돌려놓으려는 당신은 결코 KBS에 뒷짐지고 출근하지 못할 것이다. 각오하라! (11월 21일 KBS노조 특보)
KBS노조는 길환영을 사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 (11월 13일 KBS노조 특보)

KBS노동조합(위원장 최재훈)이 '편파방송 종결자' 길환영 KBS 신임 사장을 비판했던 내용들이다. KBS노조가 강경한 투쟁 의지를 밝혔던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 KBS노동조합(위원장 최재훈)은 9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전국조합원 총회’를 개최해 “KBS노조 똘똘 뭉쳐, 정치독립적 사장 선임하자”고 외쳤다. ⓒ곽상아

최재훈 KBS노조 위원장은 KBS 사장 후보자들에 대한 면접이 진행됐던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전국 조합원 총회를 열어 "지금 11명의 후보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선임됐을 때 '축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다시 한 번 파업의 깃발을 올리고 투쟁할 수밖에 없다"며 "당당히 싸우고 외면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최재훈 위원장은 13일 단식에 돌입하며 "지금 이 순간 KBS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또 한 번 고통의 자리를 깔고 앉았다"고 비장한(?) 심경을 밝힌 뒤 26일까지 단식을 이어갔다.

윤형혁 KBS노조 공정방송 실장 역시 언론인터뷰를 통해 수 차례 '강력 투쟁'을 밝혔다. 윤형혁 실장은 지난 6일 "고대영, 길환영 등 말도 안 되는 인물이 사장으로 온다면 저희가 가만히 있겠느냐. 파업, 단식 모두 할 텐데 (새 노조와는) 시기적으로 불일치 할 뿐"이라고 말했다. 7일에는 "파업을 하더라도 신임 사장이 오는 시점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 23일(윗쪽), 19일(아래쪽) KBS노조 특보 1면 캡처

이렇듯 '강력 투쟁' 의지를 KBS 안팎에 피력했던 KBS노조는 26일 "길환영을 육탄저지하겠다"며 출근 저지에 나섰으나 이들의 출근저지는 단 하루 만에 종료됐다. 27일 KBS노조에 따르면, KBS 사측은 26일 오전에 노조 측에 문서를 통해 '제작과 보도의 자율성과 공정성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노사공동 TF팀 구성'을 제의했고 노조는 긴급 비대위를 통해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KBS노조는 "12월 7일까지 출근저지투쟁을 유보하는 대신 사측이 제안한 TF를 통해 국장 책임제 등 최소한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고, 만약 12월 7일까지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경우 총파업 절차에 돌입하기로 만장일치 의결했다"고 밝혔다.

길환영 사장은 양대 노조의 출근저지 투쟁 예고에 공식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인 지난 23일 취임식을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제작과 보도의 자율성과 공정성을 위해서 회사의 인사권과 경영권이 훼손되지 않고 양측이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함께 찾을 용의가 있다"며 TF팀 구성을 제안한 바 있다.

KBS노조는 "만약 12월 7일까지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경우 즉각 총파업 절차에 돌입하기로 만장일치 의결했다"고 밝혔으나, 실제 파업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으며 사실상 KBS노조의 '길환영 반대 투쟁'은 이대로 종료될 것으로 보인다.

윤형혁 KBS노조 공정방송실장은 27일 오후 <미디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동안 신임 사장이 오는 시점에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는데, 이제 파업에 돌입할 수 없게 된 것 아니냐?'는 질문에 "파업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고, 파업을 포함한 논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며 "어차피 운동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조합원의 정서가 어떠한지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파업과 관련한 부분은 비대위원들이 부정적 입장을 표했다"고 답했다.

'이제 길환영 사장을 인정하는 수순으로 들어간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저희 싸움의 목표는 사장 퇴진이 아니었다"며 "'사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었지만, 이러저러한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그 이후부터는 사장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고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던 낙하산 사장을 슬그머니 받아들인 경우는 이번 뿐만이 아니다.

정확히 3년 전인, 2009년 11월 KBS노조(당시 위원장 강동구)는 MB특보 출신의 김인규씨가 차기 KBS 사장 후보로 선정되자 "특보 사장이 KBS에 발을 들여놓겠다면 백정의 칼을 들고 12대 집행부 전원의 목을 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어의 몸이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역사의 십자가를 지고 투쟁의 전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갈 것이다"라며 해고와 구속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불과 1달도 안 된 같은 해 12월 중순 KBS 사측과 '김인규 사장 취임 1년을 맞아 사장의 공정방송 노력과 독립성 수호 등에 대해 중간평가를 실시하기로' 합의하면서 투쟁을 종료했다. '김인규 사장 중간평가'는 지난 3년간 실시되지 않았다.

▲ 강동구 당시 KBS노조 위원장(왼쪽에서 5번째, 김인규 당시 KBS 사장 옆)은 2010년 1월 4일 오전 KBS 시무식에 참석했다. 노조 간부가 KBS 시무식에 참석한 것은 KBS 역사상 처음이다. ⓒKBS

이 뿐만이 아니다. 2010년 1월 4일 열린 KBS 시무식에는 KBS 역사상 최초로 강동구 KBS 당시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이 참석해 '낙하산'이라던 김인규 사장과 신년의 출발을 알리는 떡을 썰었다. KBS노조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낙하산 사장으로 인해 황폐화된 공영방송 KBS, 그러나 내부에서 견제역할을 담당해야 할 노조의 이 같은 행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KBS의 지배구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KBS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KBS노조의 책임도 크다. 낙하산 사장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용노조의 역사도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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