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영화는 감독 예술이라 하고,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고 한다. 영화의 경우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겸하기도 하지만, 관객들 대부분 감독의 이름만 기억하지 시나리오를 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반면 드라마는 <마의> 이병훈PD, <더 킹 투 하츠> 이재규PD, <풀하우스> 표민수PD 등의 스타PD 외에는 연출을 맡은 PD보다 작가의 이름이 기억되는 경우가 더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김수현 작가가 대본을 쓰는 모든 드라마이다. 김수현 작가의 파트너로는 정을영PD, 곽영범PD가 있는데, 시청자들은 김수현의 부모님 전상서, 천일의 약속이라고 하지, 정을영의 부모님 전상서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같은 맥락으로 근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KBS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에서도 주연배우 송중기, 문채원 다음으로 많이 거론되는 이름은 이경희 작가다. 심지어 최근 종영한 SBS <신의>도 유명한 김종학PD가 연출했지만 주목받는 이는 송지나 작가였다. 아예 박경수, 박지은 작가 이름만 기억되는 <추적자>,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말할 것도 없어 보인다.

뜬금없는 서두이긴 하지만, 그만큼 드라마에 있어서 작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까지는 아니라도 막강한 편이다. 섬세한 심리묘사와 현실감이 녹아있는 대사가 필수인 드라마에서 제작진, 배우들이 시각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그 모든 것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역할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영상물이 작가 혼자서 만드는 업적일까?

그건 아니다. 연출가와 배우에게 상세하게 지시를 내리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만, 결국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것은 현장에서 촬영하는 제작진과 배우이다. 제 아무리 작가가 맛깔난 대사를 대본에 입력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대사를 입으로 쳐야하는 배우가 형편없으면 죽은 문장이나 다를 바 없다. 반면, 훌륭한 연출가, 배우라면 제 아무리 밍밍한 대사와 지시도 생동감 있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 드라마, 영화라는 영상 매체의 묘미다.

그래서 우리나라 드라마, 영화는 극본과 연출에 높은 완성도를 기하기보다, 스타성 있는 배우 캐스팅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 게다가 요즘은 한류 열풍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인기를 얻는 배우들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흔하진 않고 대놓고 이뤄지진 않지만 배우의 요구에 따라 드라마 전체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 연예계의 정설이다.

어디 배우뿐이겠는가. <드라마의 제왕> 앤서니 김(김명민 분)처럼 완성도 없는 드라마는 용서해도, 돈 안 되는 드라마는 용서가 안 된다는 제작자님이 가세하면, 주인공이 우아하게 죽어가는 와중에도 제작비를 댄 오렌지 주스 회사의 제품이 돋보이는 대본을 써내려가야 한다. 그래서 요즘 드라마 작가들은 작품 완성도 못지않게, 한류 스타님들을 돋보이게 하면서, 동시에 PPL이 드라마에 잘 녹아들도록 고민해야 한다. 이래저래 작품 외적으로 작가들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나 <드라마의 제왕>에서 이고은(정려원 분)처럼 변변한 공모 수상경력조차 없는 신인작가라면 드라마 제작사는 물론이고, 방송국 드라마국 고위 간부에게 퇴짜 맞기 일쑤다. 결국 앤서니에게 해고 통보를 받은 이고은은 만취 상태로 최절정 한류스타 강현민(최시원 분)을 찾아간다.

강현민은 안하무인 톱배우지만 이고은의 열정에 반해, 제국 프로덕션 오진완(정만식 분) 대신 이제 갓 만들어진 앤서니의 월드 프로덕션을 택한 바 있다. 강현민 앞에서 술에 취한 이고은은 사정이 생겨 작품을 못하게 되었지만, 자기에게는 진짜 소중한 작품이니 부디 엄마 잃은 그 작품 끝까지 애정가지고 사랑해 달라고 부탁한다.

한류 스타와 까다로운 앤서니 김이 만족할 만한 좋은 작품을 써놓고도 인지도가 없어 작가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 이고은을 보아하니 딱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스타 지상주의, 방송국의 입맛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방송계 현실을 생각하면 내세울 작품 없는 신인 작가 이고은이 받는 설움은 드라마 속 가상 설정만은 아닌 것 같다.

마침, 하반기 <골든타임>이란 히트작을 쓴 최희라 작가가 월간 방송 작가와 가진 인터뷰에서,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를 두고 ‘완장 찬 돼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거센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작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해당 잡지에서는 이번 문제의 인터뷰가 최희라 작가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편집되어 논란이 불거졌다고 밝히며 해당 기사를 삭제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취재 기자는 해당 배우 혹은 최 작가에게 얼마만큼의 억하심정이 있었기에 그런 혐오감 느껴지는 단어를 썼을지 의문이다.

만약 인터뷰 상에서 ‘완장 찬 돼지’로 일컬어지는 배우가 <드라마의 제왕>의 강현민 수준으로 인기에 도취해 안하무인에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였다 치자. 당연히 작가와 스태프 입장에서는 화가 나고 그보다 더 심한 단어가 머릿속에 아른거릴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인터뷰에서 겨냥한 것처럼 보이는 배우 이성민은 오히려 이성민 때문에 <골든타임>을 봤다는 시청자들이 대다수를 이룰 정도다.

어디까지나 드라마는 작가놀음이기에,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에 있어서 작가의 역량은 정말 중요하다. 때문에 MBC <골든타임> 같은 경우에도, 중증외상이란 쉽지 않은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리얼하게 풀어낸 최희라 작가의 남다른 글 솜씨 덕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골든타임>의 성공이 과연 최희라 작가의 내공으로만 이루어진 쾌거일까? <골든타임>이 초반 부진을 뒤로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감 있는 병원 세태 고발도 한 몫 했지만, 최인혁 역을 맡았던 이성민의 남다른 존재감을 꼽는 이가 대다수다.

애초 <골든타임>의 최인혁은 이선균이 맡은 이민우 다음의 서브 주연에 불과했다. <골든타임>의 기획 의도대로라면 최인혁은 이민우가 진정한 의사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스승의 역할을 하는 조력자급이다. 그런데 극 중 가장 생동감 있는 캐릭터였던 최인혁이 주연 이민우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선균의 절제미 넘치는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워낙 이성민의 연기가 훌륭했던 탓에 수많은 시청자들은 인혁앓이를 시작했고, 이 때문에 ‘시즌2’를 요청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파장이 일고 있는 인터뷰에 따르면 최 작가는 ‘완장 찬 돼지’와 같은 어느 한 배우 때문에 시즌2를 망설이고 있단다.

잡지사의 해명대로라면 해당 잡지 기자의 어마어마한 실수로 게재된 인터뷰 때문에 <골든타임>이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골든타임>을 잊지 못하는 시청자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상태다. 게다가 <골든타임>의 시즌2를 요청할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는 팬들은 대부분 ‘인혁앓이’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최 작가와의 인터뷰가 빚은 후폭풍은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문제의 해당 인터뷰에서 물론 최 작가는 직접적으로 어느 한 배우를 지목하여 그를 ‘완장 찬 돼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민과 송선미가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연기를 해 분량을 뺐다는 이야기를 거론한 점, 이번 사건 이후 인터넷 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지문, 지시 없이 오직 대사만 있는 대본과 방영 이후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실제 영상을 비교해보면 누구를 지칭하는지 쉽게 짚을 수 있다.

오늘날 <골든타임>의 위상을 만들어준 장본인이 누구냐는 점을 떠나서, 자신이 쓴 작품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한 배우를 향해 공식적인 매체에서 ‘완장 찬 돼지’라는 극도로 혐오감 느끼는 단어까지 사용했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다.

설령 진짜 그 배우가 <드라마의 제왕>의 강현민 혹은 그의 실제 모델인 어깨 힘주는 몇몇 한류 스타님들처럼 ‘완장 찬 돼지’처럼 행동하고 작가 눈엔, 아니 기자 눈엔 그렇게 보였다 치더라도, 공식적인 매체에 그와 같은 단어를 썼다는 것은 적어도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 배우에 대한 예의조차 없어 보인다.

마침 당일 <드라마의 제왕>에서 어떻게든 자기가 쓴 작품을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진짜 ‘완장 찬 돼지’에게 진심으로 사정하는 이고은 작가를 보니 서글픈 마음이 앞선다. 아무튼 이번 해프닝과 <드라마의 제왕>으로 얻은 뼈아픈 교훈이라면 드라마는 작가만의 놀음, 일부 한류 스타와 제작사가 휘두르는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장난감이 아니라 작가, 제작진, 배우, 그리고 시청자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만약 매스컴에 거론되는 그 배우가 정말로 인기에 취한 ‘완장 찬 돼지’라면 드라마 끝나자마자 다시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는 소극장 연극 무대에 설 수 있었을까? 이번 인터뷰로 크게 상처받았을 그 배우분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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