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9일 오후 인천시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열린 2012 인천 K-POP콘서트에서 가수 아이유가 깜찍한 무대를 펼치고 있다. ⓒ 연합뉴스

 

오늘은 잠시 ‘바보’가 되어 볼까 한다. 아주 유치한 유비와 가정, 단순한 이분법을 통해 들머리와 논지를 끌고 갈 것이다. 순진한 선의는 미련함으로 구박받고 계산 없이 살다보면 정말로 계산할 돈도 없어지는 세상이지만, 때론 최대한 단순해지는 것이 사태를 명료하게 만든다. 예컨대 모두가 눈치와 체면, 번잡한 타산으로 전전긍긍 할 때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친 어린 소년이 돼보잔 얘기다.

먼저 유치한 가정으로 시작해 보자. 당신의 이름은 ‘국민’이다. 당신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있다. 말하자면 당신의 동생은 ‘국민 여동생’이다. 베이비 로션을 영구 도포해야 할 것 같은 애기 같은 스무 살. 앙큼한 애교로 애간장을 녹이며, 옥구슬처럼 조그만 입을 들썩여 ‘오빠 바라기’를 자임하는 그녀. “나는요~ 오빠가 좋은 걸~”

평화롭던 어느 날. 당신은 동생의 방 앞에 떨어진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그녀는 웬 반라의 잡놈과 다정히 고개를 맞댄 채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이유 모를 배신감에 무너질 듯 경악한 당신. 여동생의 방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지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당신의 분노에 당황한 그녀. 실수로 떨어트린 사진이고, 그저 친한 오빠일 뿐이라 작은 손바닥으로 사래질한다. 나를 지금 바보로 아는 거야? 도대체 왜 내게 진실을 말하지 않고 속이는 거야! 당신은 스무 살 여동생이 불륜이라도 저지른 듯 어깨를 부여잡고 울부짖는다. 분명히 주인공은 오빠와 여동생인데, 이것이 과연 가족드라마일까 아니면 한 편의 사이코드라마일까.

여기 연예인을 향유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가족’과 ‘상품’. ‘오빠’부대니, ‘삼촌’팬이니 패밀리쉽을 가장한 지지와 우정의 동심원적 관계, 그리고 인격과 프라이버시까지 바코드를 찍으며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후기 자본주의적 거래. 물론 사태를 단순화하기 위한 단적인 구분이지만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기 위해선 잠시만 더 바보가 되어야 한다.

당신에게 아이돌이 친밀한 우정의 대상이나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그 애정의 크기만큼은 그녀들의 인간성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품안의 철부지 같은 순호한 환상이 깨어지는 건 누군가에겐 참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를 박제로 만들어 미연시 게임 인터페이스 속에 집어넣을 게 아니라면 팬들과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단 걸 받아들여야 한다. 설혹 당신이 여동생의 사진을 발견한 순간을 참지 못하고 방문을 두드렸다 해도, 자신의 내밀함을 굳이 고백하길 꺼린다면 모른 채 넘어가는 게 예의다. 그건 가족이라 해도 침범할 수 없는 닫힌 화장실 문 같은 엄연한 개인의 삶이다.

연예인이 엔터테이먼트 산업의 소산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명시적으로 확정된 계약관계가 없다. 더구나 아이돌의 어디까지를 거래의 대상으로 봐야 할지 애매해진다. 우리는 ‘이지은’이라는 인격체를 ‘아이유’란 가공된 정체성으로 소비한다. 여기서 ‘이지은’이 ‘아이유’로 인코딩될 때 남겨지는 잉여가 있는데 그건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일신 전속적 영역이다. 하물며 공중도덕을 지켰니 마니도 아닌, 자기 집 소파에서 누구와 사진을 찍든 우리가 궁금해 할 지언정 규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트위터에 실수로 연동되어 올라간 사진에 찍힌 것이 ‘아이유’인지 ‘이지은’인지, 임금님이 용포를 걸쳤는지 벌거벗었는지 보이는 그대로 판단해야 한다. 고객센터 상담원과 통화할 때, 내가 질타할 수 있는 게 제품의 불량인지 애꿎은 상담원인지 분별하는 상식적인 직관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명료한 이해를 위해 바보들의 논법을 구사했지만, 사실 이건 도마 위의 무 자르듯 명쾌하게 실감하기 힘든 일이다. 아이돌은 호적에 오르지 않은 여동생이다. 친동생처럼 쓰다듬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음습한 춘정을 자극하는 소비의 대상이다. 기획사들은 걸 그룹 멤버들에게 필살 애교를 연마시키는 동시에 그녀들의 치맛단을 계속해서 가위로 잘라버린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가족이 분해되는 파경 속에서, 자본은 ‘국민’ 마케팅이란 프랑켄슈타인 같은 환상을 동원해 보다 거대한 덩어리를 양가적 구매자로 포섭하려 든다. 우리는 과연 ‘또 하나의 가족’인가?

이 기만적인 부조리의 덫에 걸려든 가련한 공모자들이여. 당신이 차마 알고 싶지 않았던 혹은 모르고 있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은닉된 실재와 대면한 실망 역시 어쩌면 인간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이 가면극의 민낯에 느끼는 분노만큼은 혼종된 정체성으로 사생활의 유혹과 이미지관리에 샌드위치처럼 압박된 어린 소녀들도 괴로웠을 것이다. 차라리 이 기회에, 조각조각 꿰맨 재봉선으로 뒤덮인 거대한 테디베어 같은 ‘국민 여동생’이란 수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는 편이 좋다.

자신이 누구와 무슨 사이인지 묵비하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는 배타적 사생활이다. 이것을 위임받은 소속사의 입장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어주거나, 혹은 개인적인 판단을 내리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아이돌은 연예‘품’이 아닌 연예‘인’이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프라이버시를 인정한다면, 이 경우 당신이 행사할 수도 있는 소비자 권리의 최대치는 더 이상 아이유의 음반을 구매하지 않는 것이다. 브라운관 속 여동생 서사와 현실의 인격체를 구분하지 않고 두 년놈이 어디까지 간 사이인지 실토하라 주리를 튼다면 제정신 박힌 오빠도 현명한 소비자도 아니다.

제 몫이라 느끼는 욕망을 손해 보지 않고 관철하려는 고집과 대거리는 그렇잖아도 고단한 삶을 심지어 지끈거리게 만든다. 나는 가끔 세상 사람들이 ‘바보의 날’ 같은 걸 제정해 단 하루만이라도 아이큐 두 자리 수로 퇴행한다면 세계에 누진된 인간적 배려의 총량이 늘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스무 살은 일찍 지는 백일홍처럼 아름답고 예민한 시절이다. 그 불안한 유리구슬 같은 젊은 날의 우정과 사랑은 볼펜으로 눌러 쓴 자국처럼 흔적을 남긴다. 아이유, 아니 ‘이지은’의 스무 번째 겨울이 부디 상처로 새겨지지 않길 바라며. ‘국민 여동생’을 둔 ‘오빠’와 ‘삼촌’들이 ‘오빠’답게 ‘삼촌’답게 어른스런 이해심으로 감싸준다면 그 흉터의 깊이는 옅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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