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007 시리즈에는 큰 흥미가 없었습니다. 007 시리즈가 스파이 영화의 대명사인 것은 틀림없으나, 이상하게도 제게는 능글맞은 제임스 본드의 매력이 전해지질 않았습니다. 그랬다가 2006년에 다니엘 크레이그가 <카지노 로얄>부터 제임스 본드를 맡으면서 눈길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례적으로 인상만큼이나 과묵하고 터프한 모습으로 찾아온 제임스 본드를 두 팔 벌려 환영했습니다. 올드 팬들이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것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던 것과는 정반대였죠. 하긴 그 정도로 이전의 제임스 본드와는 큰 차별화를 두고 있었으니 공감은 못해도 이해는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007 시리즈는 '환골탈태'로 얻은 저와 같은 새로운 팬층이 많을까요, 아니면 떨어져나간 과거의 고정 지지층이 많을까요? 흥행성적을 보면 전자에 해당할 것 같지만, 탄생 50주년을 맞아 제작한 <007 스카이폴>은 후자에게로의 손짓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게 있어 <007 스카이폴>의 최대 화두는 샘 멘데스였습니다. 액션보다는 연극무대에서부터 복잡미묘한 드라마로 인정을 받은 샘 멘데스가 연출한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007 스카이폴>은 액션과 심리 드라마를 엮으려는 듯한 오프닝으로 시작합니다. 제임스 본드는 MI6 요원의 명단이 든 파일을 회수하려고 터키로 향합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동료를 보고 응급조치를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우선인 M은 본드에게 동료를 버리고 얼른 뒤를 쫓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하여 파일을 가진 악당과 제임스 본드는 기차에서 뒤엉켜 격투를 벌이는데, M의 과감한 결단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일으키고 맙니다.

<퀀텀 오브 솔라스>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의외로 <007 스카이폴>의 오프닝도 수준급입니다. 우려했던 것에 비하면 샘 멘데스의 액션 연출이 괜찮아서 갈수록 심장박동을 빠르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기차에 포크레인을 얹어 색다른 장면을 연출한 것도 나름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이 오프닝에서 중요했던 건 액션보다는 드라마를 구성하고자 심어놓은 발판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으로 인해 <007 스카이폴>은 제임스 본드(액션)이 아니라 M(드라마)를 위한 영화가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아울러 영화가 이어질수록 왜 M을 구심점으로 삼았는지도 함께 보여줍니다.

사실 <007 스카이폴>은 스스로 하나의 의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언 플레밍의 007은 영화사를 통틀어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산물입니다. 허나 냉전이 종식된 지 족히 수십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과연 007 시리즈가 존속해야 하는 명분이 있을까요?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억지로 이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이가 적지 않은 마당에, 샘 멘데스의 <007 스카이폴>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역설하며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MI6의 존폐를 놓고 열린 청문회에서 M이 읊은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의 한 구절은 <007 스카이폴>의 목적을 노골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장면에서 M은 율리시스가 되어 제작진의 의사를 대신 전달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선언입니다. 액션의 비중을 약화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탄생 50주년에 즈음하여 007의 존재에 회의를 품고 있는 모든 관객을 향한 의미심장한 선언입니다. 참으로 재미나게도 <007 스카이폴>은 M을 배치하여 미래로 나가기 위해 과거를 끌어안습니다. 이를테면 '온고이지신'이랄까요? 'old-fashioned'이니 'traditional'이라느니 하는 단어가 종종 나오는 것에도 그런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007 시리즈의 아이콘인 제임스 본드가 전에 없이 유약하고 노쇠한 꼴을 보이는 것이나, 새파랗게 젊은 Q가 등장해 제임스 본드와 대화하며 그를 가르치는 것, 21세기에는 걸맞지 않으나 과거의 시리즈에서 본드카로 활약했던 애스턴 마틴 DB5를 다시 불러들인 것 등도 마찬가지죠.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실바를 악당으로 삼은 것도 영리한 전략이었습니다. 실바는 과거에 MI6의 요원이었으나 M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돌아와 복수를 다짐합니다. 이 캐릭터는 곧장 오프닝의 제임스 본드와 그대로 겹쳐지지만, 제임스 본드는 실바와 달리 M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 유지합니다. <007 스카이폴>의 두 사람은 흡사 한 어머니에게서 배태됐으나 서로 다른 양면성을 가진 형제의 관계에 가깝게 그려집니다. 이것을 종식하고자 제임스 본드가 태어나고 자란 '스카이폴' 저택 일대를 배경으로 삼은 것도 결국 <007 스카이폴>이 가고자 하는 바를 나타냅니다. 스포일러라 말할 수 없으나 결말에서 그려지는 M의 운명 또한 과거사를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액션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007 스카이폴>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신에 미래를 바라보는 장기적인 포석을 감행한 것이죠. 이에 반해 정녕코 이 영화에서 아쉬운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본드걸을 쓸모없는 소모품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입니다. 나오미 해리스는 그나마 마지막에 반가운 전환을 보여주지만, 베로니스 말로히는 있으나 마나 한 역할에 그치더군요. 둘째, 제임스 본드와 M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갈등을 좀 더 심도 있게 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바까지 등장시킨 마당이라면 제임스 본드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극에 개입시킬 여지가 충분했을 텐데도 거의 일방적으로 그립니다. 그것이 MI6 요원으로서 제임스 본드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란 걸까요?

★★★★

덧 1) 주디 덴치는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007 시리즈에서 M을 연기한 배우 중 최고라고 해도 큰 이견은 없을 듯합니다.

덧 2) 오프닝에서부터 제임스 본드가 왜 '발터 PPK'를 사용하는지 의아했는데, 이것도 다 위에서 말한 이유가 있더군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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