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한국 드라마를 두고 배용준의 <겨울연가>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겨울연가> 공전의 히트 이후, 내수용으로 인식되던 드라마는 수많은 지구인들이 찾는 문화상품이 되었고, 배용준과 이영애 등 한류스타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웬만한 중견기업이 해외 수출로 벌어드는 외화 그 이상이다.

노는 물이 달라지다 보니 드라마 규모도 나날이 커질 수밖에 없다. '한류'스타들의 출연료는 이제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게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지 오래고, 한류 드라마 위상을 높이기 위해 블록버스터급으로 제작하다보니 드라마 한 편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백,천억 원 단위의 숫자가 오간다.

그 많은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드라마 제작사들은 광고 섭외에 열 올리고 그 광고가 드라마 안까지 침투한 지 오래다. 아니, 아예 제작비 지원을 명목으로 간접광고로 들어온 상품이 드라마 전체를 잡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드라마, 시트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엔딩을 선사한 MBC <지붕뚫고 하이킥>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짜 주인공은 신세경과 최다니엘이 아니고 '카페00'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드라마 몰입도를 방해하는 지나친 PPL에 대한 시청자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드라마들은 PPL에 대한 깊은 애정의 끈을 놓지 못한다. 그들 또한 좋아서 주인공이 죽는 장면에 '오렌지 주스'를 넣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렌지 주스 홍보에 들어가는 3억 원을 위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이미 작가에 의해 완성된 대본까지 통편집, 수정할 수 있는 게 드라마의 세계다. 작품의 완성도는 차후의 문제다. 시청률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드라마의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대본을 발로 썼나?"라는 시청자들의 따끔한 지적보다, 제작비용도 제대로 건지지 못할 것 같은 저조한 시청률이다.

SBS 새월화 드라마 <드라마의 제왕>의 주인공 앤서니 김(김명민 분)은 드라마 성공률 93.1%를 자랑하는 드라마 외주제작사 제국 프로덕션 대표다. 수준 낮은 드라마는 참아도, 돈이 안 되는 드라마는 절대 참을 수 없다는 앤서니 김은 한류 열풍의 수혜를 톡톡히 입은 화려함의 정점을 찍는 사나이다. 2002년 월드컵, 2008년 한미 FTA 반대 집회 등 사회적으로 굵직한 이슈가 있지 않는 이상 그의 손을 거쳐간 작품은 모조리 성공시키는 앤서니 김은 방송국 드라마 국장들조차 벌벌 길 수밖에 없는 강렬한 절대 반지다.

하지만 앤서니 김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제국의 영광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쪽대본과 열악한 촬영환경에 시달리는 수많은 스태프들이 있었다. 회당 몇천만 원은 기본으로 받는 한류 스타님들과는 달리, 대다수 스태프들이 드라마 촬영으로 벌어들이는 액수는 한류스타들이 회당 받는 액수만도 못하다. 앤서니 김이 제작하는 드라마 <우아한 복수> 대본을 맡은 홍작가 보조 작가로 일하는 이고은(정려원 분)은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앉은 퀭한 눈으로 각종 업무에 시달리지만 은행 대출로 쪼들리는 생활고를 해결해야 한다.

드라마의 제국에서 극과 극의 대척점에 서있는 앤서니 김과 이고은이 만난 것은 역시나 '돈'과 '드라마' 때문이다. <우아한 복수>의 마지막 회 방영을 불과 몇 시간 남겨두지 않는 촉박한 시점, 엔딩 장면에서 PPL로 협찬 받은 '오렌지 주스' 문제로 홍작가와 설전을 벌이던 앤서니 김은 대신 보조작가인 이고은에게 다음 작품 드라마 작가로 데뷔시켜주겠다며, '오렌지 주스'와 어울리는 엔딩으로 수정할 것을 요청한다. 홍작가가 대본 수정하러 오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앤서니 김의 과도한 뻥이 있었지만, 앤서니 김의 작가 데뷔 제안에 고은도 솔깃할 수밖에 없다. 결국 앤서니 김의 뜻대로 오렌지 주스가 들어간 엔딩은 성공리에 촬영을 마쳤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제 시간에 무사히 방송국에 테이프를 전달할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앤서니 김은 촬영장 근처에서 퀵서비스로 대기하던 사나이에게 수고비로 천만 원을 줄 테니 대신 1시간 안에 마지막 엔딩 테이프를 서울의 방송국으로 운반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퀵서비스를 믿을 수 없었던 앤서니김은 고은을 대동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뒤를 따라 나선다. 아니나 다를까, 무리하게 서울로 향해 달려간 퀵서비스는 결국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앤서니 김이 챙기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그의 품 안에 있는 마지막 엔딩 촬영본이었다.

작품을 위해 아버지도 버려야 한다는 철학으로 드라마에 임했던 앤서니 김의 93.1% 흥행불패 영광 뒤에는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숨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PPL로 자신의 작품을 망치기 싫었던 작가의 불타는 예술혼도, 앤서니 김의 거짓말과 작가 데뷔를 위해 스승을 배반하고 앤서니 김의 부탁을 들어준 보조작가의 순수한 꿈도, 1000만 원 더 벌겠다고 사지의 길로 뛰어든 한 집안의 가장도, 모두 앤서니 김의 드라마 욕심으로 물거품이 되고야 말았다. 단순히 돈으로 보상될 문제가 아니다. 성공을 위해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앤서니 김의 주변은 당연히도 적으로 채워져 있다. 단지 앤서니 김의 돈 냄새를 맡고 꼬리 흔들고 달라붙어 있을 뿐. 지금까지는 제국 프로덕션 앤서니 김 황제의 충실한 2인자인 오진완(정만식 분)도 기회가 되면 언제라도 앤서니 김의 등에 비수를 꽂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의 희생으로 앤서니 김은 막판 시청률 30.1%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앤서니 김은 흥행 불패의 신화를 이어나가게 되었지만, 그의 성공을 위해 죽어나간 퀵서비스 기사에 의해 잃어버린 '절대반지'는 앞으로 만만치 않은 고행을 치르게 될 앤서니 김의 순탄치 않은 운명을 예고한다. 실제로 앤서니 김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다가 죽은 퀵서비스 기사의 소식은 일파만파 퍼졌고, 앤서니 김의 제국은 오랜 영광에 제대로 금이 갈 위기다. 여기에 오랫동안 앤서니 김에게 칼을 갈던 오진완은 그를 배신할 만발의 준비를 마친 지 오래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애꿎은 가장까지 죽음으로 내몬 앤서니 김의 몰락은 자업자득, 인과 응보다. 하지만 <드라마의 제왕> 1회 만에 그토록 사랑하던 '오렌지 주스'와 함께 무너진 앤서니 김의 몰락이 통쾌하다기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는 것은 무엇일까.

퀵서비스 기사가 천만 원 더 벌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기 전부터, 앤서니 김은 드라마 성공을 위해 이미 자신의 영혼을 돈에게 팔아버린 지 오래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보다 강한 독설을 뿜어내고 과도한 돈 욕심을 드러내는 앤서니 김 캐릭터는 오히려 돈을 무지하게 밝힌다는 그 점에 있어서 강마에보다 현실적이고도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로 인해 기본적인 사회 질서까지 흔들리는 시대. 정상적인 루트로는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려운 현실에서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해 절대 반지 대신 돈을 좇는 골룸이 되어버린 앤서니 김의 인생역경을 단순히 가상의 드라마 외주 업계 사장의 이야기로만 국한할 수 없는 이유다. 믿고 보는 김명민에, 드라마뿐만 아니라 극도로 자본화된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흥미로운 대본과, 짜임새 있고 속도감 있는 연출까지. 간만에 또 본방사수하여 볼 만한 드라마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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