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하던 연애시절, 혹은 신혼의 단꿈이 증발하고 남은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로 묶인 형식적인 결혼 생활이거나 혹은 애증의 시간이 아니던가. 하지만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타파하기 위해 부부생활 가운데 일탈을 꿈꾸는 이들도 있다.

<포 러버즈>는 부부의 일탈 가운데서도 최고의 일탈이라 할 수 있는 스와핑을 묘사한다. 단, 이 일탈에는 감정이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살을 섞어도,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키스해도 ‘쿨’할 수 있어야 하는 냉정함이 유지되어야만 스와핑을 유지할 수 있다.

처음엔 이들의 스와핑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배우자로부터는 찾을 수 없는 새로움과 짜릿함을 상대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스와핑에 ‘감정’이 개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쿨’함은 증발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배우자와 같이할 때만큼은 배우자에 충실해야 한다. 헌데 배우자 대신에 스와핑의 상대를 떠올린다는 건 감정의 개입이라 할 수밖에 없다. 감정의 개입이라는 차원은, 지금의 배우자 대신에 그 혹은 그녀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과도 연결되는 심각한 차원의 문제와 직결된다.

<포 러버즈>는 설렘을 찾기 위하여 배우자가 아닌 스와핑 상대를 찾다가 어느새 스와핑의 상대가 ‘지금의 배우자의 자리에 있었더라면’하는 미련의 감정에 치달았을 때의 위기를 신랄하리만치 보여준다. 감정이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 자리에 감정이 개입할 때 스와핑은 깨지고 마는 것이다.

이는 분명 ‘미련’이라는 감정이다. 스와핑의 상대를, 결혼 배우자를 물색할 젊은 시절에 찾았더라면 지금의 결혼 생활은 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 말이다. ‘미련의 감정은 지금의 배우자를 스와핑 상대보다 한 단계 저열한 상대로 격하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금의 배우자감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스와핑 상대였어야 한다는 ‘미련’은 또 다른 역설을 낳는다. 만일 타임머신이 나오기라도 해서 지금의 배우자보다 나아보이는 스와핑 상대와 결혼했다고 치자. 신혼까지는 배우자로부터 느끼지 못한 새로움을 하나 가득 만끽하고 행복에 겨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설렘의 감정이 휘발한 다음에는? 제아무리 스와핑 상대와 결혼했다 한들 결혼의 권태기는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거나 아니면 스와핑 상대와 결혼했더라도 신혼의 짜릿함이 증발한 이후에 겪는 권태기는 정녕 피하지 못하리라.

<포 러버즈>는 결혼의 권태기를 탈출하기 위한 위험한 일탈 가운데서 생겨나는 ‘미련’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두 부부를 일상으로 돌려놓는지를 과격한 영상 일탈의 방식이 아닌 차분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포 러버즈>는 현재의 배우자가 채워주지 못하는 권태를, 제아무리 스와핑의 상대라 할지라도 결코 채워주지 못한다는 ‘오브제 쁘띠 아’의 역설을 보여주는 프랑스 영화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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