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나-들> 창간호 표지

공지영의 쌍용자동차 이야기 <의자놀이>에 관한 보도에는 곤혹스러움이 존재한다. 먼저 이 책의 저술 자체가 저자의 재능기부이며, 책의 판매를 통한 쌍용자동차 문제에 대한 홍보 역시 저자의 적극적인 활동에 기대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다른 한편 <의자놀이>의 저술을 둘러싼 논란을 저자 자신이 깔끔하게 매듭짓지 못한 채 논란의 당사자들과 화해하지 못했다는 문제도 있다.

<의자놀이> 1판의 22페이지에서 24페이지 서술을 둘러싼 논란과 평가에 대해 미디어스는 사건 당시 긴 기사를 통해 정리했다. (상편, 하편) 그리고 공지영은 드러난 문제에 대해 사실상 논란 당사자들이 하지도 않은 말로 그들의 시기심과 질투를 비난하는 ‘사과 아닌 사과’ 이후 그들에 대해 어떠한 접근도 하지 않았다. 또 실수에 사과했던 출판사 편집부는 이어지는 논란에 저작권 전문가의 ‘표절이 아니라는 소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논란 당사자인 하종강과 이선옥은 트윗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 외엔 어떠한 추가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나 주변에서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라는 압력을 받았다.

<의자놀이>가 작가의 이름값에 기댔을 뿐 부실한 작품에 불과하다면 논란이 조금은 더 깔끔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혹자는 <의자놀이>가 제대로 된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비판하지만 이 작품의 호소력은 역설적으로 이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설은 한겨레21 927호(2012.9.10)에 실린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이러한 평가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문학평론가가 공지영의 르포 <의자놀이>(휴머니스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렇긴 해도, 이 텍스트의 ‘다급하고 절실한 취지’에 대해서는 많은 지지가 쏟아지고 있으니, 이 르포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논평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 논평들을 모아본다면 아마 ‘르포문학’으로서의 이 책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것이다. 르포문학의 힘은 무엇보다도 해당 사건의 본질을 누구보다 더 깊게 알고 있는 저자의 강력한 텍스트 장악력에서 나온다. 공유된 사실에서 미답의 진실을 끌어내는 힘 말이다.

이 책에 그것이 있는가? 충분하지 않다. 이 책의 저자는 해당 사건에 대해서 이 세상 누구보다 깊게 알고 있는 이의 자신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는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을 것이다. 책에 밝힌 대로라면 저자가 쌍용차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1년 겨울 어느 날’이다. 반년 남짓한 기간 동안 취재와 집필이 모두 완료됐다. 그만큼 다급했을 것이다. 그러니 6년 동안 쓰인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나 인터뷰에만 1년이 걸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같은 책들을 기준으로 이 책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그 대신 저자는 자신의 무지를 솔직히 고백하고, 인용에 기꺼이 의지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진솔하게 아연해하고, 혹자들은 감상적이라고 할 만한 문장들을 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런 단점들이 오히려 이 책의 장점이 되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수많은 분이 함께 만들었다”는 저자의 말은 겸손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지만, 이 책을 끌고 가는 겸허한 목소리는 확실히 이 작가의 것이다. 이 목소리가 르포에 대한 독자들의 부담감을 눅이는 데 성공했다. 저자의 이름값만으로 책이 이렇게 팔리지는 않는다.

부기. ‘인용 논란’도 이 책의 이런 독특한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책 후반부에 출처가 있으니 도용 운운은 당치 않지만, 유독 그 한 부분만 본문 내의 출처 설명이 빠져 문장의 주인이 헷갈리게 됐다. 독자의 ‘감정의 흐름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다던가. 촉박하게 쓰인 탓에 르포로서의 밀도가 옅은 원고에 힘을 싣기 위해 정서적 울림을 높이려고 했으리라. 이 선택에 악의가 있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 선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점을 되풀이 지적하는 일로 이 소중한 책에 대한 다른 모든 토론을 대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공지영 첫 르포르타주 <의자놀이>의 표지

<의자놀이> 논란의 당사자인 하종강과 이선옥을 비판했던 이들은 신형철의 이 글도 자신들의 비판을 지지한다 보았다. 그러나 “이 점을 되풀이 지적하는 일로 이 소중한 책에 대한 다른 모든 토론을 대체할 필요는 없을 것”이란 서술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한 가지 해석은 ‘이 점을 되풀이 지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하종강과 이선옥을 비판했던 이들이 취하고 싶었던 바일 것이다. 또 하나 가능한 해석은 ‘이 점을 되풀이 지적하는 일’이 <의자놀이>에 대한 모든 토론에 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후자처럼 생각하는 것이 사리에 부합한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문제는 하종강과 이선옥이 ‘이 점을 되풀이 지적하는 일’에 나서지 않은 가운데 공지영 소설가의 이 사건에 대한 해명만이 거듭 매체를 통해 전송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공정하지 않으며, <의자놀이>의 판매와 쌍용자동차 문제의 해결을 위해 조용히 논란을 삼켰던 하종강과 이선옥에겐 견디기 힘든 일이다. 또한 공지영 작가의 표명된 입장 자체가 폭력적이기도 했다.

공지영 작가가 ‘<의자놀이> 논란’ 이후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격주로 실리는 한겨레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에 인터뷰가 실리면서부터다. 공작가는 한겨레 지난 13일자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의자놀이> 논란에 관해 “논란 아니에요. ‘논란’이라는 표현은 저에게 상처예요. 소란이 맞지 않나요? 전혀 문제될 이유가 없었어요. 저의 트위터가 감정적 대응이었다는 점은 인정해요”라고 말했다. 생각이 다르고 이해가 안 갔다 해도 상대방의 문제제기를 ‘논란이 아닌 소란’으로 취급한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 지난 13일자 한겨레 14면 기사

곧이어 새로 창간되는 인물중심 월간지 <나-들>이 ‘3차원 인터뷰’의 첫 인터뷰이로 공지영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겨레가 얼마 전 논란을 일으킨 공지영에게 계속해서 발언권을 주는 것이 결국 일방적인 편들기가 되지 않겠냐는 우려였다. 공지영이 표지인물이 되고 “공지영, 낮은 데로 임하는 문화권력”이 표지카피가 되자 우려는 커졌다. ‘문화권력’이란 말 자체가 ‘<의자놀이> 논란’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어휘였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나-들> 홍보를 위해 공지영 인터뷰 ‘풀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문제는 급기야 폭발했다. 물론 ‘풀 동영상’에도 편집이 없지는 않았지만, 공개된 영상에선 공지영이 이 사안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깔깔대고 인터뷰어가 이에 동조하는 장면, “내가 그걸 베낄 만한 문장이 전혀 아니고"라며 이선옥의 문장을 평하는 장면, 하종강과 이선옥이 ‘5만부 전량 회수’를 요구해서 분노했다는 얘기 등이 가감없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의자놀이> 논란’에서 공지영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은 한겨레가 ‘문화권력’의 일방의 주장을 대변하며 상대적으로 약자인 하종강과 이선옥을 깔아뭉개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논란이 커지자 <나-들>은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사과하고 한겨레는 문제가 된 동영상을 재편집하여 다시 올린 상태다.

▲ 월간 <나-들> 공식계정은 위와 같은 사과문을 올렸다.

다시 한번 공지영의 해명을 평하자면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다. 소설가 공지영이 르포작가 이선옥의 문장을 탐해서 표절을 저질렀으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문제가 된 <의자놀이>의 1판의 22페이지에서 24페이지와 2판의 해당 부분 서술을 비교해보면 1판 쪽이 더 나아보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직접 취재를 하고 조심스레 문장을 고른 쪽과 해당 부분에 논란이 생기자 하룻밤 만에 같은 흐름의 서술을 ‘이선옥의 문장만을 피해서’ 서술한 쪽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공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공지영은 이 부분에 대해 “제 글이 더 나은듯 슝===3”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2판은 그런 정도의 수정을 하면서 출처 및 참고자료에서 하종강 칼럼을 뺐고 말미에 그 사정을 간략하게 기록했다. 또 그녀는 ‘5만부 전량 회수’에 분노했다 주장했지만 두 사람의 첫 번째 이 메일은 “배포된 책은 가능한 한 회수”를 요구조건으로 말했으며, 그나마 이 요구조건은 공지영으로부터 어떠한 답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출판사 측의 읍소로 철회되었고, 당시 찍은 책은 3만부였던 상황이다. 공지영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기보다는 기억의 재구성이 이루어졌다 볼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이 시기심을 가지고 문제제기를 했다는 ‘틀’로 재구성하다 보니 사실에 어긋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입장을 일방적으로 전송하면서 하종강과 이선옥의 명예를 훼손한 꼴이 된 한겨레와 <나-들> 측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실수가 있었지만 오해’라는 것이다. <나-들>은 ‘3차원 인터뷰’ 공지영 편이 한겨레 토요판 김두식 인터뷰와의 사전교감 없이 독립적으로 진행된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해당 인터뷰가 공지영의 입장만을 대변하기 위해 기획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나-들>을 뜯어보면 ‘3차원 인터뷰’는 인터뷰에 대한 나름의 문제의식이 있는 꼭지다. 안영춘 <나-들> 편집장은 ‘3차원 인터뷰’ 도입에서 “말로 대답한 이(인터뷰이)가 ‘저자’이고, 정작 글로 쓴 인터뷰어는 ‘엮은이’로 표기” 되는 “요즘 몇몇 베스트셀러 인터뷰집”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지승호가 김어준을 인터뷰했지만 김어준 저, 지승호 엮음으로 나온 <닥치고 정치>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안영춘 편집장은 이 도입에서 "‘3차원 인터뷰’는 기존 인터뷰 형식을 벗어나 상호 주관적인(Intersubjective) 성격을 적극 드러내는 실험이다. 복수의 인터뷰어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통해 인물은 훨씬 풍부하면서도 정교하게 재현될 수 있을 것”이라 설명한다.

▲ 월간 <나-들> 78페이지 '3차원 인터뷰' 도입의 텍스트 부분

손아람과 김용언 두 인터뷰어의 결과물에 대한 평은 독자들에게 돌리면 될 것이다. 그런데 ‘3차원 인터뷰’란 꼭지의 특징은 인터뷰 기사 뒤에 다른 이들의 평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 뒤엔 안영춘 <나-들> 편집장의 “꾸밈의 진솔함에 맥없이 끌리다”와 이재훈 <나-들> 기자의 ‘<의자놀이> 논란’에 대한 평인 “진정성으로 매듭을 풀 수 있을까”가 실려 있다. 안영춘 편집장의 글은 386세대의 특징 속에서 공지영을 파악하는 것으로, 인터뷰어들이 공지영보다 젊은 세대란 것을 배려한 것으로 읽힌다. 한편 이재훈 기자의 글은 인터뷰에서 공지영의 입장이 ‘일방적으로’ 옹호된 상황에서 다소나마 균형을 맞추기 위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이재훈 기자의 글 중엔, “공지영은 <나·들>과의 인터뷰에서 이 ‘예외적 인용’에 출판사와 더불어 자신의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출판사가 <의자놀이>의 여러 인용 부분을 본문보다 활자 크기를 작게 조절한 것과 달리 유독 이 부분 인용에서만 같은 본문 활자를 쓰는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지영은 ‘최종 수정 단계에서 나도 이게 내 글인 줄 알고 문장을 좀 고쳤어요. 활자 크기가 달랐으면 남의 글이라는 긴장감 때문에 (조심했을 텐데) 그건 내 실수죠’라고 했다”는 부분이 있다. 이 사실인정은 손아람과 김용언의 기사에선 소개되어 있지 않다. 두 사람의 인터뷰는 ‘<의자놀이> 논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공지영에 대한 것이었던 만큼 이 내용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인터뷰에 공지영의 주장만이 소개되었기에 이재훈 기자가 그 부분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글을 쓰게 된 상황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이 '사실인정'은 꽤나 의미가 있다. 출판사 측은 그동안 의자놀이 공식계정에서나 2판의 참고자료의 고지에서나 '출처를 알 길 없었기에 이선옥의 글임을 표시하지 못했고 그 사실에 대해 하종강과 이선옥의 항의가 있어 뺀다'라는 정도의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렇기에 '본인의 칼럼에 그것이 이선옥의 글을 활용했음을 애초에 쓰지 않은 것은 하종강인데 왜 하종강을 인용한 공지영에게 책임을 무느냐'는 반론이 자동적으로 따라나왔다. 진중권을 위시한 무수한 사람들이 쓰던 방식이다.

그러나 <의자놀이>의 서술은 설령 이선옥의 건이 개입되지 않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신형철이 "유독 그 한 부분만 본문 내의 출처 설명이 빠져 문장의 주인이 헷갈리게 됐다. 독자의 ‘감정의 흐름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다던가. 촉박하게 쓰인 탓에 르포로서의 밀도가 옅은 원고에 힘을 싣기 위해 정서적 울림을 높이려고 했으리라. 이 선택에 악의가 있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 선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있다"고 말한 그 부분이다. 신형철의 서술조차도 '출처 설명이 빠'졌다고만 했을 뿐 가필 부분은 적시하지 않았다.

물론 가필 문제는 공지영이 언급했듯 단순실수일 것이다. 다른 이의 글임을 표시못한 편집자의 실수에 자신이 쓴 글과 인용한 글을 알아보지 못한 공지영의 실수가 겹친 것일 게다. 그리고 출판사 측이 이 문제를 교묘하게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하종강과 이선옥이 최초의 메일과 그후의 대응 등에서 이 문제를 정교하게 지적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익스큐즈' 되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사과'를 해야 할 텐데,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공지영이든 출판사든 말이 없었다. 그저 옹호자들이 사과도 해명도 없었던 그 건에 대해 '별 일도 아닌데 익스큐즈 하라!'고 외쳐왔을 뿐이다. 출판사는 문제를 회피했고 공지영은 그와 상관없이 두 사람의 문제제기를 불순한 의도로 파악했다. 버스에서 발을 밟은 정도의 실수라도 일단 사과는 하고 상대방의 과도한 대응이 있다면 불만을 표하는 법이다. 이 건에 대해 공지영은 말한 적이 없고 출판사는 말로는 하종강과 이선옥을 어떻게 달랬는지 모르겠으나 계정과 2판의 설명에선 잘못을 적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태를 덮지 않은 하종강과 이선옥에 대해서 불만을 터트렸던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다.

이쯤에서 다시 <나-들> 얘기로 돌아오자면, 기획의 전반적인 균형과 별개로 한겨레의 최초 동영상 공개는 명백한 실수다. <나-들>이 애초 ‘노이즈 마케팅’을 의도했거나, 혹은 <나-들> 편집부의 인식과는 별개로 한겨레 측의 이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시선이 공지영 측에 편중되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나-들> 측 관계자는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한 관계자는 “영상팀과 편집부의 소속이 다른데, 영상팀이 ‘<의자놀이> 논란’에 대한 인지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영상을 만들었고 이를 마감에 몰두하던 편집부에서 미처 다 검토하지 못하고 ‘오케이’하여 문제가 생겼다”라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나-들>의 작업 중 일부는 한겨레의 다른 부서의 지원으로 이루어진다. 영상촬영도 그런 경우라 사과문에선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책임전가를 하는 것인 것 같아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 월간 <나-들> 85페이지에 실린 인터뷰어 두 사람(손아람, 김용언)과 인터뷰이(공지영)의 모습

이에 대해 미디어스 측에서 안영춘 <나-들> 편집장을 접촉한 결과 안영춘 편집장은 “애초 이 기획에서 우리가 가장 중시했던 건 지금까지의 인터뷰가 인터뷰이에게 전적으로 발언권을 주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주관적 연출이 교묘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드러내면서, 상호주관성의 메타 메시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라고 글에서도 썼던 ‘3차원 인터뷰’의 취지를 설명한 이후 “그런데 영상에서 우리 스스로 그 문제를 재현하는 결과를 낳았다”라고 자성했다. 그는 “무엇보다 영상 문법이 갖는 민감한 특성을 제대로 고민하지 못한 결과다. 구체적 경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편집장의 책임이고, 실수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전했다.

한겨레만 공지영을 인터뷰하려는 것이 아님은 지난 28일자 경향신문 인터넷판에도 지승호의 공지영 인터뷰가 실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인터뷰 기사에서 ‘<의자놀이> 논란’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지 : <의자놀이> 논란이 있은 후 20일 정도 트위터도 끊고, 공식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잖아요.

공 : 저술로 인해서 몸이 쇠약해져 있으니까 마음이 통제가 안 되더라구요. 우리끼리 치고 박고 미움이 전도되는 것이 힘들었어요. 여기서 일단 어떤 방식이든 내가 중단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 다 끊어버렸죠. 한 20일쯤 됐을 때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의자놀이> 판매가 하강곡선을 긋는 거야, 그래서 추석 전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보너스 같은 것을 가져갈 수 있게 해줘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용감하게 나갔죠. 뭐라고 하든 간에. 딱 그 생각만 했어요.

공지영이 진보언론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최근 누적 판매 1천만부 작가가 되어 화제가 된 데에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도가니> 등의 사회문제에 접속한 소설 이후 르포르타주 <의자놀이>까지 발간하면서 공적 활동이 정점에 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활동이 특히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를 통해 ‘<의자놀이> 논란’과 관련하여 많은 진보진영의 명망가들이 그녀를 옹호하게 된 현실을 두고 희망버스 이후부터 나온 ‘노동 없는 노동운동’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도 현실이다.

‘노동 없는 노동운동’이라는 조어는 <자음과 모음>R 편집위원 박권일의 것인데, 사안에 대한 비평일 뿐 비판은 될 수 없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노동운동이 노동자 주체성을 통해 발현되지 않고 소비자 정체성을 가진 명망가와 시민들의 지원에 의해서야 힘을 발휘하게 된 현실은 지원하는 명망가와 시민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노동운동 자체의 무력화에 큰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공지영이나 촛불시위 직후 진중권의 지적처럼 노동자가 소비자를 이해해야 하는 만큼이나 소비자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노동자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사실 우리 모두는 노동자이면서 소비자인데다가, 적어도 서로를 대등한 주체로 여겨야 연대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지영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가장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면서도 특정한 누군가에겐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곤혹은 ‘좌파들이 공지영을 시기하여 운동판에서 쫓아내려고 한다’는 날조된 서사를 그녀 스스로의 결단으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하종강과 이선옥과의 대등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만 풀릴 수가 있다. 미디어스의 확인 결과 논란의 당사자인 하종강과 이선옥은 침묵을 풀고 복수의 매체와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한다. 공지영의 현명한 결단이 필요한 때다.

▲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가 24일 오전 덕수궁 앞에 마련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단식 농성현장을 찾아 김정우 지부장으로부터 "의자놀이" 책을 받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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