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개봉한 영화 <용의자X>의 스포일러는 불행히도 너무나도 유명한 원작과 그 원작을 동명 영화로 만들어낸 <용의자 X의 헌신>이다. 일본 추리 소설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 스스로가 인정하는 최고의 걸작이자, 국내에서도 개봉되어 호평받은 영화. 그럼에도 원작이 주는 극적인 요소에 끌려 다시 영화로 만들겠다면 원작과의 차별화를 위해 상당히 많은 고민을 요할 것이다.

방은진 감독에 의해서 재해석된 <용의자X>는 원작의 핵심이자 최대의 볼거리인 수학자와 물리학자의 대결을 과감히 생략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원작에서는 겉절이에 불과했던 수학자의 ‘헌신’을 채워넣는다.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기 한 몸을 바치는 남자의 순정. 여전히 순애보적인 멜로가 강세인 대한민국에서는 머리 아픈 추리나 수사보다는 확실히 매력적인 요소임이 분명하다.

영화의 기본 골격은 원작에 충실한 편이다. 수학자가 지키고픈 여인의 범행 동기, 범행을 은폐하는 방법 등은 이미 원작에서 완벽히 설명해놨기 때문에 더 이상 손볼 것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용의자X>에서 주안점 둔 요소는 어떻게 문제를 푸는가가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고픈 남자의 헌신이다.

원작에서처럼 주인공 석고(류승범 분)은 수학 선생이다. 한때 천재 소리 들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수학 교사일 뿐인 석고는 옆집에 살고 있는 화선(이요원 분)을 짝사랑한다. 원작과 달리 딸이 아니라 조카와 살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화선은 도시락 가게에서 일하는데, 석고는 매일같이 화선이 일하는 가게에 들러 도시락을 산다.

그러던 어느 날 화선의 전 남편이 화선의 집에 들이닥치고, 전 남편의 횡포에 참을 수 없었던 화선과 조카는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한다. 전 남편의 시체를 보고 망연자실하고 있던 화선. 이때 화선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석고, 그리고 석고는 화선을 위해 웬만한 사람을 풀래야 풀 수도 없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설계한다.

화선의 전 남편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민범(조진웅 분)은 동물적 감각을 발휘히여 단박에 화선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하지만 화선에게는 석고가 세워놓은 정교한 알리바이가 있다. 그런데 <용의자X>에서는 수학자와 대적할 만한 물리학자를 과감히 삭제한 대신, 형사인 민범에게 물리학자가 수행할 역할을 몰아준다. 심지어 석고 동창 역할까지 말이다.

그러나 민범은 동물적 감각만 앞서는 형사일 뿐, 물리학자처럼 두뇌 회전이 좋지도 치밀하지도 않다. 때문에 석고와 민범의 대결은 팽팽하기보다 어설프기 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용의자X>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보다 인간의 미묘한 감정과 심리에 초점을 맞춘 영화이다. 계획적으로 석고를 따라 들어간 화선의 가게에서 석고와 화선의 수상한 점을 눈치 챈 민범은 석고의 행적을 조사하고 그 결과 본인도 인정하기 싫은 엄청난 진실과 맞서게 된다.

이미 <용의자X>의 원작에 자세히 그려져 있듯 석고가 화선을 위해 벌인 행각은 더 이상 놀라운 반전이 아니다. 대신 <용의자X>는 자신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화선을 지키려고 했던 석고의 ‘헌신’을 클로즈업한다.

평생 연구하던 수학 문제가 풀리지 않아 낙담한 채로 매일 죽음만을 생각했던 석고에게 어느 날 따사로운 햇살처럼 다가온 화선은 삶의 의지를 재확인시켜준 은인이다. 석고는 화선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다. 석고 스스로가 화선과 같은 아름다운 여인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과분한 사치로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을 뿐. 그녀 옆에 자신이 아니라 다른 남자라도 상관없었다. 자기보다 더 근사하고 멋진 남자라면 진심으로 화선과 잘 되길 축복해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석고는 화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 민범의 말대로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아무런 사이도 아닌, 그저 짝사랑하는 여인임에도 석고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나마 원작보다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은 석고와 화선의 관계이다. 그저 이웃집 사는 관계, 매일 아침 도시락 가게에서 만나는 점원과 고객이었을 뿐인 원작과는 달리, <용의자X>는 살해 사건 전에 두 남녀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있었고, 두 남녀가 연인으로 진전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였다. 때문에 끝까지 화선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한 석고, 그리고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벌인 석고의 비밀을 알게 된 화선의 눈물은 원작에서보다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원작의 핵심요소인,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를 두고 대결을 벌이는 수학자와 물리학자의 치열한 두뇌 대결에 열광했던 사람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영화 전개 자체와 남녀 간의 멜로만 놓고 보면 만족할 수 있는 <용의자X>. 촉망받는 배우에서 충무로가 주목하는 여성 감독으로 인정받은 방은진의 연출력도 반갑지만, 한 여자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순정남 류승범의 연기 변신이 놀랍다.

한 줄 평: 류승범의 헌신이 살린 무늬만 미스터리 ★★★☆

연예계와 대중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자합니다.
너돌양의 세상전망대 http://neodol.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