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사장과 한국언론재단 일부 이사들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노골적인 사퇴 압력이 가관이다. 이들 언론 유관기관이나 단체 뿐 아니라, 정부투자기관이나 각종 위원회도 마찬가지다.

법규에 의해 엄연히 임기와 신분이 보장된 사람들을 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쫓아내려는 것은 월권이며 횡포다. 권력의 이런 횡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사퇴 압력에 대응하는 기관·단체장이나 위원들의 태도다.

한 부류는 사퇴 압력에 쉽게 굴복하거나 아예 자발적으로 사표를 던지고 떠났다. 또 한 부류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소신을 바꾸면서까지 알아서 기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정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직분과 소신에 충실한 부류도 있다.

물론 이 세 가지 부류의 경계가 뚜렷한 것도 아니고, 딱히 이 속에 포함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대체로 그렇더라는 것이다.

정권 초월해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 서울 여의도 KBS 본관. ⓒ미디어스

어떤 게 가장 바람직한 태도인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사퇴 압력을 받는 사람들은 노무현 정권 시절 임명됐고, 이들 중 상당수는 이른바 개혁 또는 진보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어차피 앞 정권과 코드가 맞아 임명된 사람이라면, 코드가 전혀 다른 새 정권에 구차하게 붙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선 훌훌 털고 떠난 사람들이 멋있게 보인다.

하지만 정권을 초월하여 꼭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다르다. 이런 경우 그렇게 훌훌 떠나버리는 건 무책임한 처사일 수 있다. 잘못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이나 언론 자유를 지켜내는 일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나는 김금수 KBS 이사장의 사퇴에 깜짝 놀랐다. 정권이 바뀌었을 때 바로 떠났다면 차라리 그를 이해하려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꿋꿋이 자리를 지키던 그가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시도가 노골화한 지금 왜 갑자기 사퇴했을까?

< 미디어스 > 보도에 따르면 김 이사장은 "본인과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만남을 가졌는데 그 내용이 보도되면서 신의가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그 내용이 확대되는 것에 책임을 진다"고 사퇴 이유를 밝혔단다.

문제가 된 두 사람의 만남에서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 하락이 방송 때문이며, 그 원인 중 하나가 조기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 때문'이라고 말했으며, 이에 대해 김금수 이사장은 '정연주 사장을 사퇴시키고자 한다면 무언가 명분이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한국방송 이사회로 하여금 방송법에도 없는 사퇴 권고 결의안을 내게 하는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입장을 냈다고 한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정권의 부당한 압력과 공작을 폭로하고 규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들통났다는 이유로 사퇴한다니, 정말 그가 내가 알던 '진보인사 김금수' 맞나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껍데기 진보 가려낼 절호의 기회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최시중 위원장은 김금수 이사장과도 서울대 상대 동기동창으로 오랜 친구 사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론 두 사람이 살아온 길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런 친구에게 단지 '신의없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 때문에 사퇴했다면 그가 지금까지 지켜온 진보적 가치는 모두 뻥이었다는 말인가. 그런 이유로 방송의 독립을 지켜야 할 KBS 이사장직을 사퇴해버렸다면, 앞으로 그로 인해 방송독립과 언론자유가 훼손된 데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책임질지 궁금하다.

이처럼 바깥에서는 강인한 투사로 비춰졌던 진보인사가 막상 정권 품 속에 들어가 관직을 맡은 이후부터 형편없이 유약한 모습을 보인 예는 과거에도 많았다. 다만 노무현 정권 때 임명됐던 이른바 진보인사들이 이명박 정권의 사퇴 압력에 대응하는 모습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직 떠나지 않고 붙어 있는 사람들은 많다. 적당히 소신을 굽히고 살아남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김금수처럼 유약한 모습으로 사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정권의 부당한 압력에 맞서 끝까지 싸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눈여겨 보고 확실히 기록하자. 이거야말로 껍데기 진보를 가려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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