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페이스북 사용자가 올린 사진. 새누리당이 내건 빨간 현수막에 '비정규직 차별금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경제민주화 이슈가 18대 대선의 주요 쟁점이 되면서 과거에는 ‘좌파’들이나 했을 법한 주장들이 여의도를 수놓고 있다. 심지어 노동 문제에 의도적으로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새누리당조차도 “비정규직도 차별 없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야권 주자인 민주통합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두 대선 후보의 노동 정책에는 별다른 차별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높다.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는 구호가 아닌 구체적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만 ‘문-안’ 두 후보 모두 뚜렷한 무엇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민주화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동’ 이슈에서 두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 비해 얼마나 진일보한 입장과 비전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봤다.

문재인 안철수, 노동 관련 행보의 아쉬움

지난 18일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 캠프는 선대위 산하에 노동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문재인 캠프 노동위원회의 이용득 위원장은 출범사를 통해 “세 대선 후보 캠프에서 노동위원회가 독립적으로 설치된 곳은 문재인 캠프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대북정책과 한반도 문제에 이어 노동정책에서는 확실히 민주통합당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다짐이자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앞서, 문재인 후보는 지난 9월 21일 쌍용자동차 해고자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방문해 해고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와 이용득 노동위원회 위원장 등 참석자들이 18일 오후 서울 대방동 공군회관에서 열린 민주캠프 노동위원회 출범식에서 승리를 다짐하고 있다.ⓒ연합뉴스

하지만 이런 행보에도 불구하고 문 후보의 노동 정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참여정부의 ‘반 노동자 정책’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그래서 문 후보의 노동관이 참여정부의 그것을 그대로 승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우려는 지난 9월 17일 문 후보가 일자리 관련 각계 대표 간담회에 참석했을 당시 “노동계에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노동시간 단축, 사측의 고용 확대 등을 주문하는데 이는 기업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은 데서도(관련 기사) 확인된다. 문 후보의 노동 정책이 모호한 방향을 갖고 있단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의 경우 더욱 상황이 심각하다. 안 후보는 지난 7일 정책비전 선언문에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목표로 정부와 공공기관들부터 원칙을 지키겠다”고 발언한 것이 사실상 출마 선언 이후 처음으로 노동 정책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 지난 15일 중랑구 녹색병원을 방문해 삼성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 씨를 만나는 자리에서 “기업은 생산성 향상에만 투자하기보다는 노동자와 사람의 안전에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지만 이는 노동 정책 전반을 포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반적 원칙론의 언급한 수준이었다.

▲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공평동 선거캠프에서 고용·노동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이후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 캠프보다 늦은 지난 21일 고용노동정책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 내용에 대해 민주노총은 논평을 통해 “집단적 노사관계에 대해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로 회사와 노동자가 함께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단 한 줄로 언급한 데서 노동정책이 아예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문-안 후보의 노동 정책에 있는 것, 없는 것

두 후보에게 공통적으로 부족한 것은 정책의 ‘디테일’과 현장에 대한 ‘이해’이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현’ 등 오래 전부터 주창되어 온 그럴듯한 구호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실천적인 비전은 없다. 민주당 경선 당시 많은 호응을 받았던 ‘저녁이 있는 삶’과 같이 노동 문제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전환해가겠다는 총체적 계획이 보이지 않고, 결국 노동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전망을 내놓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당이라는 조직과 128명의 의원 그리고 집권 경험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안철수 후보보다 우위에 있는 문 후보에게 더욱 뼈아픈 지적이 될 수 있다. 참여정부의 실패 가운데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노동 부문이기에, 이 대목에 문 후보가 더 많은 투자와 극복 의지를 보여줬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 천의봉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과 울산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자 최병승 씨 등 2명은 지난 17일 사내하청노동자 전원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명촌 주차장에 있는 송전탑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연합뉴스
예컨대,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가 고공 철탑 농성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 후보는 당의 지원을 얻어 정몽구 현대차 회장에게 비정규직 노동자 탄압의 책임을 물으며 비정규직 차별 철폐에 대한 의지를 보일 수 있어야 하겠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제도적으로는 참여정부 시기 도입된 ‘비정규직 보호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독이 되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관련 법 개정을 주도할 수도 있지만 역시 추상적인 ‘비정규직 차별 철폐’ 주장만 있고 감감 무소식이다. 결과적으로 문 후보는 “참여정부는 노동 분야에 있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만 말하고 있을 뿐 그 기대를 어떻게 반영해 나갈 것인지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안 후보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얘기는 아니다. 안 후보의 경우 뚜렷하게 논해줄 만한 노동 정책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후보의 준비 부족이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특히, 노동 분야의 경우 심각한 상황이다. 안 후보는 정책의 대부분을 포럼과 논의를 통해 정해가겠단 입장인데, 노동 부문의 경우 특성상 이러한 조정이 특히 쉽지 않은 영역이란 점에서 안 후보의 노동 소외는 심각한 공백이 될 수 있다.

바보야, 문제는 ‘디테일’이야

‘디테일’의 문제는 노동 정책의 구성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인선이 문제다. 문재인 캠프 노동위원회의 인선은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재능교육 등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관통하는 장기투쟁사업 ‘현장’을 외면한 채, 상층부 노조 간부를 중심으로 짜여졌다. 이는 노동계 현장 이슈나 구체적 문제가 아닌 노조 간부의 개별적 합류를 통해 이루어진 구성이었다. 결국 선거 운동을 위한 노동계와의 교류가 아닌지 의심스런 대목이다. 지난 대선에서 한국노총은 당시 이명박 캠프와 정책 합의서까지 작성하고도 이후 몇몇이 비례의원이 되는 수준에서 사실상 ‘팽’당한바 있다. 하지만 지금 문 후보 측의 노동계 대접은 당시 이명박 후보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문재인·안철수 캠프의 몇몇 ‘문제적 인선’은 이러한 의심을 뒷받침한다. 안철수 캠프에 합류한 강승규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은 지난 2005년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 연합회로부터 수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됐던 인물이다. 뒤이어 지난 22일 안철수 후보 지지를 선언한 이용식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은 2009년에 발생한 민주노총 내부의 성폭력 사건을 무마하려다 여론의 지탄을 받고 사퇴했다. 문재인 캠프 노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된 이경훈 전 현대자동차노조 지부장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불법파견을 묵인하고 비정규직 노조의 농성 해제를 강요하면서 노동 현장에서 매우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 인사이기도 하다.

▲ 김정우(오른쪽)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20일 오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장에서 열린 국회 환노위의 '쌍용차 정리해고 관련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답변을 지켜보고 있다. 김정우 지부장은 지난 10일 쌍용차 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연합뉴스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은 “후보들은 현대차 비정규직 철탑 농성장, 김정우 쌍용차 지부장이 단식 중인 대한문 분향소, 시청역 재능교육 농성 현장 등 투쟁 현장을 찾아가야 한다”며 “제스처뿐이라는 비판을 들을지라도 대선 후보가 현장을 찾아 당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은 노동계와 노동자에게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지적하며, 두 후보의 노동 정책 행보에 아쉬움을 표했다.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 조합원인 권수정 씨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정규직 임금과 동일화하지 않고 사회통합과 복지를 이야기할 수 없다”며 “법 앞의 평등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법 앞의 평등’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힘 있는 자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현실조차 타개하지 않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외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두 후보의 주장이 공허하다고 꼬집었다.

안타깝게도 민주정부 하에서도 노동 정책은 늘 ‘투쟁의 대상’이었다. 노동 환경을 바꾸겠다는 구호는 선거 때마다 이미 충분히 들었다. 문제는 실천과 구체성이다. 하지만 문재인·안철수 후보 역시 엇비슷하다. 노동계 당사자들은 두 후보가 ‘노동 현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봐도 ‘박근혜 후보와 차별화되는 점이 없다’는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뭔가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은 시간이 남아있단 점이다. 두 후보는 지금이라도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답변을 가져와야 할 것이다. 야권 후보의 노동관이 어떠한가를 확인하는 것은 누가 야권 후보가 될 것이냐 보다 훨씬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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