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이철 전 코레일 사장, 한완상 전 부총리, 김학민 M2픽처스 대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이정황 감독. ⓒ미디어스
9일 오전 서울 신문로 인디스페이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유신의 추억 - 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이하 유신의 추억)>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제작자인 김학민 M2픽처스 대표는 이날 열린 제작발표회를 “일반적인 극영화의 시사회가 아니라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공표하는 날”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를 만든다고 얘기하는 순간 관련 자료영상을 구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들었다”며 “이 또한 유신이 우리에게 준 내부검열의 흔적이 아닌가”하고 자문했다.

그는 여전히 5·16을 ‘구국의 혁명’ 혹은 ‘100억불 수출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분개심이 들어 영화를 기획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올해가 1972년 10월 유신이 일어난 지 꼭 40년 되는 해라는 점도 자못 인상적이다. 김 대표는 “유신시대에 대한 이야기, 유신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 지금 오늘의 유신이 주는 의미를 되새기며 이 영화의 가치를 공유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로 제작 소감을 맺었다.

▲ 인혁당 사건 등 유신 시대에 일어났던 비극을 설명하고 있는 한홍구 교수. ⓒ미디어스
‘유신, 그들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입을 연 한홍구 교수는 <유신의 추억>을 “따님만 모르는 아버지 이야기”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는 “유신을 ‘10월 유신 특별선언’이라고 하니 말만 한 것으로 착각하나 실은 광화문에 탱크가 난입했던 사건”이라고 정의하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한 교수는 사진 슬라이드를 넘겨가며 유신 시절 일어났던 일을 차분히 짚었다. 516이나 유신 선포는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하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단호히 말했다. 딸인 박근혜 대선후보가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져 왔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두고 그는 ‘본의 아니게’가 아니라 ‘확실한 살의’가 있었다고 정정했다.

한홍구 교수는 “아직도 애국가가 나오면 멈춰서게 된다”며 “현재 유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나조차도 아직 몸속에 유신이 남아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 유신이기 때문에 이 시대를 겪지 못한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철 전 코레일 사장은 5·16 쿠데타가 일어났던 중2 때를 회고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철 전 사장 역시 “유신의 목적은 옳았으나 수단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변명이라고 일축했고, 그 발언을 ‘사과’라며 대서특필한 언론을 비판했다. 그는 한홍구 교수와 마찬가지로 “유신은 박정희가 영구 집권하고자 하는 목적이 유일했다”고 단언했다.

이 전 사장은 “국가 안보를 위한다는 유신이 중앙청 앞에 탱크를 두고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니 말이 되느냐”며 유신 정당화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또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누명을 썼던 옛 일을 떠올리며 “평범한 대학생들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하기에 설득력이 떨어지니 국가에서 아예 배후까지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그의 배후로 지목된 서도원 씨는 무고하게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유신 당시 교수였던 한완상 전 부총리는 “처음 부임했을 때 서울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일선 전쟁마당이었다”며 기억을 더듬어갔다. 한 부총리는 “역사는 기억, 기억은 해석”이라는 역사관을 관객들에게 피력했다. “기억은 객관적인 현실을 기억하는 게 아니다. 기억은 해석이다. 정확히 해석되지 않는 기억은 현재도 미래도 캄캄하게 만든다”면서 “역사는 바로 기억되고 바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 '인민혁명당 재건위'는 처음부터 없는 조직이었으나 이에 연루된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1974년에 관련자로 지목된 8명이 18시간 만에 처형된 사건을 '인혁당 사건'이라 부른다. ⓒ미디어스

패널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명창 임진택 씨가 판소리 공연을 선보였다. 임 명창은 진지한 분위기를 재미있게 반전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 무대에 오를 때부터 재치 넘치는 말솜씨로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치웠던 책상을 다시 가져와 종이를 올려두고는 “사설 자진모리를 이어가는 데 외우기가 쉽지 않다. 살짝살짝 보면서 하기 위해 컨닝 페이퍼를 만들었다”고 말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험난했던 자신의 감옥생활도 유머러스하게 풀었다. 그는 수배 중이던 유인태 의원을 숨겨준 죄로 서대문 구치소에 넉 달 있었다고 한다. 그때 구치소에 있던 한 수감자가 사정을 듣고는 “그건 은닉죄가 아니라 무허가 숙박업이라고 하는 거여”라며 일갈했다는 사연에 좌중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임 명창이 들려준 ‘장준하와 박정희’라는 판소리는 비슷한 해에 태어난 두 사람의 상반된 인생을 돌아보는 내용이었다.

장준하는 일제치하 강제 징병 당했는데
박정희는 일본군에 자진해서 입대하고
장준하가 병영을 탈출 광복군에 합류할 제
박정희는 일본군 중위로 독립군을 때려잡는 앞잡이가 되었더라

역사의 어두운 단면을 흥겨운 판소리로 듣는 색다른 시간이었다. “판소리 하면서 이렇게 추임새 없는 판은 처음 본다”며 끝인사를 한 임 명창에게 모두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낸 것은 물론이다.

총감독 이정황 감독은 <유신의 추억>을 “종합선물세트”라고 자평했다. 판소리와 랩 음악이 어우러지고, 유신 시대를 살아냈던 이들의 증언과 전문가들의 코멘트, 다양한 사료들이 결합된 작품인 덕이다. 이 감독은 “이런 영화를 만들게 돼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만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소감을 밝혔다.

‘내 알 바 아냐’라며 유신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유신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비추는 예고편은 짧지만 잔상이 강했다. 예고편은 유신이 1979년에 끝난 것이 아니며 언제든 유신의 망령이 부활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디스페이스의 다음 일정 때문에 관객과의 묻고 대답하는 시간은 없었으나, 의미있는 이야기가 오간 자리였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영화 예고편의 마지막 문구가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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