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7년 만에 가장 큰 쌀 흉년이 들었으나 아는 국민은 별로 없을 듯하다. 쌀 수확량이 440만8,000t으로 2001년의 551만5,000t에 비해 20%나 감소했다. 여름 내내 비가 지겹게 내린 탓이다. 한국뿐만 아니다. 이상기후로 인한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지구촌을 강타해 세계 22개국에서 식량폭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한국은 쌀만은 자급체제를 유지해 식량파동에서 벗어나고 있다.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시발로 해서 농민들이 쌀시장 개방을 결렬하게 반대해 왔다. 고비마다 서울까지 올라와 목이 터져라 반대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경찰의 곤봉세례와 언론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몸을 던져 싸운 덕에 그나마 시장을 소비수요의 8%를 여는 데 그쳤다.

이 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5% 수준이다. 쌀을 빼면 5%에 불과하다. 만약 쌀 시장을 활짝 열었더라면 지금 식량파동의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식량은 해외에서 사서 먹는 게 싸다는 비교우위론자들의 주장을 믿고 따랐더라면 말이다. 생산기반의 붕괴로 자급률이 밀 0.2%, 옥수수 0.8%, 콩 9.8%로 떨어진 사실이 그것을 말한다. 미국산 값싼 농산물의 단맛을 즐기다 이 꼴이 됐다.

▲ 파이낸셜뉴스 5월2일자 7면.
쌀은 두 가지가 있다. 길쭉길쭉하고 찰기가 없는 인디카(Indica)라는 장립종(長粒種)과 둥글둥글하고 찰기가 있는 자포니카(Japonica)라는 중-단립종(中-短粒種)이 그것이다. 세계 25억명이 쌀을 주식으로 삼지만 주로 장립종을 먹는다.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먹는 중-단립종은 재배량도 적지만 거래량도 아주 적다.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쌀은 먹고 남는 양만 내다파는 시장특성을 지녀 세계생산량의 3~4%만 거래된다. 자포니카는 더욱 거래량이 적어 기후변화에 즉각적인 영향을 받는다. 신군부가 총칼로 정권을 탈취했던 1980년에는 냉해가 심해 큰 흉년이 들었다. 그 때 웃돈을 주고도 살 수 없어 구걸하다시피 쌀을 사왔다. 일본도 1994년 쌀 흉년이 들어 식량메이저의 농간으로 큰 곤욕을 겪었다.

국제 쌀값이 작년 12월부터 갑자기 폭등하기 시작했다. 지난 4월까지 다섯 달 동안 무려 280%나 뛰었다. 그러자 쌀 수출국 1위인 태국이 OPEC(석유수출국기구) 같은 쌀 카르텔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2위인 베트남에 이어 인도, 이집트도 수출제한에 나섰다. 호주는 곡창지대의 오랜 가뭄으로 올해 생산량이 1/100로 줄어들 판이다. 중국은 식량증산에 나서 농업보조금을 작년보다 36% 증가한 840억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다.

그런데 비교우위론자들로 포진된 이명박 정부는 농지규제 완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곡물 1,400만t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나라에서 제 정신이 있는지 의문이다. 미국산 쇠고기 무차별 수입은 광우병만의 문제가 아니다. 축산산업의 생산기반이 무너져 육류공급도 미국의 식량메이저에게 맡기는 사태가 일어난다. 세계는 지금 자원민족주의가 팽배한데 식량주권을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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