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오전 '담쟁이 캠프' 1차 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는 윤여준 전 장관의 모습 ⓒ연합뉴스

작년 이 맘 때엔 잠시 ‘안철수의 멘토’로 소개되던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이 문재인 대선캠프에 합류하여 추미애 의원과 함께 국민통합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 인선에 대해 통합을 추진하는 ‘통 큰 결단’이라는 옹호론과 전두환 밑에서 일했고 뉴라이트를 건설한 ‘부역자’를 원칙 없이 기용했다는 비판론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기자는 비교적 최근에 윤여준 전 장관과 몇 번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가 낸 책의 출판사에서 기자도 책을 냈다는 우연한 인연 때문에, 몇 차례 도서강연회에 패널로 참석했던 것이다. 시기는 그가 안철수와 사실상 결별한 시점부터, 공교롭게 안철수가 출마선언을 한 날의 강연회까지 세 차례였다. 비교적 최근의 윤여준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자격>과 강연회에 나온 그의 문제의식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윤여준의 이력을 간단히 살피면 박정희 시절 외교관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전두환 시절 청와대에서 일했으며 김영삼 시절 환경부장관을 역임했고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다. 선출직과 정무직에 대한 경험이 모두 풍부한 반면 ‘독재정권의 부역자’란 비판도 나올 수 있는 이력이다. 특히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의 선거전략가 역할을 한 것과 2006년 지방선거에서 오세훈을 끌어들여 강금실을 패퇴시킨 사건은 개혁세력 지지자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일 것이다. 한나라당의 전략통, ‘보수의 제갈량’ 혹은 ‘보수의 장자방’이란 별명은 그를 노회하고 전략적인 인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자격>에 등장하는 문제의식은 전략적이라기 보다 원칙적이다. 모두가 선거공학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정치의 계절을 맞아 그는 통치 이후의 경륜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여러 정권에 참여한 윤여준의 풍부한 이력에 비추어 봤을 때는 아주 흥미진진하다 말하기는 어렵다. 보통 사람들이 그와 같은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기대하는 각 정권의 뒷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는 대신 그는 동서양 사상과 각 정부에 대한 평가를 통해 그가 생각하는 ‘대통령의 자격’, ‘스테이트크래프트’(통치술 내지는 통치역량이라 번역될 수 있을)의 조건을 탐구해 보려고 한다.

▲윤여준 저 <대통령의 자격>의 표지

체계를 갖춘 저술을 하려고 했던 욕심이 투영된 책에 비해 그가 강연에서 풀어내는 문제의식은 훨씬 흥미롭고 명쾌하며 함의가 있다. 책만 보면 그는 동서양의 사상가를 두루 인용하지만 강연을 들으면 확실히 세대적 특성에 맞게 <정관정요>로 대표되는 동양의 치국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창업의 자질과 수성의 자질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현대에는 대체로 재벌그룹의 1세 총수와 2세 경영자의 차이를 말할 때나 적용되는 이 격언이 민주주의 사회의 대통령에게 적용된다. 말하자면 선거에 이기는 방법과 통치하는 법은 다르다는 것인데, 현대 정치학자들이라면 ‘정권을 창출하는 방법과 정권을 운용하는 방법의 차이’라 표현했을 문제다.

그는 “역대 대통령들은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통치엔 별 어려움이 없다 여기며, 서류 가방 하나만 들고 측근들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왔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주로 김영삼과 김대중 등 민주정부의 지도자들에게 향해 있다. 혹자는 이런 태도를 보고 그가 독재정권에 참여한 자신의 이력을 정당화한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과거보다 통치역량의 문제가 더 중요해졌는데 민주화 이후의 지도자들의 방식이 그만큼 진화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고도 볼 수 있다. 가령 전두환은 김재익 수석에게 받은 경제과외만으로 경제를 그럭저럭 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정도의 수완으로 경제정책 문제에 접근했다면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우리가 앞으로 겪게 될 세상이 독재정권이 아닌 선거를 통해 수립되는 민주정부라는 점에서, 민주정부가 흔히 범할 수 있는 잘못들을 거론하는 것이 훨씬 더 미래를 위해 실용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는 참여정부의 발목을 잡았던 관료주의 문제나 기업권력 문제에 대해서도 문제를 정리할 수 있는 실천적인 경험담을 들려준다. 그는 말한다. “정권을 잡고 처음에 청와대에 들어가면 기분이 구름 위를 떠다닌다. 마치 약을 한 듯한 상태가 된다.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상황에서 측근들을 각 처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정책을 일임한다. 장관들이 업무지시를 한다. 그럴 때에 관료들은 그 정책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이견을 제시해봐야 반개혁세력으로 지탄받을 뿐이므로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한다. 몇 개월이 지나면 부작용이 생긴다. 장관이 입장을 바꾼다. 이런 식으로 두 번만 실패를 하면 장관은 풀이 죽는다. 이때를 노려 관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안을 장관에게 가져간다. 그러면 이번에는 장관이 관료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 이런 식으로 정권은 관료에게 길들여져 가는 것이다.”

곱씹어 볼만한 지적이다. 또한 그는 덧붙인다. “이렇게 관료들에게 포획되다 보면 원래의 로드맵은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은 로드맵을 줄 곳이 없다. 그때부터 기업보고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측근들이나 학자들 그룹이 만들어 준 것에 비해 훨씬 전문성있고 그럴듯 해보인다. 이젠 정권의 로드맵이 기업보고서에 잡아먹힌다. 하지만 기업보고서는 어쨌든 일개 사기업의 이윤을 위한 것이다. 올바른 국정지표방안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된 정권에겐 다른 대안이 없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우리는 이런 일이 이미 몇 번 일어났으며, 무언가 방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관료주의와 기업권력의 포획에서 벗어난 통치를 경험할 수 있을까. 그는 정권의 ‘첫 1년’과 ‘사람 쓰는 문제’를 강조한다. 윤여준은 “결국 정권잡고 처음 1년이 제일 중요하다. 첫 1년 동안 무슨 과제를 선정하고 무슨 이슈를 어떻게 띄울지에 대한 복안이 서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남은 임기 동안은 첫 1년 동안 던진 것들을 정리하며 흘러갈 수 있다. 그러나 첫 1년 동안에 어영부영 정계개편이나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면 그후엔 대부분의 경우 또 다른 선거를 대비해야 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러다보면 짧은 임기 안에 마칠 수 있는 일을 택하기 위해 관료와 기업보고서에 의존하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또 그는 “결국 사람을 잘 써야 한다. 이명박 정부처럼 대통령이 아는 사람만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전 정부들에서도 나온 문제였다. 측근이나 아는 사람만 장관을 시켜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전문성과 거리가 먼 인사가 발생하고 해당 부서를 장악하지 못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조직을 유심히 살피다 보면 능력에 대한 내부평가는 좋은데 장차관은 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런 이들을 데려와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고집으로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에 아부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데려올 수 없다. 먼저 가서 인사하고 역할을 맡겨야 한다. 대신 이런 사람들은 승진을 시켜주면 자기 자신의 고집이 옳음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한다”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윤여준이 최근 이렇게 통치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에 그가 문재인 캠프에 합류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박근혜의 경우 민주적인 리더십은 없다고 생각한다. 또 그는 안철수의 경우 현재의 방법으로는 설령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자기 세력이 없어 지지부진한 정계개편을 하느라 임기를 다 보내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안철수와의 만남과 결별에 대해 “(윤여준은 안철수에게) 원래는 제3지대에서 국민운동을 하자고 그랬다. 만일 정치를 하고 싶다면 서울시장 선거에 나오지 말고 당을 만들어 일단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정도를 만들어낸 뒤에 대선 대응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본인이 정치는 할 생각이 없고 시장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면 시장선거에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결국 시장 선거에도 안 나오더라”라며 안철수의 오락가락을 설명한다.

▲ 2011년 창원의 청춘콘서트에서 발언하는 박경철(왼쪽), 윤여준(중앙), 안철수(오른쪽)의 모습. ⓒ연합뉴스

그는 “내가 그의 멘토라고 얘기한 적이 없었다. 본인이 청춘콘서트 등 행사에서 나를 자신의 멘토라고 소개한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언론에 대고는 또 그것을 부정했다”라고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그는 안철수가 통치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당을 만들기 위한 결단을 적당한 시점에 내리지 못했다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실기하였고 지금에 와서 성공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오히려 문재인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분명한 것은 통치역량이란게 일 년 정도 책만 보고 고시공부하듯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라며 안철수를 우회적으로 비판했고, “청와대 참모 경험이란 게 다양한 영역을 조율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다”며 문재인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즉 그의 문재인에 대한 기대는 통치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기자는 윤여준의 문제의식과 정세판단이 민주개혁 세력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 느낀다. 그렇기에 비록 윤여준은 새누리당 출신이고 이헌재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관료였다 하더라도 윤여준의 기용이 이헌재의 기용보다 덜 위험한 일이라 느낀다. 우리가 이헌재에게 우려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경제정책의 방향이지만, 윤여준의 문제의식은 정파를 가리는 것이 아닐뿐더러 외려 민주개혁 세력에 절실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생각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윤여준이 전두환 정권과 뉴라이트에 관여했기 때문에,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일했던 이헌재보다 훨씬 민주당의 정체성에 어긋난 인물이라 볼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고방식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윤여준에 대한 판단이 이렇게 분분한 것은 개혁세력의 피할 수 없는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다.

즉 박근혜는 오랫동안 민주당 쪽 사람이었던 김종인을 데려다 쓰는 문제에 대해 지지층 내부에서 큰 견제를 받지 않는다. 새누리당의 지지층은 결속력이 매우 강하고 어떤 일이 있든 비판을 하는 법이 잘 없고 설령 거센 비판을 하더라도 지지를 철회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야권은 이와 상황이 다르다. 야권의 지지자들은 비판도 잘 하고 언제든지 지지를 철회할 준비도 되어 있다.

그렇기에 민주당이 새누리당 측에 비해 선거전에서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거전의 문제를 떠나 개혁의 가능성의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얘기가 또 다르다. 민주당이 개혁성을 조금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지지자들이 민주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어떤 한계선상에서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윤여준에 대한 갑론을박을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봐야 한다.

윤여준에 관한 논란에서 우리가 얻어내야 할 부분은 바로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재인식일 것이다. 야권은 정치공학적으로, 심지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더라도 그 지지층에 의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고 이 비판을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지지자들 역시 그들의 어떠한 반응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전략적 유연성’을 좁히고 있다는 점은 인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개혁 성향 지지자들의 비판을 통해 정치인의 개혁성을 유지하려 하면서도, 그 개혁적 정치인에겐 전략적 유연성을 주문하는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고,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딱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경제자문단과 인사하는 문재인 후보. 우리는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일종의 모순된 요구를 하곤 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라면 지지자들도 자신들이 하는 요구가 일종의 모순을 품고 있음을 인지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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