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회견장에서 사과하는 박근혜 후보. 민주주의 국가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5.16과 유신 등이 정치발전을 지연시켰다고 생각한다는 간단한 평이 담겼다. ⓒ연합뉴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오늘 오전 9시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을 했다. 물론 야권 지지자 입장으로선 성에 차는 기자회견은 아니다. ‘아버지’란 말이 7번, ‘사과’란 말은 1번 밖에 안 쓰인 이 사과문으로 진심을 느낄 수는 없다. 기자회견도 받지 않은 십 분의 사과라는 것보다, 이 사과문이 그간 박후보의 입장을 억지로 구부리지 않고도 가능한 교묘한 어휘 재배치에 불과하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 박근혜 기자회견문 단어 구름. '사과'의 비중이 높지 않음을 시각적으로 쉽게 알 수 있다. 단어 구름은 연합뉴스 미디어랩 데이터 사이트 http://data.yonhapnews.co.kr 를 이용해 제작하였다.

그러나 야권 지지자의 입장에서 박근혜의 내심이 그럴 거라는 ‘심증’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가 훨씬 더 엄중한 사과를 한다 하더라도 ‘권력을 잡기 위한 책동’으로 생각할 것이다. 물론 박근혜가 그렇게 사과한다면 그것은 그의 내심과 상관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바가 있다. 문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에게 그 정도 행동을 강제할 정도가 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인혁당 발언으로 지지율이 10% 이상 내려갔다면 진정한 사과를 요구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3% 정도 내려간 것이 고작이다.

결국 이 정도 상황도 야권 입장에선 운이 좋았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박근혜 사형제 발언에서 인혁당을 연상해서 공격한 이해찬 의원의 ‘뜬금포’가 의외로 정확한 부분을 찌른 것이다. 박근혜는 아버지가 국가를 위해 살았다는 ‘본심’을 바꾸지 않는 선에서 정치를 하고 있고 그렇기에 포괄적인 사과는 할 수 있어도 구체적인 질문을 받으면 ‘삑사리’가 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평정을 유지하고, 오늘 기자회견 정도의 기조를 유지했다면, 안철수가 ‘링’에 뛰어들 기회도 없었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정치공학적 현실이다.

▲ 박근혜 후보가 곤혹스러운 입장이 된 데에는 이 사람의 공로가 크다. 그런데 덕분에 안철수가 링으로 수월하게 올라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연합뉴스

만일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면 거리낌도 덜할 것이고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망언’ 목록은 늘어날 것이다. 이런 건 내기를 안 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되면 사과와 상관없이 망언을 할 거라는 뻔한 예측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가 대통령이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느냐다.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하나는 박근혜가 사과를 해도 그게 거짓말이란 걸 아는 이들이다. 다른 하나는 박근혜가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들에겐 박근혜의 ‘사과’ 여부가 쟁점이 되지 않는다. 박근혜의 지지율을 변동시키는 이들도 아니다. 박근혜는 이들을 바라보며 사과하지 않았다. 그가 사과한 대상은 마지막 세 번째 부류, 박정희 시대에 빛과 어둠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정도는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들이다.

이들도 인혁당 발언을 보며 박근혜의 과거사 인식이 현실의 인권 개념에 접촉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최근의 박근혜의 지지율 하락과 사과 기자회견을 이끌어낸 사태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박근혜의 사과를 믿지 않는 우리의 반응이 아니라 이 세 번째 부류의 반응이다. 우리가 가령 트위터에서 아무리 그의 거짓말을 규탄한다 한들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들의 반응은 향후의 여론조사 결과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선거도 하나의 싸움이라면 유리한 부분은 대비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세 번째 부류가 인혁당 논쟁으로 박정희 시대를 뒤져보고 갑자기 역사의식이 높아져 박정희의 딸을 비토하는 경우까지 우리가 대비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그저 야권이 승리하면 될 일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대비해야 할 것은 불리한 경우, 이 정도 사과만으로 세 번째 부류가 납득을 한 경우다.

따라서 야권에게 ‘행운’이었던 이 논쟁은 이 정도에서 일단락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이 추상적이고 애매한 사과에 인혁당 유가족이 납득할 리 없을 것이고 그분들과 그분들을 돕는 이들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야권이 그것을 '박근혜 검증'의 핵심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국 대통령 선거의 일정상 여론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시점에 그가 던진 것이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이라면, 야권도 거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넘어 다른 비전을 던져야 한다. 굳이 비판적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면 과거사 발언보다는 후보 확정 이후 공약 1호인 ‘집 걱정 없는 세상’의 세부 공약들의 타당성을 비판하며 야권의 대안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야권에 행운을 가져다 준 이해찬 의원의 ‘신의 한수’에서도 배워야 할 지점은 있다.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인식을 과거에만 묶어 두지 말고 현실의 인권 문제와 연동하면 중도층 유권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 범죄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박근혜 후보가 사형제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인혁당 얘기도 나올 수가 없었다.

즉 박근혜 후보의 발목을 잡는 것은 그의 과거사 인식이 아니라 그 인식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낡고 수준낮은 인식이다. 정책대결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현재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슈를 제기하며 과거사의 문제를 환기한다면, 그저 ‘박정희의 딸’이라 비난하는 것보다 그를 훨씬 더 힘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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