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자 동아일보 34면 '횡설수설'란

동아일보 오피니언란에 공지영의 <의자놀이>에 대한 비판 글이 등장했다. ‘횡설수설’란에 쓰여진 송평인 논설위원의 “의자놀이의 거짓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글을 보면 말 그대로 횡설수설이다. 이 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로서 현재 희망버스 대변인을 맡고 있는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에게 물어보았다.

- 조중동에서 <의자놀이>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데 이례적으로 등장했다. 어째서라고 생각하나.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왜 이런 글을 썼냐, 라고 물어봐야 할 상황인데, 나는 현재 국회에서 청문회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새누리당에 대해 인기영합하기 위해 쓸데없는 짓을 벌이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하고 있다. 청문회가 진행되다 보면 재벌 총수들을 불러내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보수층 입장에선 그것을 나쁜 선례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 입장에선 막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다음 주 정도면 조중동 사설에서 청문회에 대해 언급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 이창근 기획실장의 모습
- ‘횡설수설’이 세 가지를 말했다. 이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나.

하나만 물어보자. 르포라는 게 정말로 해당 사건의 현장에 꼭 있었던 사람만 쓸 수 있는 것인가.

-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현장’이란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견해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가령 ‘횡설수설’은 공지영 작가가 파업 현장에 함께 있지 않았기에 쓸 자격이 없다 했지만, 그 파업현장을 기억하는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며 썼다면 그 장소가 ‘현장’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봐야 하지 않겠나. 가령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쓴다면,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지 않는 이상 그 상황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는 것인데, 어쨌든 재구성을 해서 쓰게 된다. 그때가 현장이 아니라 그 분들을 만나는 장소가 현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업 때 가보지 않았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다.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른다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지 말고, 만일 파업경험자들의 주장이 왜곡되어 있다면 그 사실을 논박하면 될 일이다.

- 다음으로, 쌍용차 노동자의 22명 죽음 중 자살자는 12명 뿐이라는 얘기를 했다. 물론 22명 모두가 자살자는 아니며, 돌연사와 같은 상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얘기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황당하다. 일단 12명이라 하더라도, 3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전체 2,646명 노동자 중에서 생긴 자살자라면 굉장히 높은 수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입장에선 22명조차도 죽은 통계라는 거다. 나는 이 얘기도 국회 청문회에 대한 훈수라고 생각된다. 새누리당에게 이런 지점들을 공략하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이나 보수언론 측에서 그렇게 얘기한다면, 우리는 우리대로 그렇다면 제대로 된 통계를 위해 해고자와 희망퇴직자들의 근황을 조사해 보자고 얘기하고 싶다. 끔찍하지만, 그러면 훨씬 더 심각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 예측한다.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려고 한다면 파헤쳐야 할 사안이다.

- 세 번째 얘기는 부실회계 문제는 금융감독위원회 등의 조사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역시 청문회에서 나오게 될 얘기가 아닐까. 그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인데 결론이 났으니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나. 근거를 가지고 해야 할 얘기다. 지금은 ‘횡설수설’에 나왔지만 청문회 진행되면서 사설이나 칼럼에서 쓸 때는 좀 더 말이 되는 얘기들을 했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조중동이 <의자놀이>가 만들어내는 모든 현상에 침묵하는 가운데 동아일보가 이런 식으로라도 보도한 것은 고무적이다. 이창근 실장은 “동아랑 전쟁하면 대동아전쟁이 되는 건가”라고 농담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애써 사태를 외면하던 그들의 뒤늦은 관심을 보면서, 국회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매체비평지 기자의 입장에서도 청문회가 지속되면서 나오게 될 ‘그들’의 사설과 칼럼이 기대되는 바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