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 감독의 1995년 작 <301 302(삼공일 삼공이)>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4월부터 캐나다에서 촬영에 돌입한 할리우드판 <301 302>는 영화 <매트릭스>의 캐리 앤 모스가 방은진 역을, 해더 그래이엄이 황신혜 역으로 캐스팅되었는데 특히나 해더 그래이엄은 거식증에 걸린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급격한 다이어트를 시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과연 박철수 감독의 <301 302>가 어느 정도로 뛰어나기에 세계 영화의 자존심 할리우드가 판권까지 사서 리메이크한 것일까.

우선 <301 302> 영화를 이해하려면, 영화의 모티브 격인 장정일의 <요리사와 단식가> 시를 알아야 한다. 물론 글쓴이도 <301 302> 영화를 검색하다가 장정일의 시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는 <국경의 밤>과 마찬가지로 만연체의 서사로 이뤄져 있다.

301호에 사는 여자는 요리사고, 302호에 사는 여자는 단식가다. 301호는 요리에 미쳐 있고, 302호는 끊임없이 음식을 거부한다. 결국 세상의 모든 요리의 맛을 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까지 미치게 되고, 지독한 외로움에 지쳐있던 302호는 흔쾌히 301호 음식의 재료가 되어준다. 그러나 301호는 여전히 외롭고,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외롭다. 이런 내용이다.

참으로 충격적인 시가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시대가 뒤숭숭한데, 그것도 17년 전에 자기 스스로를 인육으로 바친 여성의 이야기를 쓸 수 있다니. 그런데 영화는 시에 설명되지 않은 여자들의 엽기 행동에 내적 동기를 부여하여 한 편의 필름으로 담는다.

영화에서도 301호 승희(방은진)는 요리를 좋아한다. 그녀는 남편과 막 이혼하였고, 301호에서 새 출발을 하고자 한다. 그녀가 남편과 이혼한 동기는 남편이 아끼던 애완견을 요리하여 대접했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에게 위자료를 받고 이혼에 성공한 301호는 새집에서도 끊임없이 요리를 만들고 앞 집 302호에 거주하는 윤희(황신혜)에게 줄기차게 자신이 만든 요리를 갖다 준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음식을 거부하는 윤희는 매일 그 음식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구토한다. 자신의 성의가 302호에 의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301호는 남편에게도 그랬듯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302호에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권한다. 결국 302호는 301호에게 자신이 사람을 피하고, 음식을 거부한다는 충격적인 비밀을 털어놓는다.

여성 잡지에 다이어트, 성관계 등의 주제를 기고하여 밥벌이는 하는 302호는 어린 시절 계부에게 줄기차게 성적 학대를 받은 아픔이 있다. 그리고 302호는 자신 때문에 자기를 따르던 어린 소녀가 차가운 고기 냉장고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는 사건을 트라우마로 갖고 있다.

성욕과 음식을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302호는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섹스와 음식을 거부하는 302호는 자신의 글을 통해 늘 '성욕'을 갈망한다. 하지만 음식과 성에 대해 과도한 편집증을 앓고 있던 그녀는 음식이라면 모조리 거부하였고, 결국 그 지독한 외로움을 참을 수 없었던 302호는 301호의 음식 재료가 되길 자청한다.

302호와 마찬가지로 301호도 마음이 아픈 사람이다.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였던 301호는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남편이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고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알았다. 하지만 남편은 자꾸 음식을 권하며, 관계를 갖자고 보채는 아내에게 질려버린 지 오래다. 아내가 만들어주는 음식은 참 맛있지만, 진수성찬도 매일같이 받으면 질리게 마련이다. 과유불급이라는 것을 몰랐던 301호는 계속해서 남편에게 음식, 자신을 향한 사랑을 보챘고, 결국 자신이 남편이 키우던 애완견만도 못하다는 사실에 분노한 301호는 애완견을 죽여 남편을 위한 마지막 저녁으로 바쳐버린다.

301호는 타인의 사랑이 고팠던 지독하게 외로운 여자다. 그녀가 요리에 집착한 이유도, 맛있는 음식을 해주면 남편이 자신을 끊임없이 아껴주고 사랑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스턴트에 익숙해져버린 남편은 미모와 요리 실력에 반해 아내로 삼았던 여자에게 금방 싫증내게 되었고, 그녀가 매일같이 해주는 호화로운 밥상이 두렵기까지 하다. 하지만 자신의 과잉 애정표현을 부담스러워하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자신의 넘쳐흐르는 감정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었던 301호는 남편의 싸늘한 반응에 폭발하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301호는 남이 자신을 사랑해주고 인정해줘야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되는 자존감이 상당히 낮은 여자다. 301호와 그녀의 엄마 간의 통화에 잠깐 나오지만, 그녀가 자존감을 잃는 배경에는 순전히 엄마의 세뇌가 크다. 301호 엄마는 301호에게 여자는 시집가서 남편 잘 떠받들고, 남편이 싫증내지 않게 항상 관리를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입시킨다.

하지만 전 세대들과 달리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정작 그 혜택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상대적 박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취미생활을 통해 그 외로움을 정상적으로 훌훌 털어냈으면 좋았으련만 301호는 오직 남편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자 하였다. 때문에 그녀는 더더욱 상처받게 되었고 이사 온 이후에도 남편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음식을 싫어하는 302호에게 음식을 바친다. 301호는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지만 302호에게는 '폭력'이나 다름없다.

음식과 성욕은 비례한다는 심리학적 관점에 착안하여 만든 영화는 현대인의 지독한 소외감과 외로움이 과도한 편집증 혹은 우울증으로 번져 끝내 '살인'과 '인육'이라는 끔찍한 범죄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관심, 내면의 외로움의 심각성에 경종을 울린다.

남성을 통해 여성의 가치를 인정받는 모순된 가부장제 사회. 남성들에게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여 끝내 우리 사회의 괴물이 되어버린 301호와 302호. 한편으로는 만약 301호가 남편을 위한 요리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문 요리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요리를 사랑했다면. 302호가 어린 시절 의붓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있었을 때, 엄마가 좀 더 딸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이 두 여성 모두 극단적인 우울증으로 치닫지 않았을 건데 하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한다.

‘18년 전에 이런 영화가 있었구나’하는 놀라움을 준 <301 302>. 어릴 때 내면의 상처를 받고 거식증에 걸린 환자를 위해 완벽한 미모를 포기한 황신혜의 연기 변신도 놀랍다. 하지만 현재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곧 그녀의 연출작 <용의자의 x>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방은진의 섬뜩한 표정이 더 돋보인다. (방은진은 그 영화로 같은 해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8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외롭고 우울하다. 그리고 성적 욕망과 물질(음식 등)을 향한 욕심을 자연스럽게 통제하지 못한 사람들은 더욱 잔혹해져만 간다. 왜 할리우드가 이 영화를 탐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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