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얼마 전 전병헌 의원실에서 구글 트렌드(google trends) 자료 분석을 통해 성폭행이나 살인과 같은 극악범죄에 대한 검색이 선거 국면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기사 링크). 과거 정권이 선거 시기 ‘북풍’을 조성해서 지지자를 결집시켰다면 점점 보수층의 전략이 ‘북한’이 아닌 ‘극악범죄자’를 내세워서 치안담론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범죄자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는 대중적 요구에 편승하여 사형제 부활이나 불심검문 확대 같은 반인권적 형벌이나 통제조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최근 보수 세력의 전략이 되고 있다.

보수, ‘경찰국가’를 위한 새로운 드라이브

그러나 이는 단순히 ‘정권의 공작’만으로 발생하는 사태가 아닌, 다양한 주체들의 이기적 행동의 총합이 만들어낸 효과다. 가령 경찰의 대언론 브리핑은 정권의 눈치를 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성과를 과장하려는 성향을 가진다. 언론보도 역시 자신의 정치지향을 드러내는 한편으론 특히 인터넷을 통해 조회수를 올려야 한다는 상업주의적 강박이 있다. 가령 조선일보의 ‘주폭 척결’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를 ‘술’이라는 깔대기로 수렴한 후 엄벌주의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정치지향의 표현이다(기사링크). 반면 성과를 자랑하고픈 경찰과 선정적 보도를 원하는 언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나오는 보도가 포털 사이트 메인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나이트 꽃뱀’ 같은 기사일 것이다(기사링크).

그렇게 볼 때 중요한 것이 보수층의 전략에 대한 진보언론의 대응이다. 물론 한겨레, 경향신문,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등은 이미 넷상에서 이 문제 보도에 관련해 많은 대중의 지탄을 받고 있다. 엄벌주의에 대항해 약간의 다른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극악범죄에 분노한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는 것이다. 또 조선일보의 ‘잘못된 사진 공개’와 ‘약도 공개’ 등 보수언론의 인권 침해 상황이 명확한 상황에서 진보언론의 대응을 문제삼는 건 형평성이 어긋나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사실상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보도를 하고 있다. 미디어오늘 기사에서 한 유력 일간지의 사회부 기자는 “이제 경찰국가냐 복지국가냐의 선택인데 한국은 경찰국가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언젠가는 모두가 후회하는 날이 올 것 같다”라고 우려했다(기사링크). 여기서 보수언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경찰국가라면 그들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을 ‘상수’라 생각한다면, 진보언론이 그 흐름을 막아내고 역전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를 말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 있고 필요한 얘기가 될 것이다.

‘음란물 탓’ 그대로 받아안은 진보언론

▲ 지난 3일자 한겨레 3면 기사

‘성범죄’ 정국에서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보도가 아쉬웠던 첫 번째 부분은 음란물에 대한 보도였다. 지난 3일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한국의 아동 음란물 생산비율이 세계 6위이며 여러 전문가들의 멘트를 받아 아동음란물 소비와 성범죄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게 취급될 문제는 아니었다. 경찰과 정책 당국자들의 조언처럼 아동 음란물 대책이 다른 음란물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옳은 얘기나, 그것은 아동 음란물이 성범죄에 미치는 영향이 명료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동 음란물 생산이 그 자체로 아동에 대한 성적 착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아동 음란물에 대한 규제의 논리와 그 영향력에 대한 논의는 별개의 것이 될 수 있는데, 두 신문은 그것을 간과했다. 그저 주요 범죄자들의 사례를 열거하며 이들이 아동 음란물을 즐겼다는 식의 선정적인 보도만 나왔을 뿐이다. 이렇게 아동 음란물을 별도로 규제해야 하는 이유와 그 영향력에 관한 논의를 구별하지 못할 때, 아동 음란물 단속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두 진보언론의 논리는 음란물 일반, 웹툰, 게임을 규제해야 청소년의 폭력성을 규제할 수 있다는 보수담론에 쉽게 투항하게 된다. 특히 경향신문이 포털 사이트에 다른 신문과 비슷한 형식의 제목으로 송고하는 <음란물 보던 20대, 후배 엄마 친구를…충격> 류의 기사(링크)는 사건에 대한 자세한 이해와는 상관없이 규제의 대상을 아동 음란물에서 음란물 일반, 더 나아가 문화컨텐츠 일반으로 확장하는 길을 열어주고야 만다.

자료를 섬세하게 해석하지 못한 문제도 있었다. 4일자 2면 기사에서 한겨레는 어제자 기사의 ‘생산비율 6위’라는 해석을 ‘유통량’으로 바로잡는다. “이는 일부 언론에서 보도된 것과 달리 ‘생산량’보다는 ‘유통량’에 대한 통계인 셈”이라 설명했지만 그 ‘일부 언론’에 자기 자신이 들어가 있었다는 점에선 쑥쓰러운 고백이었다.

또 아직까지 한국의 아동 음란물의 대부분은 미성년자들이 스스로 찍은 것들이 유출된 것이라는 설명은 어제 두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아동 음란물’ 왕국의 자화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국의 경우 아동을 납치해 상업적 목적으로 찍은 촬영물의 비중은 지극히 미미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통계를 낼 경우 ‘아동 음란물’ 왕국의 위상이 크게 흔들릴 것이다. 진보언론까지 받아안은 그 논의가 애초에 잘못된 전제에서 시작된 얘기일 수 있는 셈이다. 진보언론은 이 경우 아동 음란물의 처벌강화에 동의하면서도 범죄의 원인을 문화컨텐츠에 떠넘기는 그 논법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어야 했는데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경향신문의 피해자 ‘그림일기’ 공개 논란

▲ 지난 3일자 경향신문 4면. 두 번째 그림일기 기사다. 그림일기 부분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현재 인터넷판엔 그림이 삭제된 상태다.

‘음란물 탓’ 대응이 일종의 ‘미숙’이었다면 더 크게 취급되어야 할 결정적인 ‘실책’도 있었다. 경향신문 1일자 1면과 3일자 4면에 배치된 ‘그림일기’가 그것이다. 특히 1일자 1면에선 피해아동이 납치를 당하기 전날의 그림일기를 공개하면서 논란을 불러왔다. 범죄 이후 심리치료를 위해 그린 그림을 공개한 것도 아니고 범죄 이전 피해자의 평정한 상황을 드러내면서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유도한 것이다.

한 일간지 기자는 이에 대해, “범죄에 대한 보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저 분위기에 편승해서 단독 기사를 생산해내려는 취재 욕심만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기사라고밖에 볼 수 없다. 보도의 공익성이 전혀 없다. 신문사 내부에서 특종이나 단독 기사와 같은 구태적인 경쟁에 몰입하고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기사다”라고 비판했다.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방안을 마련하자는 취지와는 달리, ‘순결한 피해자’와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극적인 대비만을 가져오는 이런 접근은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이끌어내는 엄벌주의에 종속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을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보도는 아니지만 6일자 1면에 실린 <성범죄에 무너진 이 가정, 누가 살릴 수 있나>라는 제목의 기사도 비슷한 범주로 해석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경향신문의 ‘그림일기’ 공개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틀 후인 3일자 4면, 아동 음란물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한 그 지면 하단에 경향신문은 ‘그림일기’를 추가적으로 공개하고 심리학자에게 일기 내용 분석을 맡긴다.

그리고 이 일기는 인터넷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지면에선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의 이름이 이미지가 풀사이즈로 올라온 인터넷판에선 몇 시간 동안 보이는 상황이 있었다. 현재 인터넷판에서 이미지 파일이 삭제된 이유는 이에 대한 독자들의 항의 때문이었다고 한다. 경향신문 사정을 아는 한 내부 관계자는 “독자항의를 받고 바로 조처를 취했기 때문에 실제로 인터넷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은 한두 시간에 불과했다고 한다”고 해명했다.

외부의 비판과 내부의 목소리

피해자의 납치 전 ‘그림일기’ 공개에 대한 인권운동가들의 시선은 어떨까.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는 “사건이 생기면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고, 2차 가해가 안 생기도록 검경과 언론이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일보에서 약도를 보도하여) 피해자 집도 다 찾아갈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사건과는 상관없는 일기까지 보여주고 하는 건 아주 어이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그래서 피해자들이 동네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절규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경향신문이 평소에는 안 그랬는데 갑자기 왜 그런 보도를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다산인권센터 박진 상임활동가는 본지의 연락을 받고야 기사를 확인해 보았고 “놀랍다”는 첫 반응을 보였다. 그는 “부모의 허락은 당연히 받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아이의 일기장이고 그의 프라이버시다. 어린 아이의 사생활에는 별로 거리낄 만한 게 없을 거란 추측은 어른들의 시각이고, 이렇게 (공개)하는 것은 정말로 삶의 영역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는 행동이라 본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언론의 역할을 생각해 봐야 한다. 피해자가 ‘아프다’라는 건 누구나가 다 예측할 수 있다. 공개하지 않아도 아픈 게 당연하다. 언론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아픈지 끄집어내기 위해서 경쟁하기보다, 사건 이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보수언론의 보도가 굉장히 경망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진보언론이 이런 것을 일정 부분 따라가고 있어서 아쉽다”고 전했다.

이런 문제는 내부에서 토의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경향신문 내부에서의 온도차도 상당한 것 같다. 한 내부 관계자는 “젊은 기자들과 간부급들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큰 것 같다"고 전했다. 실제로 기자와 접촉이 된 한 간부는 "매체비평지에서 (보수언론보도와) 차이가 없다고 평하는 걸 보고 좀 놀랐다. 진보와 보수가 달라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당연히 (어떤 부분에선) 같이 가는 것도 있는 게 아닌가”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범죄보도에는 진보 보수의 차이가 없다'는 시선을 드러낸 것이다. 1일자 1면의 ‘그림일기’ 기사, <‘간호사를 꿈꾸던 명랑한 7살’ 피해 초등생의 일기>가 경향신문 내부에서 ‘금주의 좋은 기사’에 선정되었단 사실도 젊은 기자들에겐 불만의 큰 요인이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 조호연 사회 에디터에게 확인해본 결과, “선정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해당 기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보는 것은 어렵다. 담당 기자들이 그 주에 쓴 여러 기사들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의 목적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주까지 내려가서 고생한 1~2년차 기자들이 취재해서 가져온 기사를 소화하는 방식에서 문제가 드러난 것이지, 이 문제에 있어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라며 “오마이뉴스 등의 외부 비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부 논의를 통해 별도의 기준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사안이다”라고 설명했다. 경향신문의 내부 평가는 기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목적일 뿐, 이 기사의 적절성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라는 것이다. 결국 내부 토론을 통해 ‘가이드라인’이 정리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 사안을 합의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있다는 아쉬움도 말할 수 있겠다.

엄벌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것들

성폭력 사건에 있어 엄벌주의가 근본적인 해법은 물론 대증요법도 안 되는 이유는 성범죄가 처벌의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이는 경향신문 6일자 3면에서도 언급된 사안으로, “처벌의 엄격성은 높아졌는데 처벌의 확실성은 거의 없는 상황"으로 정리된다. 숙명여대 법대 홍성수 교수는 트위터에서 “성범죄 신고율은 10% 내외, 그 중 기소율은 43%, 그 중 실형율은 35%”로 “100건의 성범죄가 발생하면 실형이 겨우 2건 정도”라고 지적한다. 법정형만 높인다고 신고율과 기소율이 높아질 게 아니고, 최저형량을 높여 놓으면 오히려 법원이 유죄선고에 부담을 느껴 무죄판결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즉 여기서 필요한 것은 형량을 강화하는 엄벌주의가 아니라 신고율과 기소율을 높일 수 있는 정책적 접근, 그리고 범죄를 줄일 수 있는 좋은 사회정책인 셈이다.

경향신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가령 앞서 언급한 6일자 3면 기사에서 제기한 것이 신고율과 기소율의 문제였다 볼 수 있다. 1일자 4면 기사에선 <“가족이 잠자는 방에까지 침입” 무너진 취약계층 사회안전망>이란 제목으로 이 문제를 사회정책과 연결짓는 모습을 보여줬다. 문제는 경향신문이 이런 보도와 동시에 엄벌주의를 부추기는 보도를 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일자나 6일자 모두 1면에는 엄벌주의를 부추기는 선정적인 기사를 쓰고 그 뒤에는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셈이다. 조선일보 등이 경찰국가를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면, 경향신문 등은 문패에는 ‘경찰국가’라 써놓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복지국가’를 소개하는 셈이다.

한 익명의 경향신문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 신문이 분명히 불심검문과 사형제는 반대하고 있는데, 보도하는 걸 보면 이 보도를 보고 과연 독자들이 사형제를 반대하고 싶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그는 또 “학교폭력의 경우는 그래도 청소년들의 문제라 주의를 하는 부분이 있었고 선을 지켰다고 본다. 그런데 성범죄 관련 보도는 굉장히 선정적으로 접근하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한다.

경향신문이 이번에 이런 보도를 하게 된 이유는 지난 7월 24일 한겨레의 통영 초등생 살인사건 보도에 자극받았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당시 한겨레는 <살해된 통영 초등생, 홀로 늘 배곯는 아이였다>라는 제목의 1면 기사를 통해 해당 사건을 빈곤층 소외 아동의 문제로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보도는 다른 언론이 주목하지 않은 피해자의 상황을 사회문제와 극적으로 연결시킨 것이었다. 경향신문 역시 이와 같은 ‘단독보도’를 원했고, 그것이 ‘그림일기’ 기사를 ‘좋은 기사’로 보게 했다는 것이다.

▲ 지난 7월 24일자 한겨레 1면 기사

그러나 비록 당시 한겨레 기사와 이번 경향신문 기사는 사생활 침해란 측면에서 함께 묶일 수는 있을지언정 전혀 별개의 보도행태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기자는 “범죄는 그 자체로 사회적 병리를 안고 있고, 그렇기에 그 범죄에 귀속된 개인들의 삶의 루트가 그 병리에 포함된 것일 수 있다”며 “그저 선정성만을 목적으로 상황을 드러낸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사회문제의 구조를 충분히 담은 기사라면 그것을 평가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경향신문의 ‘그림일기’ 기사는 형식적으로는 한겨레의 통영 초등생 사건 보도와 비슷했을지 몰라도 내용적인 고민의 깊이에서 크게 뒤지는 면이 있다.

진보언론의 대응을 넘어선, 복지국가 담론의 문제

가령 이번 사건에서 한겨레는 8월 26일부터 9월 6일까지 <무죄의 재구성 - 노숙소녀 살인사건> 시리즈를 연재했다. 총 9편으로 이루어지는 이 기사는 범죄는 저질러져도 범죄자는 잡히지 않는다는 대중의 개탄이 인권감수성이 없고 실적에 연연하는 검․경을 만났을 때 사회 취약계층이 어떻게 범죄자로 둔갑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기사링크). 또 오마이뉴스는 4일에서 7일에 걸쳐 [성범죄 막으려면]이란 제하의 인터뷰 시리즈로 이호중 서강대 교수, 권인숙 명지대 교수, 김준호 고려대 명예교수의 발언을 빌려 엄벌주의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경향신문의 보도는 이런 기타 진보언론에 비해서도 미흡했다는 점에서 특히 아쉬움이 남는다.

▲ 지난 6일자 한겨레 12면 기사. 시리즈 마지막 기사였고 인터넷판에선 전체가 이어져 있다.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단순히 진보언론의 대응으로 국한시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한 언론사 기자는 “엄벌주의에 반대하라고 말하면 말은 좋은데 그러면 신고율과 기소율을 높이는 정책은 뭔지, 범죄를 효율적으로 줄이는 사회정책은 뭔지에 대한 대응 매뉴얼이 진보진영 전체에 짜여져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정책입안자가 아닌 추상적인 학자의 발언만 나와 있는 상황인데 언론으로서는 이런 발언만으로는 독자를 설득할 수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구체적 정책과 대응 매뉴얼이 확실하지 않다 보니 구체적 측면에서 상대편의 논법과 패턴을 답습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볼 때에 이 문제는 복지국가 담론의 정치성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최근 진보개혁세력의 ‘트렌드’는 “우리가 민주주의나 인권 등 추상적인 가치 얘기를 하다가 이명박에게 패배했으니 복지국가 담론을 통해 진보세력이 ‘밥 먹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요약된다. 그러나 사회경제 정책에 대해 진보세력이 대응해야 한단 지적은 옳지만 오직 이 부분만 말한다면 ‘물구나무 선 이명박’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우려가 있다. 박근혜가 스스로 인혁당 사건 등 과거사 문제를 터트리는데도 ‘인권’은 말하면 안 된다는 족쇄에 스스로를 가두는 셈이 된다.

사회경제적 복지국가를 넘어, 치안담론과 경찰국가에 대한 대안담론으로서 복지국가 담론을 확장하는 시도는 이런 빈 공간을 극복하면서 현재의 인권 문제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소수 범죄자를 엄벌에 처하기 위해 국민을 통제하려는 보수담론에 맞서, 복지국가 담론은 개개인의 인권을 중시하는 사회정책이 시민들을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그런 인권의식 속에서 복지국가가 추구하는 재분배 정책이 시민적 합의를 통한 정당성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즉 보수언론이 내민 ‘성범죄’발 치안담론이란 ‘도전’은, 이명박식 경제성장 담론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경제영역에 국한되는 얘기로 축소시킨 복지국가 담론의 본래적 의미를 복원하는 방식의 ‘응전’을 요구한다. 진보언론은 물론 진보진영 모두가 그러한 응전을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기가 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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