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중 한 장면

<비념>을 제작한 김민경 프로듀서는 오랜만에 고향인 제주를 찾았다가 가족과의 대화 중 외할아버지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너희 할아버지 4.3 때 돌아가셨잖니.” 어른들은 모두 그가 이미 알고 있지 않냐는 듯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그는 이전에 외할아버지의 죽음의 내력에 대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가족 내력을 아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싶었는데, 김PD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얘기는 물어보지 않는 이상 먼저 쉽게 얘기해주기는 어렵죠.” 순간 나 역시 내 친할아버지의 내력은커녕 그분의 함자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뿐인가, 나는 내 할아버지의 형제가 정확히 몇인지, 그분들이 과연 살아계신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 내 할아버지 집안의 내력도 대충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 한쪽에 걸쳐져 있다고 들었다. 자세히 물어보지 못한 건 우리 부모님 역시 잘 알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안다 해도 애써 잊어버리려 하신 흔적도 보였다. 아마도 당신 자식들이 연좌제로 고생할까 걱정하셨기 때문이리라. 난 그저 내가 친일파의 손녀가 아니라서 안도했었다. 이게 부모 세대와 내 세대의 차이라면 차이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즈음 만나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고 있던 임흥순 감독과 이 이야기를 나눈 김PD는 이후 제주에 함께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집안의 내력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영화가 바로 임흥순 감독의 단편인 <숭시>고, <비념>은 말하자면 <숭시>의 장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숭시>는 올해 네마프의 개막작 중 한 편으로 상영되었고, <비념>은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시네마디지털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곧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도 상영될 예정이라 한다.

▲ 영화 중 한 장면

영화 속에는 김민경 PD가 어머니, 외할머니와 함께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어머니는 10년 만에, 외할머니는 9년 만에 가느라 처음엔 무덤을 제대로 찾지도 못한다. 제주에서 벌채는 온전히 남자들의 몫(권한?)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4.3 당시 특히 학교의 젊은 선생들이 빨갱이 주모자로 몰려 잡혀가 총살을 당했다고 하는데, 김PD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21살의 나이에 총살을 당했다. 하 어수선했던 그 시대, 자식이 일본에 유학가고 싶다는 것을 한사코 말렸던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꽃다운 자식이 그렇게 죽은 뒤 자신을 탓하며 정신을 놓았다. 생활과 생존을 이어갈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목 놓아 울기만 하다가 결국 아들의 뒤를 따랐고, 그 곁에 묻혔다고 한다. 새파란 나이에 과부가 된 김PD의 할머니, 즉 강상희 할머니는 자신의 오빠의 가족에 마음을 의탁하며 딸을 키워냈다.

▲ 영화 중 한 장면

하지만 영화 <비념>은 그저 어느 가족의 비극적인 사건과 내력만을 담는 것이 아니다. 이 가족의 사건 자체가 곧 개인의 비극이 역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예시일 뿐 아니라, 제주가 거쳤던, 지금도 겪고 있는 상처와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4.3 당시 총살 장면의 기록화면부터, 지금 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까지. “제주 곳곳, 무덤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카메라가 보여주는 제주의 풍경들에는 바다 냄새 사이로 눈물 냄새가 스며 있고, 바람 소리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과 흐느낌이 섞여있는 듯하다.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 많아 ‘삼다도’, 서울 사람들에겐 그저 ‘가장 멀리 있는 이국풍의 관광지’로 인식되는 제주엔 사실 죽음과 눈물이 더 많은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비념’인 것인가. ‘비념’은 원래 제주에서 무당 한 명이 요령만 흔들면서 벌이는 작은 규모의 굿이라 한다. 영화 <비념> 자체가, 어쩌면 일종의 ‘비념’일지도 모른다. 무당은 요령을 흔들며 ‘신’ 혹은 죽은 이의 이야기를 전하지만 감독은 카메라에 산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다.

▲ 영화 중 한 장면

4.3의 이야기가 이제 널리 알려진 지금도 우리는 이 사건의 비극과 고통을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64년 전 일어난 일이지만 상처와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내가 얘기하기 시작하면 사흘 밤도 모자랄 것”이라던 할머니가 막상 카메라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오사카에 살고 있는, ‘제주를 탈출한’ 한 할머니는 “한국, 거기는 아주 나쁜 곳”이라 잘라 말한다. 자식과 손주들이 웬만하면 일본에서 뿌리 내리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오랜 아픔의 세월을 겪은 이들도 이제 하나둘 세상을 떠난다. 영화의 초반, 강상희 할머니의 오빠가 돌아가신 후 장례굿의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데, 이분은 처음 임흥순 감독과 김민경 프로듀서가 영화를 만들던 당시 아직 생존해 계시면서 그 한의 과거를 뜨문뜨문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해주셨던 분이다.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이들의 죽음 역시 이 영화가 안타깝게 기록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 영화 중 한 장면

한 편의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적어도 고통과 상처 속에서 입을 여는 것조차 쉽지 않고, 심지어 그 입을 가로막혔던 이들의 눈물을 기록하는 것만은 할 수 있다. 그것이 과연 현실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작은 ‘비념’이 될 수는, 그리하여 아직 남아있는 자의 고통을 조금쯤은 어루만져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눈물 사이로 뜨문뜨문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제주의 공기에 배어있는 그 한숨과 눈물을 같이 느끼는 것이다. 영화 <비념>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비념>은 우리 극장에서 오멸 감독의 <이어도>와 함께 상영되었는데, <이어도> 역시 제주 4.3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영화다. 오멸 감독은 역시 4.3을 다루는 <지슬>이라는 신작의 후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지슬>은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일 예정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이 영화들이 모두 극장에서 정식 개봉해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영화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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