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진보당 혁신파 비례대표 의원들 (왼쪽부터 김제남, 정진후, 박원석, 서기호 의원)이 오늘 오후 정론관에서 통합진보당을 떠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인용되어 참신함이라곤 하나도 안 남은 듯한 마르크스의 “한 번은 비극, 한 번은 희극”이란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물론 통합진보당 얘기다. 기억 속에서 윤색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2008년의 민주노동당 분당은 이보다는 훨씬 품위있었다. 선도탈당파는 먼저 당을 빠져나왔고, ‘심상정 비대위’는 임시 당대회에 자신들이 상정한 안건이 부결되는 순간 당을 이탈했다. 언제나처럼 당대회 사회를 맡은 PD 성향의 이덕우 변호사는 NL들에게 ‘당신들이 어떻게 하면 당대회 절차를 지키면서 회의를 끝낼 수 있는지’를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다음날부터 PD들은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민주노동당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7월에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한 첫 번째 제명안이 의원총회에서 논의되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안 풀릴 줄은 몰랐다. 광역시도당 당기위의 1심, 중앙당 당기위의 2심을 거쳐 의원총회에서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 확정되는 의원 제명안은 마지막 순간에 김제남 의원의 변심으로 불발되었다. 13명 현역 의원 중 7명을 확보해야 했던 혁신파는 분루를 삼켰다. 사실 제명안이 통과되었다 하더라도 이석기․김재연 의원은 무소속으로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통합진보당 사태가 봉합되었다 하더라도 ‘눈가리고 아웅’이란 비판이 제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과의 타협의 지점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없이, 그저 자기 요구조건만 관철하기 위해 주어진 절차를 최대한 활용하는 구당권파의 특성은 그 ‘눈가리고 아웅’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의원 제명 과정의 만화경

김제남 의원이 제명안을 부결시킨 이후부터는 사태가 더 암울하게 되었다. 진보정당의 두 번째 분당은, 그리고 그것을 위한 두 번째 의원 제명안의 상정은, 말 그대로 희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석기와 김재연을 제명하려던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제명당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정당법상 비례대표 의원은 스스로 탈당하면 의원직이 상실되지만 제명당할 경우엔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생각을 바뀌면서 생긴 문제는 의원총회를 어떻게 소집할 것인가였다. 당규에서 의원총회를 소집할 권한은 원내대표와 최고위원회에게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의원 제명안이 ‘나가리’가 되는 순간 심상정 원내대표가 사퇴해버렸고 김제남 의원을 제명하곤 나머지 대표단도 줄줄이 다 사퇴해 버렸기 때문에 원내대표단이 공석이 되었다. 최고위원회의 소집은 아무래도 당 대표가 할 수밖에 없는데 강기갑 당대표는 분당을 막아보겠다며 단식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당기위에서 제명하는 것까진 문제가 없는데 의원 총회를 여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양측의 ‘꼼수 싸움’이 시작되었다. 지난 일요일 사실상 분당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 이후 혁신파는 우르르 주소를 서울로 옮겨 서울시 당기위에서 제명안을 처리하기로 했다. 서울시당은 확실하게 혁신파가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명사유는 김제남 의원의 경우 첫 번재 제명안에 기권표를 던진 것이 되었고 나머지 의원들의 경우 분당을 획책했다는 것이 되었다. 분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분당을 획책했다는 사유로 자신들을 제명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기위는 규정상 2심을 해야 하지만 1심에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결정이 확정되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제명이 확정되었다.

이때부터 절차에 대한 양측의 의견이 갈렸다. 구당권파는 중앙위를 소집하고 당규 개정을 하여 의원총회를 여는 방식을 바꿨고 바꾼 방식으로 의원 총회를 열어 오늘 오전에 오병윤 의원을 원내대표로 뽑았다. 또 그들은 의원총회에서 의원 제명안에 필요한 사람 숫자도 기존의 과반에서 2/3 의원 찬성으로 바꾸었다. 혁신파 의원이 과반은 되지만 2/3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중앙위가 적법하다면 혁신파의 ‘셀프제명’은 불가능하다. 혁신파가 의원직을 유지한 채 탈당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중앙위를 옹호하는 그들의 논거는 중앙위 소집을 당대표에게 요구했지만 당대표가 주어진 기간 안에 소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위가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혁신파는 강기갑 당대표가 소집하지 않은 중앙위는 ‘불법 중앙위’라 본다. 그들은 결국 강기갑 대표를 통해 최고위원회를 열었고 최고위원회의 권한으로 오늘 오후에 의원 총회를 열어 혁신파와 함께하는 네 명 비례대표 의원에 대한 ‘셀프 제명’안을 통과시켰다. 구당권파는 이 상황에 반발하여 두 개의 의원총회 중 어느 쪽이 적법한 것인지 법정까지 가져가서 가려보겠다는 상황이다.

'치킨 게임'에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진보정치

먼저 구당권파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혁신파가 함께 당을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내세운 조건들을 철저하게 유린했으면서, 절차적으로만 그들의 탈당을 지연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요, 맹수 앞에서 땅속에 얼굴을 박은 타조의 꼴이다.

혁신파의 꼴 역시 우습게 되었다. 비례대표 의석을 포기하기도 어렵고, 당내 투쟁을 지속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명분을 찾기 어려운 ‘셀프 제명’안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몸집을 불려서 신당을 창당해야 국고보조금도 늘어나고 민주당과의 야권연대 협상에 대한 희망도 남겨둘 수 있다는 계산에 근거한 정치공학적 선택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선택은 그동안 진보세력이 비판해왔던 국민의 정부 시절의 ‘의원 꿔주기’(연합대상인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 유지를 위한)만의 정당성도 찾기 어려운 선택이다. 또 그들의 ‘계산’에 들어간 야권연대의 성사여부에 회의적인 시선도 상당하다. 진보정당 운동에 밝은 한 관계자는 “사실상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는 구당권파 측은 물론 혁신파 측에서도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옳다. 그 부분을 포기해 버리면 최소한의 명분을 살리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또 한 번 최악의 수를 두었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혁신파 측에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은 통합진보당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 상황이 얼마나 황당한지를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통 큰 통합'을 말할 것인가

통합진보당엔 1997년 이후 진보정당 운동의 조직적․정책적 역량이 응축되어 있고 노회찬․심상정 의원 등은 과거 17대 국회에서 의정활동의 우수함도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런 그들이 현재 은수미나 장하나 의원 등 민주통합당 내 초선의원만큼도 활약하지 못하는 건 현재 통합진보당이 사실상 ‘뇌사’ 상태의 정당이기 때문일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주창자들은 진보정당에 부족한 현실정치 감각을 기르기 위한 ‘통 큰 통합’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모든 통합이 시너지 효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일 게다. 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간 이후 진보정당 운동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교훈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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