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헌화를 막는 김정우 쌍용자지부장의 모습을 담은 두 신문의 1면 사진. 왼쪽은 조선일보이고 오른쪽은 한겨레다.

여기 하나의 순간에 대한 두 개의 사진이 있다. 전태일재단 방문을 거절당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전태일 다리’에 헌화를 하려는 순간이다. 왼쪽에 있는 조선일보 1면 사진과 오른쪽에 있는 한겨레 1면 사진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불과 1초도 안 될 것이다. 박근혜의 눈은 자신을 막아선 노동자를 보지 않는다. 오로지 동상만을 향하고 있고 사교적인 미소를 짓는다. 한편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 김정우는 지난 몇 주간 새누리당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며 면담을 요구했을 때 무시했던 박근혜가 ‘전태일 다리’에 헌화를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경비원이 박근혜가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는 순간의 ‘컷’을 방해하는 노동자 김정우를 끌어내려고 멱살을 잡는다. 이 세 가지 의지가 결합하여 오늘의 한국 사회를 드러내는 기가 막힌 한 ‘컷’이 나온다.

그러나 조선일보 사진은 박근혜의 헌화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위협적인 몸짓’을 강조하려는 듯하고, 한겨레 사진은 박근혜의 헌화를 막아선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경비원에게 멱살을 잡혀 ‘주저앉은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박근혜가 장준하 유족이나 김대중 노무현 전직 대통령 유족도 아닌 ‘전태일’이란 상징에 접촉하려 했다는 사실은 오늘의 정치현실에서 보아도 뜨악스럽고 불편하다. 그리고 이 ‘특이한 접촉의 파열음’을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전유하려 한 신문이 조선일보와 한겨레 둘이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다른 주요 신문들은 이 순간의 사진을 1면에 담지 않았다.

전태일에 대한 접근, 장준하와 김대중에 대한 사과와는 다르다?

화해하고 싶은 박근혜가 폭력적인 노동자에게 가로막히는 모습, 화해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싶은 박근혜가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끌어내는 모습. 두 신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렇게 대비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박근혜의 ‘광폭행보’에서도 ‘전태일’이 특히 두드러진 반발을 이끌어내는 이유일 것이다. “죽은 노동자에게 꽃보다는 산 노동자에게는 밥을” 이라는 요구는 합당하지만, 정말로 박근혜가 전태일을 찾는 장면이 뜨악한 것이 그 때문 만일까?

생각해봐야 할 것은 박근혜가 전태일재단에 접근하는 것은 장준하 유족이나 김대중과 만나 ‘사과’를 하는 것과 전혀 다른 맥락이라는 것이다. 장준하와 김대중은 박정희 치하에서 박정희의 의지로 인해 직접적인 탄압을 받은 사람들이다. 장준하의 죽음에 박정희가 개입해 있을 거라는 의혹은 해명되지 않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의 배후에 박정희가 있었을 거란 추정도 상식적이다. 그래서 박근혜는 장준하의 유족이나 김대중에 대해 “아버지로 인한 피해에 사과드린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태일에 대해서는 상황이 다르다. 전태일은 시대에 항거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이다. 반독재투쟁과는 또 다른 문맥에 서 있다. 물론 박정희는 그 시대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사람이란 점에서 전태일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닌다. 그러나 박정희만이 그 시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 책임에 대한 논쟁의 결은 다양할 수 있다. 또 그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에 박정희가 어떻게 조응했고 어떻게 비껴나갔는지를 묻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실은 장준하 유족이나 김대중에 대한 사과도 그러한 물음 위에서 진행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박근혜의 방식이 아니다. 박근혜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시대적 맥락을 비껴나 철저하게 ‘내면’을 파고든다. ‘의도’를 묻고 거기서 ‘선의’를 추론한다.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습니다”라는 주장이나 “아버지가 죽지 않으셨다면 대통령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을 겁니다”라는 단언이 그래서 나온다. 물론 여기에도 박정희가 산업화라는 시대의 역할을 위해 한 몸을 희생했고 그 과정에서 독재에 항거하거나 산업화에 희생된 ‘희생자’들이 나왔다는 서사는 있다. 여기서 장준하나 김대중은 전자에 해당할 것이고 전태일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서사’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한 부분을 ‘선의’로 뭉뚱그리고 지나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시대인식’이 아닌 ‘내면의 재구성’에 불과하다.

그래서 박근혜는 ‘아버지가 산업화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나온 희생자들’에게 사과만 하고 다닐 수 있을 뿐 ‘아버지’의 공과 과를 식별해낼 수는 없다. 그래서 5.16 쿠데타만 ‘최선의 선택’이 되는 게 아니라 유신 역시도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할 사건’이 되어 버린다. 이는 조선일보조차도 부담스러워 하는 바다. 조선일보는 사설이나 류근일 전 주필의 칼럼을 통해 일관되게 5.16에 대한 평가와 유신에 대한 평가를 구별해 내려고 한다. 판단의 근거는 크게 보아 두 가지다. 하나는 결과주의의 관점이다. 5.16은 경제성장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평가가 되고, 유신은 측근의 총탄에 맞아 죽은 비극적 결과로 끝났기 때문에 평가를 받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국민여론이다. 조선일보는 5.16에 대해선 대부분의 국민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테지만 유신에 대해선 대부분의 국민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할 거라는 것을 근거로 두 사건을 차별화한다.

그러나 사건의 결과나 국민여론은 해석을 위한 지표는 될 지언정 해석은 아니다. 결과와 여론만으로 사건을 평가한다는 건 결국 평가가 아닌 것이다. 국민여론이 대체로 5.16엔 관대하고 유신에겐 관대하지 못한 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공을 계승하겠다는 보수세력조차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니 그에 대한 평가는 ‘산업화의 영웅’과 ‘폭압적 독재자’의 극과 극으로 갈릴 수밖에 없다.

1960년대의 박정희와 1970년대의 박정희를 구분해야

1961년의 쿠데타가 민주헌정을 뒤엎은 건 분명하지만 당대의 지식인이나 민중들이 그것을 기다리고 환호한 측면도 있었다. 나세르와 같은 반제국주의 성향의 제3세계 독재자에 대한 희구가 초기 5.16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사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 제3세계엔 유행처럼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5.16 역시 그런 시대의 산물이다. 장준하의 <사상계>조차 곧 비판자로 돌아서기는 하지만 초기에는 군사정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민정이양을 약속했던 군사정부의 수반 박정희가 1963년에 윤보선과 대결했을 때의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윤보선은 귀족 집안의 노정객처럼 보였고 박정희는 시대를 바꾸려는 청년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박정희가 “민족을 위한 자유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출사표를 던졌다면 윤보선은 박정희가 빨갱이이며 공화당이 북한 간첩의 공작금으로 만들어진 정당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박정희를 친일파이며 남로당 인사라고 비판하는 선봉에 선 것이 장준하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남로당 전력에 대한 언론보도를 통제하면서 윤보선 측에게 메카시즘적 공세를 중단하라고 발표한다. 그리하여 그는 6.25 전쟁 과정에서 ‘빨갱이 사냥’의 고난을 겪은 영호남 농촌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는 기염을 토한다. 윤보선 측은 유세 현장에서 '영남 지방에 빨갱이가 많다'는 자폭 발언을 하면서 박정희가 '영남 지역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전적으로 협력했다. 그리고 선거결과는 박정희가 역대 최저인 15만표 차(46.6%vs45.1%)로 승리하는 것이었다.

이 선거는 비교적 부정이 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권력의 속성을 생각해 볼 때 쿠데타 세력이 선거에 패배했다고 순순히 정권을 넘겼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만약 1963년 상황에서 군부가 또 한번 쿠데타를 일으켜야 했다면 박정희가 그 후 정국을 장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선거에서 패배한 후에도 권력을 내놓지 않다가 민중혁명이나 역쿠데타를 통해 종말을 맞이했다면 오늘날에도 논쟁거리로 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윤보선과의 두 번의 대선에서의 승리, 1963년의 신승과 1967년의 제법 격차를 벌린 승리를 거둘 당시의 그는 결국 산업화에 대한 인민의 요구를 대변하는 역사적 도구로서, 시대정신을 어느 정도 담지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민주화세력과 갈등을 빚었고, 그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더욱 경제성장에 치중했는데, 그렇기에 산업화에 대한 인민의 욕구를 일정 부분 대변하면서 지지를 이끌어내는 부분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산업화의 공로를 박정희라는 한 영웅의 과업으로 평가하는 시선을 부인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접근방법이다.

이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가 달랐다는 것일 게다. 박정희의 옹호자들은 1974년의 유신을 통해 그의 시대를 구분하지만, 통치의 폭압성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유신은 ‘박정희의 몰락을 가져온 원인’이라기 보다 ‘박정희가 민심을 잃어버리면서 나온 결과’였다. 박정희는 더 이상 선거를 통해선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유신으로 이행했고 그런 깨달음을 준 것이 1971년의 대선이었다. 전태일과 김대중이 역사적 맥락을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1970년 11월에 전태일은 불타올랐고 김대중은 1971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 구현’을 말했다. 그해 대선에서 박정희는 94만표 차로 승리했으나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노골적인 부정선거일 뿐이었다. 국가예산의 10%를 대선에 쓰고 ‘문둥이는 문둥이를 찍으라’며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선동했음에도 김대중의 장충동 유세 때 서울시민 500만 중 100만이 모이는 걸 본 박정희는 개표부정까지 저질러야만 했다. 전남의 무효표가 서울의 무효표보다 두 배가 많았다.

정리하자면 박정희는 쿠데타를 통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지만, 그의 통치기간에서 그의 목표지향과 인민의 요구가 일치했던 시기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그 ‘행복한 일치’의 시기가 끝난 다음에도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전태일이 시대의 모순을 보여주고 김대중이 그것을 정치영역으로 끌어들인 다음의 상황이 그랬다. 다른 방식의 경제성장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닉슨 독트린’이란 시대변화 속에서 다른 방식의 안보․외교 정책의 가능성도 생겨났지만, 박정희는 힘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유신은 그런 선택을 내린 그가 최종적으로 가게 된 귀착점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1960년대에도 한일협정이나 사카린 밀수, 월남파병 반대로 주가를 높였던 장준하는 유신 반대 투쟁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는 과정에 의문사를 당하게 된다.

'광폭'이 '광폭'이 되는 이유

결국 ‘장준하’든, ‘김대중’이든, ‘전태일’이든,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그들을 만나려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상징의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물론 조선일보 등 보수세력의 접근은 그것은 피해가면서 대표적인 국가폭력 사건에 대해 추상적이고 애매한 사과를 하는 정도에 머무른다.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박정희의 공과를 평가하려 했다면 최소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구별해야 했지만 그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얻어낸 과실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고작 이 정도의 절충안도 택한 적 없다. 물론 진보진영 역시 이에 대한 역편향으로 박정희의 시대를 총체적으로 부인하면서 역설적으로 1960년대의 성과를 박정희 개인에게 온전히 귀속시키는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광폭행보’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과거 얘기는 그만하고 미래로 가자고 말을 하지만 과거의 매듭에 대해서 치밀하게 고민하고 정파 간의 최소한의 절충점을 이끌어낸 적이 없다는 엄연한 현실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정치적으로 멀리 있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100% 대한민국’을 말하는 것은 광폭(廣幅)을 하려다 서로 광폭(狂暴)하는 결말을 만들어낼 뿐이다. 박정희의 계승자도 비판자도 그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치밀하게 성찰해 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역사논쟁이 언제나 서로의 정치적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서사로 전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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