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오는 9월 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의 1주기다.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을 통해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었고, 그 아들이 극우정당의 대선후보조차 '화해'를 시도하는 상징이 되는데 기여했다. 1주기를 맞아, 미디어스는 이소선 여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어머니>를 통해 그녀의 삶을 반추하며 릴레이 기사를 이어간다. 첫 번째 리뷰는 미디어스에 <노바리의 시네마 돋보기>를 연재하는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노바리님이 보내왔다.

<어머니>를 본 날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 함께 보았다. <범죄와의 전쟁>이 한국의 어떤 아버지상을 그린다고 할 때, 두 영화는 완벽하게 대비를 이룬다. 한쪽에는 공무원으로 누구나 조금씩 손대는 뇌물을 받다가 희생양으로 명퇴를 당한 뒤 어둠의 세계의 제왕이 되는 아버지가 있다. 그가 그 길을 선택한 것은 그가 대는 말에 의하면 '자식 때문'이다. 또 한쪽에는 생떼 같은 자식이 (물리적으로) 자살을 한 뒤 그 자식과 비슷한 처지의 생면부지의 남들에게 기꺼이 어미가 돼준 어머니가 있다. 그가 그 길을 선택한 것 역시 죽은 자식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어머니에게 ‘짐’으로 떠안기고 간 부탁이 그것이었다.

물론 모든 아버지와 모든 어머니가 이렇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대비는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한국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전형적인 어떤 상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이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식을 위해서라며 자식에게 공범의 죄책감을 덮어씌우거나 면책권을 요구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저지할 정도로 능력 있지는 못하지만 자식이 안쓰러워 자식이 맞을 때 대신 맞아주고 자식의 아픔을 쓰다듬는 어머니. 물론 우리의 인식 속에 이런 상만 절대유일인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이를 ‘어머니’ 혹은 ‘엄마’라 부를 때 기대하는 것은 <어머니>의 그것에 가깝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할 때의 어머니, 그러나 가부장의 폭력에는 속절없이 당하고 피울음을 우는 어머니. 포근함과 억척스러움을 동시에 동반한 모습. 우리가 이소선 여사에게 기대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것이다.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별명이 단적으로 드러내듯이.

<어머니>가 처음 시작하는 장면에서 내가 당황했던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다. 아니 저분이 저렇게나 작고 가냘픈 분이셨던가. 그리고 저렇게나 늙으셨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쥐면 바스라질 듯한 어깨를 한 저 작디작은 여자가 그 이소선 선생이 맞다고? 나이를 따져보면 ‘저렇게 늙으신’ 게 논리적으로는 맞는데, 내 기억 속에 있던 이소선 선생은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의 듬직한 체구를 한, 정정하고 걸걸하고 억척스러운 검은 머리의 모습이다. 오래 전 매체의 사진에서 접한 어떤 이미지가 시간에 따른 업데이트를 거치지 못한 채 고정된 탓이 제일 크겠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닐 거다. 나는 이소선 여사를 기억 속에서 어느 한 모습으로만 박제시켜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태일의 어머니, 노동자들의 어머니, 그리하여 자식인 노동자들을 탄압할 때마다 나가 맨 앞에서 ‘맞장 뜨며’ 싸워주는 억척스러운 엄마, 그리하여 시간성 따위는 그냥 초월한 존재. 전태일이 70년대를 숨 쉬었던, 이제는 나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가 된 뜨겁고 평범한 청년이 아닌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를 외치고 불을 뒤집어쓴 ‘열사’로 고정돼 있듯. 이소선이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람, 그러니까 나이를 먹고, 자식을 잃고, 남은 자식을 키우고, 담배를 좋아하고, 거동이 힘들어지면서부터는 다른 사람의 어깨에 기대서만 겨우 걸을 수 있는 작은 몸집의 ‘생활인’인 나이든 할머니-여자는 상상조차 하질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완성된 것은 이소선 여사는 돌아가시고도 몇 달이 지난 뒤다. 이소선 여사가 소천한 건 태준식 감독이 영화의 촬영을 마치고 한참 편집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영화는 갑작스런 타계 소식에 추가 촬영을 해야 했고, 아마도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마지막 숨을 다하기 직전 병원에서의 모습과 장례식의 모습까지 담겼다. 결과적으로 이소선 여사의 마지막 시간들을 죽음부터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식의 구성이 되었는데, 아마도 감독의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하고도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처음 영화를 기획했을 때와 전제가 바뀌어버린 상황에서, 내가 그분의 타계가 (지금도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 것 정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복잡하고 큰 감정들과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소선 선생의 삶의 마지막 일상들을 담담하게 비추려던 부분과, 돌아가신 후 남겨진 우리들이 무엇을 기리고 계승해야 할지 추모하는 부분이 어색하게 공존하는 이 ‘어쩔 수 없는’ 어정쩡함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이 영화가 너무 이르게 도착한 추모곡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감독 역시 이 부분을 가장 고민했다고 고백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하긴 감독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분이 가신 후, 그것이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비명횡사’가 아니었음에도 남겨진 우리는 그저 황망해할 수밖에 없음을, 여전히 선생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기대하며 당황과 충격을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오히려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나중에야 들었다.

이소선 여사가 가신 직후 ‘어머니’라는 호칭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일각에서 있었다. 많은 남자 어른들은 ‘선생님’이지만, 여자 어른들은 ‘어머니’ ‘할머니’ ‘언니/누나’ 등의 가족 호칭으로 불리는 우리의 말버릇이 실은 가부장제에서 근거하지 않느냐는 의문. 흘려듣듯 이 논란을 전해 들으며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이 문제제기가 한편으로 옳은 원칙적인 물음이면서도, 한편으로 대단히 틀렸고 심지어 무례한 종류의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이 문제제기는 너무도 타당하다. 우리는 그분이 ‘노동운동가’로서 해오신 공적인 업적과 성취, 그 큰 발걸음을 ‘어머니’라는 사적 호칭 앞에서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호칭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소선 여사를 실제로 어머니라 부르며 노동운동 일선 혹은 주변에 있었던 ‘선배들’과 달리 운동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시기에 20대를 보냈거나 그보다 더 젊은 이들이 이소선 여사를 쉽게 ‘어머니’ 혹은 ‘엄마’라 부르기는 힘들다는 데에도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한 문제제기는 그렇기에 새로이 이소선 여사, 아니 이소선 선생과 관계를 맺게 되는/맺을 이들에게는 매우 유효하고 소중한 질문이며 내게도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이소선 선생을 ‘어머니’라 불러온 ‘선배’들의 시간, 그 호칭을 통하여 정립해온 관계와 역사가 너무 쉽게 부정되는 건 아닐까, 그것이 선생을 ‘어머니’로 불러온 이들에게는 어쩌면 그 개인별 사적이고 감정적인 부분을 변화시키라는 폭력적인 강요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도 당신께서 스스로 노동자의 ‘어머니’ ‘엄마’로 불리기를 자처하셨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껄끄러운 질문이 남는다. 보통 그런 식의 ‘어머니’ 상은, 사실은 딸보다 아들의 것이지 않은가... 한없이 헌신적이고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되는 어머니의 절실하고 숭고한 희생과 헌신, 그리고 그런 어머니에 대한 무한한 찬양과 그리움은 어머니와 딸보다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서 주로 나열되는 특징들이다. 무남독녀 가정도 많은 지금의 상황에서야 딱히 그렇지는 않지만, 보통 아들에 편중되곤 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딸에게 그러한 희생과 헌신이 ‘내 것’도 아닐뿐더러 ‘누군가에게 헌신할 것을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에서 이소선 선생과 따님인 전순옥 선생의 사이가 썩 가깝진 않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어쩌면 남은 자식들에겐 “살아있는 자식들보다 죽은 큰아들이 더 중요한” 엄마에 대한 원망이 크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차남인 전태삼 선생보다 따님인 전순옥 선생에게 더 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조심스레 들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뒤 오롯이 노동운동과 노동자에 바쳐진 삶에서, 남은 가족들이 받았을 상처는 내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딸인 전순옥 선생에겐 좀 더 크고도 예민한 종류의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이 영화가 이소선 선생을 굳이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정의한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그분을 잘 알지 못하는 나도 그분의 영면 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간 말을 잊지 못한 채 눈가가 뜨거워져 왔다. ‘선생님’이라 부르기엔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어쩐지 가깝고 살갑고, 그러나 ‘어머니’라고 입 밖에 내어 부르는 건 어쩐지 어렵고 난처하고 조금은 주저하게 되는 분. 주의 깊은 독자라면 ‘선생님’이라 호칭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거리감에 대한 거부감과, 그럼에도 ‘어머니’라 부를 수는 없는 난처함 사이에서 나 역시 지금까지도 허둥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 챘으리라. 아마도 무수한 선배들이, 심지어 어른들이 그분을 거리낌 없이 ‘어머니’라 불렀던 건, 그분에게 존경하고 어렵게 예의 차리며 모셔야 할 선생님보다 훨씬 가까운 관계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아마도 어떤 어른과 선배들은 ‘어머니’보다도 ‘엄니’ 내지 ‘엄마’란 호칭으로 선생을 불렀을 것이다. 말년에 “‘전태일 열사’라는 말도 싫다”고 손사레를 치셨던 분께서, 아마도 2000년대에 들어 젊은 친구들이 와서 쭈뼛거리며 ‘선생님’이라 불렀다면 꽤 난감해 하셨을 것도 같다. 아마도 나 역시 생전에 선생을 직접 뵈었다면 차마 ‘어머니’라는 호칭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어색하게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속으로는 그를 어머니, 내지 엄마라 부를 수 없는 데에 이상한 설움과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다.

곧 1주기다. 하지만 나는 그분이 아직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리고 평안히 여생을 보내고 계실 것만 같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어머니>를 보려고 찾았더니 다행히 아직 인디스페이스 한곳에서 여전히 상영을 하고 있다. 결국 게으름 때문에 이 글은 반 년 전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야 했지만, 지금 <어머니>를 다시 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지... 그분의 빈자리를,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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