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진보당에서 구당권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상규 의원(왼쪽)과 혁신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강기갑 대표(오른쪽)의 모습 ⓒ연합뉴스

통합진보당 사태로 여럿이 멘붕을 겪고 있는 것 같다. 통합진보당 창당 시에 진보신당에 남기로 결정했던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도 이 사태의 결말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이 사태는 결국 통합진보당만의 실패가 아닌, 87년 이후 이어져 온 진보정치 자체의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NL들이 변했을 거란 그들의 믿음

때문에 진보정치를 지지해온 많은 사람들이 이석기·김재연으로 대표되는 통합진보당 구당권파, 소위 NL들의 행태에 분개하고 있다. 진보정치의 순수한 후원자들이나 통합진보당 내 참여계 인사 등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이해할만 일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서 그들의 행태를 겪을 만큼 겪은 사람들이 이제 와서 볼멘소리를 하는 것은 좀 난처하다. 이미 다 알면서 그들과 당을 함께하기로 했던 것 아니었는가? 도대체 이럴 거면 왜 그들과 다시 한 번의 동거를 하기로 결심했었던 것인가?

아마 이러한 결심의 첫 번째 근거는 ‘NL들이 변했을 것이라고 믿어서’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민주노동당 분당의 시기에 당시 자주파로 불렸던 당 내 거물들이 ‘비례대표 불출마’ 등을 선언하며 패권주의적 행태에 대한 반성문을 제출했던 것이 그러한 판단의 근거였을 것이다. 이미 한 차례 분당을 겪어봤으므로 또 다시 패권주의적 전횡을 저지를 경우 지금과 같은 엄청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모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NL들의 패권주의적 행태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는 점이 결과적으로 증명된 셈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PD를 비롯한 다른 파벌들은 패권주의적 행태를 보인 일이 없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통합진보당 사태는 다들 패권주의적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NL의 그것은 규모와 정도가 다르다는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NL인사들의 타고난 성정이 특별히 사악해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다수의 NL들은 한국 사람의 평균 이상으로 선하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남들과 NL들의 무엇이 달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것은 ‘사상’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NL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수정하지 않는 한 패권주의적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대중을 배반한 '대중친화적 행동양식'의 역설

사상이라니, 도대체 무슨 사상을 얘기하는 것인가? 이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앞서 던진 물음의 두 번째 근거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자. NL의 전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통합진보당의 창당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두 번째 판단 근거는 진보신당에 남은 답답한 사람들 보다는 NL들이 대중정치라는 측면에 있어서 현실과 훨씬 더 잘 조응할 수 있으리라는 추측이었을 것이다.

학생운동의 시대부터 NL들은 대중친화적 행동양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사람을 잘 사귀고, 상대를 따뜻하게 대할 줄 알며,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다. 늘 남들을 까칠하게 대하면서 논리적인 사고를 강요해야만 하는 PD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이러한 특성이 우리가 말하는 ‘대중정치’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점이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났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이러한 특성은 ‘사상을 같이하는 동지는 끝까지 우리 식구’라는 온정적 표현으로 귀결되었다. NL들 입장에서 이석기·김재연 의원이 사상적으로 변절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다수의 대중들이 그것을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지를 조직에서 내쫓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민주노동당 분당의 구실이 됐던 ‘일심회 관련자 제명’을 당시 당 내 자주파가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점과 유사한 것이다. 이제 와서 ‘이석기 사퇴론’이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지금까지 보여줬던 ‘대중친화적 면모’ 또한 그들의 신념을 지키는 도구로서 활용된 것이지, 그것 자체가 어떤 대중적 진보정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들 사상의 이러한 측면을 수정하거나 폐기하지 않는 한, NL발 패권주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늘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그들이 반성하고 또 언젠가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믿음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정이 이런데 그들의 개과천선을 어떻게 낙관하겠는가? 이제는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 됐다.

그렇다면 앞으로 통합진보당 혁신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여기에 대해서는 각각의 계파마다 판단이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유시민 전 대표 등을 중심으로 하는 참여계의 경우 조직분리를 거의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기층 당원들의 탈당이 가속화되는 상황 속에서 당내투쟁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진보신당을 탈당해 통합진보당 창당에 함께한 심상정, 노회찬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연대계의 경우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탈당했는데 통합진보당을 또 탈당을 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혁신파의 일원인 인천연합의 경우 그래도 범NL그룹의 일부로서 당내에서의 투쟁은 전개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탈당을 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다.

혁신파의 계산 : 야권연대와 민주노총

그러나 어쨌든 이들이 향후의 정국에도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제각기 행동할 수는 없는 입장임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탈당을 하는 사람도, 당 내에 남아있는 사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때가 되면 함께 움직일 수 있는 틀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향후의 흐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때’란 언제인가? 그것은 대선에서의 야권연대가 다시 쟁점이 될 때다. 이석기·김재연으로 대표되는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의 경우 야권연대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이들과 야권연대를 해봐야 중간층의 미움만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통합진보당 혁신파가 이들과 분리되어 야권연대를 추진할 수 있다면 민주통합당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

따라서 그게 무슨 단체의 결성이 됐든 재창당이 됐든 통합진보당 당적의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진보정치의 혁신이라는 깃발을 들고 민주노총 등의 대중단체와 접촉하고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틀이 존재하면 통합진보당 혁신파에게도 대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누가 대선에 출마할 것인지, 구 당권파 측의 대선 대응 계획은 무엇인지를 두고 정리하는 단계를 또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출마할 ‘사람’만 정해진다면 진보정치 혁신의 깃발을 들고 대중단체들의 지지를 받아 민주통합당 후보와 단일화를 하고 반대급부로 정권의 일부를 분점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방법이 거의 유일한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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