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때,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클래식 프로그램을 듣다가 MC가 퀴즈를 내면서 "뽑힌 분에게 AM, FM 겸용 라디오를 준다"기에 얼른 엽서를 찾아서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적어 방송국으로 보냈었다. 문제는 잊었지만 내가 생각한 답은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이었다. 나는 "정답: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고 써놓고 엽서 뒷면이 너무 공백이 많아서 붉은 형광펜으로 한 겹인가 두 겹 쯤 정답 주변을 견고한 성곽처럼 그어놓았다. 정답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확고함과 더불어 '이렇게 해놓으면 좀 더 눈에 띄지 않을까'하는 얄팍한 생각도 있었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다.

며칠 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답을 발표했는데 신기하게도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정답이었고 이어 당첨자 발표의 시간, 내 주소와 이름이 불리어지는 것이 아닌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오는 이름 석자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것이 방송사에 엽서를 보낸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라디오에 보낸 사연 당첨돼 받아본 '공짜 선물'의 추억

나보다 더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청취자들은 DJ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만큼 예쁜 엽서를 보내 너도 나도 라디오에 소개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터인데 이름이 특이해서였을까, 나같이 담백한 엽서가 뽑혔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아무튼 이름이 불리우는 순간 야밤에 하숙집을 휘젓고 뛰어다니며 "내가 뽑혔다"고 방마다 자랑을 했더랬다.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며칠 뒤 내 이름이 적힌 손바닥만한 빨간색 AM, FM 겸용 라디오가 집으로 배달되었고 그 상품을 아주 오랫동안 보물 1호로 간직했던 기억이 새롭다.

무엇이 그리 즐거웠을까? 공짜 선물은 누구나 좋아한다. 더구나 그 선물을 방송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선택되어졌다는 것이 삶의 양념처럼 신선하고 즐거운 이벤트였던 것 같다. 재주 좋은 사람은 방송사 프로그램마다 사연을 보내 한 살림 장만한다던데, 그것도 대단한 정성이다.

내가 PD가 되어 이제 누군가를 지목하고 선별해서 상품을 주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책임감이 새로웠다. 사연 하나 하나가 반갑고 고맙다. 혹여 상품에 탐이 나서 돌아가며 투고하는 전문 투고꾼도 있겠지만 가식적인 그 마음이 금방 드러나게 된다.

▲ 김사은 PD가 제작하는 원음방송 라디오프로그램 '아침의 향기' 홈페이지
메이저 방송사의 유명 프로그램은 지방에선 상상하기 힘들만큼 빵빵한 스폰서와 상품이 줄을 잇는데 제작자의 입장에서 무지하게 부럽다. 우리 애청자들은 작은 선물이라도 매우 기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아마도 내가 방송사에 정답을 보내 당첨된 것과 같은 기분이리라.

요즘은 문자 참여가 대세…'탈락의 아픔'까지 보내오는 청취자들

요즘은 엽서를 보내는 이가 드물다. 퀴즈도 문자 참여가 대세다. 30자 내외로 촌철살인의 순발력을 발휘해 제작진의 눈에 띄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우리도 순발력있게 대응해야 한다. 빠른 시간 안에 정답자를 가리고 되도록 많은 청취자에게 기회를 줘야 하니까 중복 당첨자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발표를 하면 역시 당첨자는 '운수대통'이라는 둥, 오늘 하루 기분 좋겠다는 둥 즐거운 반응이 이어지고 떨어진 사람들의 아쉬움이 방송국 스튜디오까지 전해오는 듯 하다. 탈락의 아픔까지 문자로 보내오며 다음을 기약하는 충성파도 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아무래도 그 번호가 더 기억되는 건 인지 상정인것 같다.

지난번 개편 때 청취자 퀴즈 참여를 문자로 받으면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문자에 익숙치 못한 중장년층이나 장애인들에게는 참여 기회가 축소되는구나 싶어서 미안했는데 이번 개편에는 퀴즈를 전화 참여로 돌렸다. 문자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일부 참여가 어려운 청취자들이 있고, 전화 참여는 기회는 적으나 접근의 용이성과 정답일 경우 인터뷰 등을 통해 청취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작가의 아이디어에 따라 이번에는 충실하게 방송을 들은 청취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놓았다. 이를테면 오프닝멘트에서 상식 문제를 출제하기도 하고, 청취자 사연과 같은 엉뚱하지만 재미있는 문제로 듣는 즐거움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문제도 맞출 수 있을까?' 스탭들도 의아해하는 문제를 척척 맞춰주는 청취자들 가운데는 스스로 예상 문제를 내고 메모를 하면서 듣는 사람도 있어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개편을 하고 나서 궁금했던 청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답자의 경우는 일단 '땡'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정답을 맞춘 사람은 기본 인터뷰가 진행되기 때문에 특별한 청취자는 기억이 난다. 부안의 A씨는 공장 근로자이고 전주 삼천동의 B씨는 서점을 운영하는 점잖은 목소리의 소유자다. 워낙 저음인데다 박학다식해서 인터뷰하는 동안 금방 기억할 수 있었다.

문자 참여 어려운 청취자들을 위한 무료전화, 그리고 인터뷰 하는 즐거움

엊그제 정답을 맞춘 사람은 정읍의 C씨였다. "어디 사는 누구세요?" MC의 질문에 마치 익숙한 사이처럼 "아, 네, 저 정읍의 C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정말 반가웠다. 내가 기억하는 C씨는 시각장애인이다. 이어지는 인터뷰.

"지금 하시는 일은?"
"아 네, 여기 저기 상담하는 일을..."
"주로 어떤 문제?"
"제가 시각 장애인이거든요. 몇 분 상담을 하다보니까 상담이 계속 늘어서..."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최고로 좋은 상담인것 같아요"

그렇다, 잘 들어주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만큼 좋은 상담이 없을 터이다. 오늘도 청취자에게 한 수 배웠다. 나와 직접적으로 통화한 적은 없지만 나는 벌써 C씨가 좋아진다. 퀴즈 참여를 전화로 택한 것은 이런 분들을 위해 매우 적절한 선택이다. 무료 이용전화 080-200-0978, 0979 비록 두 대의 전화가 청취자의 목소리와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지만 이 통로를 통해 청취자와 우리 방송이, 그분들과 세상이 소통했으면 좋겠다. C씨가 무슨 상품을 받으면 즐거워할까, 작은 상품이지만 이 선물 받고 그분이 잠시라도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20년 전, '정답: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의 엽서를 당첨자로 뽑아준 이 PD님도 같은 마음이셨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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