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봄 '장나라'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파죽지세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명랑소녀 성공기>, 그리고 2005년 말부터 2006년 초까지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거짓말쟁이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로 시청자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마이걸>을 기억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가수 겸 배우 장나라가 연기한 '명랑소녀 차양순'도, 청순가련형 배우 이다해의 이미지 변신이 돋보였던 '귀여운 거짓말쟁이 주유린'도 당연히 기억할 것이다.

부모 위해 희생, 그러나 주체적인 '현대판 심청' 캐릭터

▲ KBS 드라마 '강적들' ⓒKBS
하지만 "가진 밑천이라고는 건강한 신체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그리고 끝장을 보고야마는 끈질긴 승부욕"으로 "수많은 시련과 눈물의 칠전팔기 끝에 꿈에 그리던 청와대 경호실 입성에 성공"한 악바리 같은 여자 '차영진'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30대 여성의 일과 사랑 이야기를 다뤘던 <달자의 봄>의 주인공 '달자'를 통해 명랑하고 쾌활한, 그러면서도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채림'이 청와대 경호실 신입 경호관 '차영진' 역을 맡아 돌아온 <강적들>(강은경 극본, 한준서 연출)의 초반 시청률이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이미 방영이 끝난 드라마의 주인공을 지금 한창 방영중인 드라마의 주인공과 함께 이렇게 한 자리에 호출하는 까닭을 눈치 챈 사람들이 있을까? 만약 잘 모르겠다면 '차양순'과 '주유린', 그리고 '차영진'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라. '장나라'와 '이다해', 그리고 '채림'이라는 각기 다른 이미지의 여배우들이 연기한 인물들이 처해 있는 극적 상황과 역할이 어딘가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다! 그들은 바로 현대판 '심청'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인물들이다. '눈 먼 아비'를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한 '효녀(孝女) 심청'은 한국의 대중적인 이야기 역사에서 '열녀(烈女)'를 상징하는 '춘향'과 더불어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명랑소녀 성공기>의 차양순은 사기도박, 부동산 도박, 자해 공갈 등 사기 범죄자 부모 에게 버림받고 시골에서 할머니 손에 키워져 내세울 것 하나 없지만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심청전>의 심청이가 그러했듯이, <명랑소녀 성공기>의 차양순은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잘 나가는 젊은 사업가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 일한다. 자발적인 의지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부모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만은 심청이나 차양순이나 마찬가지 처지인 것이다.

<마이걸>의 주유린도 심청의 계보에 포함되는 인물이다. 주유린은 천하의 사기꾼인 아버지 덕택에 일본과 홍콩, 마카오 등지를 전전하며 자란 여성이다. 제주도에서 무면허 관광 가이드로 일하며 틈만 나면 허풍을 떠는 주유린이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사기꾼 부녀의 이야기를 그린 <내 사랑 컬리수>이며,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뛰어난 친화력과 화려한 임기응변을 자랑한다. 아버지가 사고를 쳐 전세 자금을 날리고 조직 폭력배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주유린이 오만 방자한 재벌 3세와 '계약 남매'가 되어 펼치는 미워할 수 없는 사기 행각은 심청이를 현대적 변용이다.

'신데렐라' '캔디'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심청'

<강적들>의 차영진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남동생까지 감당해야 할 정도로 차양순이나 주유린보다 더 기구한 팔자다. 할아버지 '차일상(임현식 분)'은 인생의 목표 없이 젊은 손녀딸 부끄러운 짓을 너무 많이 하고 다녀 번번이 손녀딸 지갑에서 돈 나가게 만들고, 아버지 '차광수(오광록 분)'는 음악과 춤에 미쳐 동네 아주머니들을 춤바람의 세계로 인도하고 그로 인한 오해 때문에 경찰서를 안방 드나들 듯이 하며, 하나 뿐인 남동생 '차영구(김시후 분)'마저 보험회사에서조차 기피할 정도로 빈번하게 오토바이 사고를 내고 병원 신세를 지는 폭주족이다. 차영진은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의 사고를 뒷수습하느라 정신없는, 영락없는 심청의 후예이다.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위상이 다른 청춘남녀가 온갖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방영되었던 수많은 드라마에서 반복되면서 '신데렐라' 혹은 '캔디' 또는 '캔디렐라' 콤플렉스라는 용어로 규정되었다. '신데렐라'를 간혹 우리 식으로 표현해서 <콩쥐팥쥐전>의 '콩쥐'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차양순과 주유린을 그렇게 부르고 차영진 역시 그렇게 불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속성을 곰곰이 따져보면 차양순과 주유린, 차영진은 계모 모티프의 '콩쥐'와는 성격이 다르다.

▲ SBS 드라마 '마이걸' ⓒSBS
부모의 빚 때문에 재벌가에 계약직 가정부로 들어간 차양순, 그리고 역시 사고뭉치 아버지 때문에 재벌 3세와 계약 사촌 관계가 된 주유린이 각기 '한기태(장혁 분)'와 '설공찬(이동욱 분)'이라는 재벌과 한 집에서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지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계모 모티프의 '콩쥐'로 볼 수 없다.

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빚 때문에 건달들과 맞서다 청와대 경호원 생활이 위기에 처한 차영진이 동료 '유관필(이종혁 분)', 그리고 대통령의 아들이자 경호 대상인 '강수호(이진욱 분)'와 로맨스에 빠지는 것도 '콩쥐' 유형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런 만큼 부모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도 부모를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그리고 자기 의지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차양순과 주유린, 차영진은 '심청'의 계보에 포함시켜 분류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심청'은 아직 우리 곁에 살아있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심청'은 조선 민중의 일상을 대변한 여성 영웅이었다. 심청이가 효녀라는 칭호를 넘어서 민중의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심봉사만이 아니라 장안의 모든 시각 장애인들에게 세상의 빛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청의 시련과 고난은 심청이가 민중의 영웅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통과의례가 되는 것이다. 심청이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 시련과 고난을 극복한 자만이 영웅의 자리에 올라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무능한 사기꾼 부모 때문에 시련과 고난을 겪던 차양순과 주유린 그리고 차영진이 부모를 부정하고 자기 갈 길을 모색하는 인물이었다면 그녀들은 한기태와 설공찬, 강수호나 유관필과 같은 멋진 '왕자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신데렐라와 캔디라는 용어가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다보니 심청은 별로 주목받지 못한 인물형(人物型)이었다. 하지만 차양순과 주유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드라마에서 심청 유형의 여성 인물은 춘향이나 콩쥐 못잖게 많이 등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2008년 4월 방영을 시작한 <강적들>의 차영진은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제 '심청'의 효력은 소진되기라도 한 것일까? 혹시라도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보상받는 영웅 모티프를 관습적으로 복제했기 때문은 아닐까? '심청'은 아직 우리 곁에 살아 있다. 2008년 5월, 중반을 넘어서는 <강적들>의 차영진을 지켜보면 그 해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윤석진 교수는 2000년 여름 한양대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연극·방송극·영화를 중심으로>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04년 가을 <시사저널>에 '캔디렐라 따라 웃고 웃는다'를 발표하면서 드라마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 <한국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상상력>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 등의 저서와 <디지털 시대, 스토리텔러로서의 TV드라마 시론> <극작가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충남대 국문과에서 드라마 관련 전공 과목을 강의하면서 한국 드라마의 영상미학적 특징에 대해 연구 중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