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스마트를 지향하는 2012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나라 드라마는 구시대의 유물 '기억상실증'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긴 최소 16부작 이상 진행해야하는 드라마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것' 만큼 내용을 질질 끌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는 많지 않지요.
만약 막장 드라마였다면, 지겹도록 많이 본 기억상실증 이제 그러려니 합니다. 원래 그런 드라마들은 기억상실증 따위는 양반이니까요. 하지만 <신사의 품격>은 흔히 널려있는 막장이 아니라 2012년 세련된 청담동 트렌드에 맞게 구성한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한 미남 배우 장동건, 감각적인 연출과 화면으로 고전에나 나올 법한 '기억상실증'이 떡하고 나오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짜증'이 나올 법 하지요.
다행히 <신사의 품격> 김은숙 작가는 막장에, 지루한 요소들을 보기 좋게 비트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김은숙 작가는 김도진(장동건 분)에게 다소 쌩뚱맞은 기억상실증을 선물했으나, 대신 그 기억 상실증을 상쇄하고도 남는 만능 녹음기를 안겨줍니다. 그 덕분에 서이수(김하늘 분)와 키스하고도 그 넘의 '기억상실증' 때문에 이수와의 키스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도진은 도진의 상황을 알리없는 이수와 오해하는 상황으로 한 회를 질질 끌뻔했으나, 다행히 키스 당일 녹음된 음성을 들은 도진과 녹음기의 정체를 알아버린 이수의 사랑이 더 진전되면서 '도진의 기억상실증 해프닝'은 약 10여분 만에 클리어하게 마무리됩니다.
엄연히 말하면 태산을 먼저 좋아한 것은 이수입니다. 하지만 태산은 야구단에서 함께 운동하는 이수가 아니라 그녀의 친구 세라에게 관심을 가졌고 이수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태산과 세라를 이어줍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도진에게 태산을 향한 마음을 들키게 된 이수. 그렇게 모든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도진과 티격태격 싸우다 약간 정이 든 이수는, 이제 도진도 안 보고 싶다며 그의 마음을 애써 뿌리칩니다. 그리고 진심 반 농담 반으로 앞으로는 "연하남을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마흔이 넘어간 나이 빼곤 모든 게 완벽하다는 김도진.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서이수 선생은 하필이면 자신의 가장 큰 아킬레스 건을 건드렸고 이수의 황당한(?) 선언에 큰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허나 연하남때문에 신경쓰이는 사람은 도진뿐만은 아닙니다. 현재 도진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는 최윤(김민종 분) 변호사도 연하남이란 단어만 들어도 치가 떨릴 정도입니다. 왜나 애써 내색안하지만 윤이가 마음이 들고 있는 태산의 동생이자 이수의 베스트 제자 메아리(윤진이 분)이 요즘 어디서 굴러온 돌인지 모르는 콜린(이종현 분)과 심상치 않은 징조를 보이고 있거든요.
늦둥이 메아리는 태어날 때부터 윤이만 찾았고, 지금도 계속 윤이 윤이만 외칩니다. 그러나 윤이와 메아리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날 뿐더러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윤이는 부인과 사별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태산은 가장 절친한 친구 윤임에도 불구하고 메아리와 윤이를 반대합니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윤이도 자신은 메아리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써 메아리를 향한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숨기고 있습니다. 메아리 스스로가 자신을 단념할 때까지 말이죠.
그런데 다행히도 여전히 그 연하남 콜린보다 윤이를 좋아하는 메아리는 초대도 안했음에도 윤이의 생일파티에 제 발로 찾아와 오빠들을 당황시킵니다. 태산은 빨리 메아리를 내보내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고 도진과 정록(이종혁 분)도 시한폭탄 메아리가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합니다. 하지만 결국 메아리는 눈물을 흘렸고 오빠 태산은 화를 내면서 메아리를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때 윤이가 메아리를 끌고나가려는 태산의 손을 꽉 잡습니다. 그것은 메아리를 가만히 놔두라는 단순한 신호 이전에 메아리를 향한 마음을 강하게 커밍아웃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로써 절대 동생만큼은 윤이에게 내줄 수 없다는 태산, 그리고 메아리를 간절히 원하는 윤이와의 정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오빠들끼리 자기 때문에 치고박는 문제는 둘째치고 메아리로서는 윤이 오빠의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큼 설레는 일도 없을 거에요.
윤이가 콜린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메아리는 윤이 주위에 널려있는 쭉쭉 빵빵한 미모의 여성들과 잘 될까봐 불안해했습니다. 게다가 태산 오빠는 다른 남자는 몰라도 절대 윤이만큼은 안 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불장난은 원래 하지 말라고 할 때 가장 활활 타오르곤 하지요. 그리고 관객들 입장에서도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련하게 하잖아요.
물론 <신사의 품격> 메인 남자 주인공 김도진도 서이수와의 될 듯 말듯 짝사랑에 가슴아파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신사의 품격>은 김도진의 짝사랑보다, 임태산을 향한 서이수의 오랜 짝사랑, 그리고 최윤과 임메아리의 발랄하지만 애절한 사랑에 더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기이한 현상을 일으킵니다. 비록 김도진-서이수에 비해서 분량을 작지만 그들 사이보다 최윤과 임메아리의 진전 방향과 속도가 더 궁금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최윤은 <신사의 품격> 7회 마지막 장면에서 그동안 메아리와의 관계에서 다소 우유부단했던 자세를 버리고 자신과 메아리의 사이를 본의 아니게 막는 태산의 손을 잡는 박진감 넘치는 남자다운 모습으로 여성 시청자들에게 어필합니다. 그렇게 장동건과 더불어 90년대를 풍미한 오빠 김민종은 조카뻘 여심(?)까지 오빠오빠 쫓아다니게 하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삼촌 김민종으로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아마 <신사의 품격> 7회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장동건의 황당한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메아리는 내 여자"라면서 당당히 외쳤던 김민종의 박진감 넘치는 손이 아니었나 싶네요.
연예계와 대중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자합니다. 너돌양의 세상전망대 http://neodol.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