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파문을 다룬 22일 <100분 토론>(이하 백토)의 백미는 시민논객의 질문이었다. 물론, 토론 내내 열띤 공방이 오고갔다. 패널로 참석한 4명 모두 진보정치에 관한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번 파문과 관련해 혼자 강연을 하더라도 100분은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지리멸렬했다. 당권파 때문이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와 김종철 진보신당 부대표가 나름 구체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논점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당권파를 대표에 나온 이의엽 정책위의장과 이상규 당선인은 앵무새처럼 시종일관 3가지 문장만 반복했다.

22일 백토에서 당권파는 3개의 문장으로 요약되는 대답만으로 거의 100분을 버텼다. 우선,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서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고, 이미 해명이 됐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진조위 보고서 이후에 언론 등을 통해 제기된 의혹에 대해선 ‘일방적인 주장이며, 전체가 아닌 특수한 사례일 뿐’이라고 넘겼다. 경선 부정 이외의 문제들에 대해선 ‘논의 주제에 어긋난다’고 뭉갰다.

특히, 이상규 당선자는 어떤 공세가 오더라도 이 3문장을 적절하게 버무리며 대처했다. 비교적 차분하고 안정된 톤이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은평에서 자신이 경선에 승복했단 사실을 강조했다. ‘화학적 결합을 이룬 아름다운 사례도 있다’는 낭만적인 얘기로 감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물론, 이의엽 정책위의장의 경우 몇 번의 결정적 ‘실책’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워낙 단출한 논리만 무한 반복했던 탓인지 지엽적인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결정적 패착을 저지르진 않았다.

통합진보당 파문에 있어 경선 과정에 총체적 부정과 부실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논란은 이미 지나갔다. 한국 사회에서 오직 통진당 당권파 만이 여전히 이 논란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다고, 총체적 부정과 부실이 자신들을 탓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이에 대해 진 교수는 “진조위 보고서는 당의 총체적 부정과 부실을 지적하며 당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자는 것인데, 왜 당권파는 이를 당권파의 총체적 부정과 부실로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꼬집기도 했다.

진조위 보고서 이후 당권파가 매우 우민한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문제는 왜다. 길게는 십년이상 진보정치를 해온 이들이 어찌하여 이런 결정적 패착을 저지르고 사회적 고립의 외통수에 빠졌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단서가 바로 어제 이상규 당선인이 유예한 대답 속에 있다. 어제 시민논객은 3가지를 이상규 당선인에게 물었다.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입장, 북한 핵 개발에 대한 입장 그리고 북한 인권에 대한 견해’였다. 시민논객은 “종북 보다 종미가 문제니 하며 말을 돌리지 말고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 달라”고까지 요구했다.

▲ 22일자, <100분 토론>에서 시민 논객은 이상규 당선인을 향해 '북한 3대 세습, 북한 핵개발 그리고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대답'을 요구했다. 이에 이 당선인은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대답을 유예했다.

하지만 이상규 당선인은 분명한 입장을 말하지 못했다. 이석기 당선인이 그랬던 것처럼 동문서답의 장광설을 내놓았다. 이 당선인은 “평양을 방문해보니 도시가 회색빛이라 놀랐다”, “북한 술이 맛은 좋지만 뒤집으면 병뚜껑 기술이 떨어져 술이 떨어 진다”는 뜬금없는 얘기를 하다간 “질문 자체가 색깔론이다. 양심의 자유가 있으니 이 문제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겠다”고 답을 유예했다. 이에 진 교수가 “양심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면 선출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정치인은 이념과 사상에 대해 답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되묻고 사회자 역시 “대답을 유예하겠다는 것이냐”고 확인했지만 이 당선인은 끝내 “선거를 통해 검증을 받았다. 대답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 대답은 당권파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심지어 진보정치 전체가 공멸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당의 심장이라고 하는 당원명부가 검찰 손에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자리보전과 자파의 조직 수호에만 열을 올리는 까닭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들은 시민적 상식의 눈높이에 부응하는 사상을 갖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도 떳떳이 밝힐 수 없을 만큼 이념적 기반을 불투명하다.

당권파가 외부에서 보기엔 ‘패거리 문화’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행동양식을 공유하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우리 밖에 없다’는 패권적 양상으로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 행태를 이처럼 오래 벌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통합'이라는 세련된 외형을 갖춰 시민의 지지를 얻었지만 내재적 신념 체계가 노출되면 안 된다는 두려움, 총론적 진보를 넘어 이슈의 각론으로 들어가며 결코 진보적이지 않은 인식 구조에 대한 불안감이다. 이 검열이 조직을 패쇄적으로 만들고, 이념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대중 정치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딜레마를 낳고 있다.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상식적 대답은 ‘민주적 사회의 운영 원리로 보면 있을 수 없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라는 문장이면 충분하다. 다만,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통일의 당위에 입각하면 ‘반대하더라도 외교적 제스처를 취할 때는 북한 체제의 특수성을 감안한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다’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선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진보의 입장에선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미국의 제재와 압박에 따라 불가피하다는 논리는 그렇다면 테러리즘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다만, 어제 김 부대표도 말했듯 북한이 핵개발을 한다고 해서 이에 대해 군사적 응징이나 보복이 주장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점을 말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북한 인권 문제의 경우, 좀 더 예민한 주제일 순 있다. 하지만 인권의 보편성이 천부적인 것이란 점에서 북한 인권 문제 역시 인권의 원칙 일반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통 타국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맥락과 정치적 이유가 체제에 대한 압박이나 정권에 대한 제재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이므로 이를 경계하자고 하면 된다.

이 당선인이 대답을 유예한 질문들은 향후 진보진영 전체에 그리고 다가올 대선에 매우 위험한 문제를 남겼다. 누군가들이 통진당 당권파를 ‘종북주의자’라고 단도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기 전에 통진당 당권파들이 스스로 이념과 사상을 명쾌하게 해줘야 한다. 종북주의라는 딱지가 색깔론의 정치적 공세라는 점에 동의한다. 종북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역시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 개인의 ‘양심의 자유’ 역시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스스로 그것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하고, 이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분명히 질 수 있어야 마땅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걸 끝내 감추고 통진당 당권파가 계속 억울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이어간다면, 사회적으로, 공론의 장에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이제 별로 없다. 인종차별적 테러주의자가 보수의 이름으로 의회에 진출한다면 분명 사회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란 이념과 가치 체계를 분명히 해 정체성의 선택을 유도하는 행위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반민주적 극우주의자가 진보의 탈을 쓰고 의회의 일원이 되는 것 역시 가당찮은 일이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그 정체를 위장하고자, 위장된 정체성을 확대하고자 부정한 방법을 저지르고 이를 반성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어떤 이들은 ‘종북주의자 다음은 좌파 그리고 그 다음은 자유주의자가 배제될 것’이라며 통진당 파문이 종북주의 문제로 전환되는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온갖 상식적 해법이 제시되고 합리적 정치적 판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 한 달 가까이 통진당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의 본질을 파고들면 이 문제를 피해갈 도리 또한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문제야말로 진보정치의 오랜 질환이었단 점이다. 이 썩은 세포에 대한 적출 없이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누군가들이 ‘우리는 다른 진보다’는 것을 시민에게 설명하기란 난망하고 또 난망한 상황이 될 것이다. 종북은 진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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