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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이성적인 나라로 변할 가능성은?[김석의 미디어 책읽기(9)] 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네거트, 문학동네 2007)
김석 KBS기자 | 승인 2008.04.28 09:46

어느 일요일 밤 마지막 회. 관객 수는 스무 명 남짓.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새 영화 <식코 Sicko>를 상영해주는 영화관 ‘씨네큐브’의 존재는 그래서 더 고마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모두들 쉴 새 없이 웃고 또 울었다. 엔딩 크레딧이 화면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단 한 사람도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이 없는 그 공감대에 새삼 또 감사. 엔딩 크레딧이 끝나가는 순간, 낯익은 이름 하나가 나타난다.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 지난해 4월 세상을 떠난 그에게 마이클 무어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최고의 헌사를 바쳤다. “Thank You Kurt Vonnegut for Everything.”

인터뷰의 대가라 불리는 미국의 진보적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바사미언(David Barsamian)이 커트 보네거트를 만난 2003년 2월 23일, 보네거트는 미국 뉴욕시 와이 스트리트 92번지에 모인 군중 앞에서 하워드 진(Howard Zinn)의 기념비적 저작 <미국 민중저항사 A People's History of United States>를 낭독했다. 존경받는 지식인의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저작이 무려 100만 부 판매고를 돌파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대도시 뉴욕의 한복판에 모인 군중들을 앞에서 그 책이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낭독’된다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 이 장면을 지켜본 바사미언은 자신의 책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Louder than Bombs : The Progressive Interviews>에서 보네거트가 “하워드 진을 축하하려 모인 군중들을 사로잡았다”고 썼다.

   
  ▲ '나라없는 사람' 책표지.  
 
보네거트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붙잡혀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을 당시 13만 5천 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 영국군의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목격하고 반전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나가사키 원폭 공격을 향해 “이 나라가 저지른 가장 인종차별적이고 가장 간악한 짓”이라며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고, 베트남 전쟁 기간에는 거리로 나가 반전시위에 뛰어들었다. 그는 드레스덴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 <제5도살장 Slaughterhouse-Five>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 필요했던 오랜 번민과 고통을 자신의 회고록 <나라 없는 사람 A Man without a Country>에 적고 있다. “나는 베트남 전쟁이 나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우리의 지도력과 동기가 아주 추잡하고 본질적으로 멍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우리는 역사상 최악의 인종인 나치에게 저질렀던 우리 자신의 추악한 행동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눈으로 보고 기록했던 이야기에서 전쟁은 아주 추하게 묘사되었다. 진실은 강력하다. 그 힘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이것이 평화주의자로서 강고했던 신념과 도저한 비판정신을 견지했던 보네거트가 자신의 조국 미국을 가감 없이 비판하는 시대의 양심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소문난 골초이기도 했던 그의 비판은 속 시원할 정도로 신랄하다. 보네거트의 부시 혐오증은 특히 유명해서 회고록에 담배 얘기를 하다가 이런 얘기도 써놓았다. “내 나이 이제 여든둘이다. 고맙다. 이 비열한 사기꾼들아. 내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 사람의 이름이 부시, 딕, 콜린이 될 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었다” “조지 W. 부시는 주변에 C학점 상류계급 학생들을 끌어 모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1) 역사와 지리를 전혀 모르고, (2) 백인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3) 이른바 기독교도이며, (4) 정말 놀랍게도 정신병자, 즉 영리하고 번듯하게 생겼지만 양심은 전혀 없는 자들이다.” (이 대목에서 자꾸만 땅 투기하는 데 일가견 있는 선수들만 그러모은 듯 보이는 저 부유하고 잘난 우리의 ‘지도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되지도 않는 그들의 궁색한 변명들을 듣고 있노라면 양심이라는 낱말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진다.)

보네거트는 오로지 ‘석유’ 때문에 미국이 전 세계에서 벌여온 온갖 침략 전쟁 도발에 “구역질”이 난다며, 담배보다 더 강한 미국의 ‘화석연료 중독증’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진화는 엉터리이고, 지구에 미래가 없다고도 한다. “이제는 안다. 우리의 한심한 미국이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나라로 변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권력은 우리를 타락시키고, 절대 권력은 우리를 절대적으로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권력에 도취된 침팬지다.” 자신이 유달리 좋아하는 아인슈타인과 마크 트웨인도 말년에 인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결국 두 손을 들었다며 “나는 나라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급기야 지구와 “빌어먹을” 인간을 창조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탄’이란다.

   
  ▲ 보네거트.  
 
미국인들이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마크 트웨인과 에이브러햄 링컨을 이야기하면서 보네거트는 ‘웃음’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유머는 아스피린처럼 아픔을 달래준다.” 마이클 무어가 보네거트에게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 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식코>의 끔찍하고 역설적인 장면들을 보면서 자꾸만 터져 나왔던 그런 웃음은 보네거트가 얘기한 대로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책에 한가득 담겨 있는 보네거트의 독설은 사실은 무한한 애정으로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휴머니스트의 절절한 고언(苦言)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의 하나는 미국 도서관 사서들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나는 도서관 사서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존경하는 것은 그들의 물리적 힘이나 정치적 연줄 또는 막대한 부가 아니라, 이른바 위험한 책들을 도서관 서가에서 제거하려는 반민주적 불량배들에게 끈질기게 저항하고, 그런 책들을 열람하는 사람들을 사상경찰에게 신고하는 대신, 열람 기록을 몰래 파기하는 양심과 용기다.” 이어지는 대목.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매체인 신문과 TV는 오늘날 국민 전체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부실하고, 너무나 무책임하고, 너무나 비겁하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매체는 책밖에 없다.” (방송기자인 나 자신조차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마음 속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보네거트의 마지막 저작이 된 이 책이 출간되자 미국의 라디오 진행자 스터즈 터클(Studs Terkel)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시는 책을 내지 않겠다던 보네거트가 약속을 깨뜨리게 해주셔서.” 장정일이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고 난 뒤에 썼던 표현을 빌리자면, 보네거트의 글은 진정, 멋있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김석 KBS기자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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