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헌법재판소가 노동자의 단순 파업을 형사상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헌재는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이 '위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과거 독재정권 시절부터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 '노동 악법'을 헌재가 용인했다는 언론 비판이 모아졌다.

헌재는 26일 지난 2012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간부 A 씨 등이 업무방해 혐의를 규정한 형법 314조 1항에 대해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침해한다며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관 4명(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은 '합헌', 5명(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이미선)은 '일부 위헌' 의견을 냈다. 위헌 결정이 내려지려면 재판관 6명 이상의 위헌 의견이 있어야 한다. 형법 314조 1항은 '위력으로써 사람의 업무를 방해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재는 해당 형법 조항에 대해 1998년, 2005년, 2010년에도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가운데)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26일 오후 헌법소원·위헌법률 심판이 열린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심판정에 입장해 착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헌재는 "단체행동권은 집단적 실력 행사로 위력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단체행동권 행사라는 이유로 형사책임이나 민사책임이 면제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사용자의 재산권이나 직업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등의 경우 단체행동권 행사 제한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헌재는 "사용자가 예측하지 못한 시기에 파업이 이뤄져 사업운영에 혼란이나 막대한 손해를 초래하는 등의 집단적 노무제공 거부에 한해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며 "단체행동권을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2010년 3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 18명을 정리해고한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비정규직노조 간부인 A 씨 등은 조합원들과 휴일근무를 거부하는 파업에 돌입했다. 검찰은 위력으로 자동차 생산 업무를 방해했다며 A 씨 등을 재판에 넘겼고,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다.

27일 한겨레는 사설 <‘단순 파업도 업무방해죄’라는 구시대적 헌재 결정>에서 "무려 10년이 넘게 진행돼 '헌재 최장기 심리 사건'으로 꼽힌 결과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며 "과거 독재정권 때부터 노동자 탄압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됐고,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개선 권고를 받아온 '노동 악법'의 고리를 이번에도 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한겨레는 "노동조합법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쟁의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있음에도, 별도의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단순 파업까지 더 무겁게 처벌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단체행동권을 사실상 무력화해왔다"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등 주요 국가들은 정당성을 결여한 파업일지라도 민사책임을 지울 뿐 형사처벌하는 경우는 없다"고 설명했다.

또 한겨레는 "형법상 업무방해죄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들의 쟁의행위를 막고자 도입한 법에 연원을 두고 있고, 이후 일본에서조차 이 같은 법이 사문화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법 현실의 후진성은 더욱 도드라진다"고 지적했다.

같은 날 경향신문은 사설 <노조 옥죄는 ‘파업 업무방해죄 적용’ 합헌 결정, 아쉽다>에서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노동3권에 따라 정당하게 파업을 해도 노동자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로 또다시 남게 됐다"며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은 "이 같은 업무방해죄는 경제발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산업화 시대 노동자의 파업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한하고 있다"며 "비록 한 명 차이로 위헌이 되었지만 파업 노조원들에게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는 것이 무리라는 점은 이미 충분히 확인됐다. 노동·수사 당국은 단순파업에 대해 무리한 업무방해죄 적용을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ILO는 '누구도 평화로운 파업을 조직하고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형사 제재를 받거나 그들의 자유를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면서 한국의 업무방해죄에 대해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하도록 개정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지체 없이 취할 것과 이에 관한 정보를 계속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UN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위원회는 2009년 "파업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업무방해죄 조항의 적용을 억제함으로써 파업권을 보장할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한편,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파업 사건은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과 연관돼 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처장은 A 씨 등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2015년 말 파견 판사를 통해 헌재가 '한정 위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내부 정보를 입수,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문건에 파업 노동자를 업무방해죄로 처벌한 대법원 판결을 헌재가 뒤집으려 한다며 불법 파업을 막기 위해 중단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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