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수필가] 5월의 어느 날 저녁, 오래된 아파트 앞마당의 공기가 숲속처럼 싱그럽다. 입주 초기 심어진 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아난 만큼 가지마다 무성한 잎에서 초록 공기를 내뿜기 때문이다.

오래된 정원수 곁에 있으면 굵다란 줄기에서 든든함이 묻어나고 가지마다 드리워진 푸른 잎은 한없는 평화를 준다. 세월을 먹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덕이 깊어지고 혜택이 깊어지는 나무는 언제 보아도 사람의 스승이라 할 만하다.

풋풋한 봄 공기에 취해있으면 달짝지근한 아까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이어서 달큰함을 살짝 씻어내며 푸릇함을 더한 향기가 가까이서 느껴진다. 짙은 풀 내음에 살짝 섞인 비누 냄새 같기도 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가지 끝에 촘촘히 매달린 하얀색 쥐똥나무꽃이 보인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가지런한 꽃송이는 작은 쌀알을 붙여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싸락눈이 내려앉은 것 같다. 활짝 핀 것은 작은 나팔 모양의 하얀 꽃송이 안에 노란 꽃술을 품고 있다. 꽃송이가 작아도 향이 진해 그 작은 꽃술에 꿀벌이 머리를 파묻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쥐똥나무 (사진=조현옥)

향기는 싱그럽고 꽃은 뽀얗고 귀여운데 어찌하여 이름이 쥐똥나무인가. 늦가을이 되어 맺히는 열매에서 쥐똥나무의 이름값은 드러난다. 가을에 열리는 열매가 쥐똥 크기로 까맣게 달리기 때문이다. 열매에 광택이 없으니 꽃의 이름을 붙인 이 말대로 쥐똥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지난가을 본 쥐똥나무의 열매는 명실상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특이하니 언제인가 한번 들었던 이름을 잊지 않고 길가에 피어난 뽀얀 꽃송이를 보며 쥐똥나무꽃이라는 이름이 되뇌어졌다.

쥐오줌풀도 있다. 이것 역시 작은 꽃송이가 여러 개 모여 있는데 뿌리에서 쥐의 오줌 냄새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노루오줌, 여우오줌, 말오줌, 말오줌때, 애기똥풀, 방가지똥이 모두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꽃과 나무 이름의 이름이다. 닭의 오줌이라는 뜻이 들어간 계요등(鷄尿藤)이라는 꽃도 있다고 하니 아름다운 꽃과 오줌·똥, 참 재미있는 조합이다.

생각해 보면 똥·오줌은 생명체가 먹고사는 과정에서 자연히 생성되는 물질이고 예전에는 이것을 자연 분해되게 두고 거름으로 쓰기도 했으니 옛사람들은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자연의 일부요, 삶의 필수품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말 오줌, 여우 오줌, 쥐의 그것까지 냄새를 구별하여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자연과 친근했던 옛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강원 춘천시 소양강변 쥐똥나무에 앉은 직박구리가 열매를 먹고 있다. Ⓒ연합뉴스

쥐똥나무는 가로수, 공원 산책로 아파트 단지 안에 가득하고 흔하다. 초여름 아까시 향이 어릴 적 추억의 향수를 떠올릴 때 쥐똥나무 향기가 겹치며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아까시보다는 한 발 정도 늦게 피어난다고 할 수도 있다. 아까시는 벌써 활짝 피었다 지고 있는 시점에서 쥐똥나무는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아파트에는 분리수거장 앞 약간 높은 화단에 쥐똥나무가 심겨 있다. 이 나무는 불편한 냄새를 덮으며 여름 하늘을 향해 뽀얗게 피어오르고 있다. 언제나 자신은 좋지 않은 냄새를 맡으며 우리에게 좋은 향기를 주고 있으니 참 기특한 꽃이다.

각자의 가정에서 분리수거를 깨끗하게 해온다면 주민 모두가 악취를 맡지 않고 쥐똥나무 향기만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분리수거장에서 심한 냄새가 나지는 않을 만큼 대부분 분리수거를 잘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곁에 종일 서 있는 쥐똥나무는 미세한 냄새도 맡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쥐똥나무 열매는 혈변, 코피, 당뇨, 고혈압 치료와 강장제로 사용된다고 하니 약이 귀하던 우리 조상들의 삶에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꽃말은 ‘강인함’이라 하니 작은 꽃이 넓게 퍼진 가지 사이에서 계속해서 피어나 시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名實相符(명실상부)라는 좋은 뜻의 말이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이 꽃과 맞지 않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에서는 쥐똥나무를 ‘검정알나무’라고 한다니 어쩌면 북한 사람들은 쥐똥나무 열매를 보고 검정 단추나 쥐눈이콩을 연상한 것으로 생각된다.

쥐똥나무 (사진=조현옥)

<풀꽃> 시인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께서도 이 작고 예쁜 꽃에 마음을 주고 시를 읊으셨다.

낯선 고장 낯선 골목/ 잘 모르는 아파트/ 울타리 가에
조로록 열매를 맺고 있는 쥐똥나무 /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
그래도 생각한다./ 이 나무에게도 봄은 또다시 왔다 갔구나/
꽃피는 시절이 있기는 있었구나/지나가는 사람들/
나를 보고서라도/ 그렇게라도/ 생각해줬음 좋겠다.
우리에게도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지/아니 나는 지금도 사랑하고 있지
사랑받고 있기도 할 거야 / 누구나, 누구에게서는 그런 것처럼

- 나태주 시집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 중에서 ‘쥐똥나무’

옛사람들은 오래 살라는 의미로 어렵게 나은 자식에게 개똥이 쇠똥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름은 운명과 얼마만큼 관련이 있을까. 이름은 부르고, 불리는 것이라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고 생각하여 더 나은 운명을 바라며 개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때로는 자신의 이름이 싫어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어찌 보면 이름은 사람의 첫인상이 되기도 하고 그 사람을 떠올리는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무척 자상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의 이름이 우습거나 거친 느낌인 경우가 있었다. 이름 때문에 첫인상은 투박해도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지낼수록 좋은 성품을 알게 되어 그 이름마저 그런 느낌으로 바뀌기도 했다. 한때는 조금 촌스럽다고 느꼈던 내 이름이 예쁘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쥐똥나무 (사진=조현옥)

쥐똥나무는 오랫동안 쥐똥나무로 불렸지만, 나는 쥐똥나무라는 이름에서 작고 탐스러운 쥐똥나무 꽃과 푸른 향기를 떠올린다. 무더운 여름 아스팔트 옆에서 길가는 사람의 더위를 식혀주며 안타깝게 바라보는 쥐똥나무의 그 마음을 사랑한다. 여름을 지나 유익한 마음의 열매를 익혀 내어주는 나무의 본성을 좋아한다.

쥐똥나무처럼 우습거나 덜 멋진 이름을 가졌지만 따듯한 마음으로 그 이름에서 향기를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만나보고 싶다. 초여름의 쥐똥나무 향기 가득한 길을 그런 사람과 함께 걸으면 쥐똥나무라는 이름의 정겨움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성큼성큼 여름으로 나아가는 시간이 쥐똥나무의 푸르름으로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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