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탁종열 칼럼] 한국 언론의 문제 중 대표적인 것이 ‘보도자료 베껴 쓰기’이다. 특히 경제 관련 기사의 경우 취재를 통한 확인이나 분석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지난 2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은 <100대 기업 코로나19 전후 경영성과 분석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국내 대기업들의 경영 실적이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했지만 최근 대내외 불확실정 확대에 따라 차입을 늘려 현금을 확보해 대응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전경련은 이 보도자료를 통해 “기업들이 불확실성을 잘 헤쳐나가 적극적인 투자·고용에 나설 수 있도록, 선제적 세제지원·규제개혁으로 기업들이 경영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보도자료의 목적은 윤석열 정부의 ‘민간주도 성장’ 프레임을 위한 여론 형성이다.

전경련의 의도는 다음날 신문들의 기사에 그대로 반영됐다. 경향신문은 5월 3일 <대기업들, 실적 회복하고도 빚 늘려 ‘현금 확보’> 기사를 통해 전경련 보도자료를 충실하게 베껴썼다. 경향신문은 기사에서 추광호 전경련 경제본부장을 인터뷰 한 것처럼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이 또한 보도자료에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베껴 쓰기 한 것에 불과하다.

경향신문은 전경련 등 재계가 그동안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기업 규제로 인해 기업 경영이 어렵다’는 주장이 실제와는 다른 엄살에 불과하고, ‘기업의 성장이 고용과 투자를 불러 온다’는 ‘민간주도 성장론’이 허구일 수 있다는 지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재계의 ‘기업하기 좋은 나라’ 프레임에 동조한 것이다.

서울신문은 같은 날 <실적 회복에도…빚 내 현금 쌓는 대기업>에서 “국내 대기업들이 코로나19 이전의 실적을 회복했음에도 커지는 불확실성에 빚을 늘려 현금은 쌓아두고 투자는 미루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서울신문은 전경련이 국내 매출 100대 기업의 실적을 비교한 결과 코로나19 이전(2018~2019년)보다 ‘매출액은 5.8%, 영업이익은 5.9%씩 늘었다’고 보도하면서, 같은 기간 ‘100대 기업의 배당액이 25% 가량 대폭 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매일경제는 지난 3월 25일, 100대 기업의 2021년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전년에 비해 매출은 18.5%, 영업이익은 116.2%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반면에 고용은 0.3% 증가하는데 그쳐 코로나 2년 동안 ‘고용없는 성장’이 계속 됐다면서 이 기간에 이들 100대 기업의 임금은 14.7% 인상됐다고 보도했다. 100대 기업은 서민과 자영업자, 중소기업이 사상 최대의 위기를 겪는 사이에,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으로 ‘그들만의’ 임금 인상과 배당 잔치를 벌인 것이다.

그런데, 100대 기업이 실적회복에도 투자를 줄이고 배당액을 25% 대폭 늘린 것에 대한 서울신문의 해명은 매우 궁색하다. 서울신문은 이를 “ESG 경영 확대에 따른 주주 권리 강화” 등의 기조에 힘입은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ESG 경영’에 대한 인식 부족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ESG란 수요 및 공급 등 전통적 방식의 재무적 평가가 아니라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을 고려해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2021년 1월 3일 온라인으로 전미경제학회(AEA)가 열렸다. 이날 열린 전미경제학회에서는 “어떻게 기업이 주주 이익뿐 아니라 거대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동참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논의하는 세션이 진행됐다고 한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기후변화,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경제적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독점적으로 힘이 거대해진 기업들에 해법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ESG경영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이다.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게티이미지뱅크코리아)

최근 우리나라에서 기업들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가 ‘ESG경영’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ESG경영’은 매우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으며 ‘기업친화적’이다. 탄소중립 일정과 탄소국경세 등에 대해 기업들과 언론은 ‘기업 경쟁력 약화’를 주장하며 완화를 요구하고 있고, 사회(Social) 의제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권 강화’를 ‘기업 규제’라며 낙인찍기에 바쁘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마련 중인 한국형 ESG 모범 규준 중 S(사회) 가이드라인은 ‘공정한 고용과 동등한 급여’, ‘합리적 성과 평가와 보수’, ‘노동기본권 보장’, ‘건전한 노사관계 형성’, ‘안전보건 거버넌스 구축’, ‘안전보건 성과 지표’, ‘일과 생활의 균형 지원’ 등을 제시하고 있다. ILO의 ‘2020년 10대 노동 정책’과 비교해 낮은 수준이지만 큰 방향은 동일하다. 하지만 전경련과 경총 등 재계는 이를 ‘기업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 강화’라면서 반대하고 있다.

서울신문은 ESG 경영의 G(지배구조)의 의미를 ‘주주 권리’로 축소해 그 근본 취지를 왜곡하고 있다. ESG경영의 실행 가이드 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ISO26000에서는 "거버넌스는 조직이 목표를 수행하는데 있어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수행하기 위한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나리 기업의 주주총회는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른 ‘연극’과 같다. 대주주나 최고경영자의 결정에 대한 이의 제기나 제안은 철저하게 봉쇄되고 있다. 대주주를 견제하기 위한 사외이사나 감사는 ‘꼭두각시’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재벌의 오너에 의해 왜곡된 지배구조 문제를 일부라도 개선하기 위해 제정된 ‘감사위원 3%룰’ 등 경제민주화 3법은 폐지해야 할 ‘기업 규제’의 대표적 사례로 공격받고 있다.

한국은 세계 4대 기후악당 중 하나이며, 한국의 대기업은 글로벌 사회에서 ‘기후악당’으로 불린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3월 16일 삼성전자 주총이 끝난 직후 “우리는 고객(투자자)을 대신해서 삼성전자가 탄소감축 계획을 너무 늦지 않게 공개하도록 지속해서 관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네덜란드 연금투자회사인 에이피지(APG)도 지난 2월 삼성전자·에스케이텔레콤 등 국내 9개 대기업에 탄소배출 감축에 적극 나서라고 요청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산업안전보건을 노동기본권으로 선언하는 방안을 오는 6월 110차 총회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산재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은 폐지해야 할 ‘기업규제 1호’로 낙인 찍혔다.

전경련이 보도자료에서 밝힌 ‘매출과 영업이익이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증대했지만, 고용과 투자는 줄고 주주의 배당액만 급등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언론이 숨기려고 하는 ‘사실’에 ‘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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