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만 보면 채널을 돌리고 싶어진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보다. <옥탑방 왕세자>의 악녀인 정유미 때문에 짜증난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데 어떤 프로그램에선 이런 악역과 미실 등을 싸잡아 묶어서 악역전성시대라는 분석들을 내놓고 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같은 악역이라도 이 둘은 전혀 그 성격이 다르고, 사람들도 미실엔 호의적이었지만 <옥탑방 왕세자> 정유미엔 짜증을 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옥탑방 왕세자>에서 정유미는 가증스럽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천사같은 얼굴을 하면서 악마같은 짓을 저지른다. 이렇게 위선적인 캐릭터는 정말 얄밉다.

반면에 미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상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러면 주인공과의 실력경쟁 구도가 된다. 악역이어서 당연히 밉긴 한데 가증스럽게 얄밉지는 않다.

정유미는 일상생활 속에서 뭔가를 항상 숨기고 감춘다. 중요한 손수건을 숨긴다던가, 여주인공이 사진 속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숨긴다던가, 여주인공의 수표를 숨긴다던가, 하는 식이다. 이렇게 ‘깨알같은’ 악행이 <자이언트>에서 정보석의 선 굵은 악행보다 더 얄밉게 느껴진다.

정유미는 극중에서 항상 적반하장으로 주인공을 비난한다. 이런 사람은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요즘 비슷한 캐릭터로는 <패션왕>의 장미희가 있다. 장미희도 얄미운데, 극의 비중이 워낙 작다보니 정유미의 얄미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미실은 악역은 악역이지만 100% 악당은 아니었다. 미실은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선 정적을 무자비하게 처단하지만, 그 권력으로 국익을 지키려는 측면이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사익과 국익이 충돌했을 때 국익을 선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당나라 사신이 미실의 집권을 도와주겠다며 굴욕적 동맹을 제안했을 때 나라의 위신이 떨어진다며 거부했다. 또 마지막 전투 때 전방 야전군이 오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지만 거부했다. 국가방위선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미실에게는 이렇게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측면과 모두를 위하는 측면이 공존해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미묘한 악역에게선 생동감과 리얼리티가 느껴진다. 반면에 정유미는 극중에서 아주 단순하게 얄미운 짓만 계속 한다.

미실의 권력욕은 이유가 있었다. 성골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신분상의 무시를 받았던 것에 한이 맺혔었다. 그래서 성골들을 다 제치고 자신이 최고권력자가 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기존 기득권 체제가 자신에게 강제한 굴레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기도 했다. 그녀가 간직한 이런 사연은 ‘인간미’를 만들어냈다.

시청자들은 이런 저항에 공감했다. <옥탑방 왕세자>에서 정유미에겐 이런 사연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미도 없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얄미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식의 얄미운 여자 캐릭터를 내세워서 극의 자극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범람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년층이 보는 주말 막장드라마에서나, 젊은층이 보는 주중 미니시리즈에서나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익숙한 설정으로 손쉽게 자극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결국 우리 드라마의 경쟁력을 갉아먹을 것이다. 그리고 얄미운 악녀 캐릭터의 범람은 여성에 대한 악감정도 지금보다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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