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샹치와 텐링즈의 전설>에서 웬우가 죽은 아내를 되찾을 수 있다면? <이터널스>의 초인들이 인류의 역사에 개입한다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스파이더맨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인피니티 사가(Infinity Saga)가 자신을 필연적인 존재라고 지칭한 ‘궁극의 마침표’ 타노스와의 대결이었다면, 멀티버스를 전면에 내세운 페이즈4는 ’무한한 물음표’의 세계로 확장해간다. MCU의 무한한 물음표의 세계는 ‘만약(IF)’이라는 가지 않은 길로 요약할 수 있다.

72개의 우주를 여행한 아메리카 차베즈(소치 고메즈)는 지구616에서 만난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멀티버스를 여행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규칙을 몇 가지 말한다. 가장 먼저 식량을 구할 것. 되도록 피자로. 제일 중요한 규칙은 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때의 ‘안다’는 말은 또 다른 우주의 횡단보도 앞에서 정지가 파란불, 보행이 빨간불이라는 사회적 규칙이나 합의도 포함되지만, 영화 전체로 보면 각각의 우주마다 있는 동일 캐릭터의 특성과 운명을 함부로 규정짓거나 단정하지 말라는 조언으로 들린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스틸 이미지

멀티버스의 닥터 스트레인지

차베즈의 능력을 빼앗아 잃어버린 가족을 찾으려는 스칼렛위치(엘리자베스 올슨)의 위협을 피하다 지구838로 넘어간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곳을 지키는 비밀결사대 일루미나티와 마주한다. 어벤져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스칼렛위치를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하지만 오히려 멀티버스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수감되어 재판에 넘겨진다. 최고의 지성과 판단력을 가진 일루미나티가 이런 판단을 한 것도 근거가 없진 않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등장한 꽁지머리의 디펜더 스트레인지는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도 있다며 차베즈의 능력을 뺏으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일루미나티가 지키고 있는 지구838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비샨티의 책을 얻어 타노스를 물리치지만 결국 인커전을 일으키는 바람에 또 다른 우주를 파괴했다. 후에 만나게 될 시니스터 스트레인지는 더 심각하다. 크리스틴(레이첼 맥아담스)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다크 홀드를 사용해 또 다른 우주 스트레인지를 죽이기까지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단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그의 연인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된 크리스틴이다. 결혼식을 진행 중인 지구616에서 크리스틴은 ‘항상 칼자루를 쥐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스트레인지가 넌지시 던지는 고백을 거절한다. 본인이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는 독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스트레인지들의 방식은 위험하다. 일루미나티 역시 이 부분에 동의했을 것이다. 지구616의 스트레인지 또한 최후의 순간에는 마법사들에게 금지된 다크 홀드의 힘을 이용해서 스칼렛위치와 대결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역시 차베즈의 중요한 조언을 지키지 않았을 뿐이다. 지구616의 스트레인지는 금지된 다크 홀드의 힘을 사용했지만 자신의 강력한 힘으로 스칼렛위치를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차베스가 능력을 각성할 수 있도록 도왔고, 차베즈의 지혜로운 선택을 통해 결과적으로 폭주하던 스칼렛위치를 멈출 수 있었다. 개별 우주의 스트레인지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의 기억과 경험이 지구616의 스트레인지를 다른 우주의 스트레인지들과 다르게 만들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는 1,400만 개의 미래를 봤지만 그중에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타노스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자기밖에 모르고 오만방자하던 토니 스타크가 자신을 희생하던 미래다. 내가 아닌 동료가 우주를 구해낸 한 번의 기억. 처음 만난 소녀를 믿고 힘을 보태는 변화를 그에게 가져오지 않았을까. <대혼돈의 멀티버스> 진입장벽이 높다는 말은 디즈니플러스의 드라마를 예습하는 게 아니라 닥터 스트레인지가 겪어온 사건과 기억,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옳지 않을까.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스틸 이미지

매드니스의 완다 막시모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완다 비전>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다는 말에도 대체로 동의할 수 없다. MCU는 본래 친절한 영화가 아니었다. <엔드게임>까지 갈 것도 없이 첫 번째 팀업무비인 <어벤져스>의 주인공 6인을 위해 봐야 할 영화가 5편이었고, 이후로도 10분 가까운 스태프 롤을 억지로 보고 잠깐 나오는 쿠키 영상을 보고 나야 개운한 기분으로 극장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30분짜리 6부작인 <완다 비전>은 그리 높은 장애물이 아니다.

<완다 비전>을 본 입장에서, 다른 우주에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닌 이상 예습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를 정확히 아는 방법은 없겠지만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완다가 스칼렛위치로 폭주하는 이유를 건너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풍성하게 차고 넘치는 만큼 설명되지는 않지만 MCU 첫 관람자가 이해 못할 만큼 빈약한 정보를 주는 건 아니다. MCU가 친절하지 않아도 어려운 시리즈는 아닌 만큼 상영시간에만 집중하면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결정적인 실책은 <완다 비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완다가 왜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됐는지 설명이 되지 않은 점이다. 다만 비극적 삶을 살아온 완다를 위해 소심하게 변호하자면 상실에서 시작되어 집착으로 이어지는 완다의 폭주처럼 히어로와 빌런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 페이즈4에서는 자주 등장할 것이고, 완다는 단지 첫 번째 주자여서 주목받지 않았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예상이다.

캐릭터는 다르지만 영화상에서 스칼렛위치는 스트레인지의 또 다른 모습 중 하나로 그려진다. 바로 시니스터 스트레인지다. 상실한 무엇(두 아들/크리스틴)을 찾기 위해 금지된 유혹에 빠져들고(다크홀드) 무분별한 살상을 펼친 끝에 세상을 위기에 빠뜨린다(인커전). 음표싸움으로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을 줬던 닥터 스트레인지와 시니스터 스트레인지의 갈등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스칼렛위치와의 대결이기도 했다. 스칼렛위치의 폭주가 멈추지 않았을 때의 상황은 이전까지 표현된 어떤 공포적 연출보다 으스스하게 다가온다.

<노 웨이 홈>에 이르러서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의 무게감을 알게 된 피터 파커처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유혹은 그것을 쟁취한 능력이 강할수록 커진다.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슈퍼히어로들의 능력에 더해 또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우주가 무한대로 확장되는 만큼 유혹은 다종다양하게 펼쳐질 수밖에 없다. MCU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던 블립 이후로 영웅들의 파괴된 일상에 주목하게 된 것도 이제 시작일 뿐이니.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스틸 이미지

당신은 행복하십니까(Are you happy)

지금까지 MCU에서 슈퍼히어로와 빌런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다(I can do this all day)’던 캡틴 아메리카의 명대사처럼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적과 상황에 마주하더라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긍정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멀티버스의 본격적인 대혼돈을 마주한 시점부터는 바꿀 수 있는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이 될 것이다.

흔히 칭찬은 가치관을 반영한다고 한다.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세계의 모습이 칭찬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잔데도 섬세하네, 여자치고는 힘이 세네’ 같은 말처럼 어떤 칭찬은 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 칭찬을 행복으로 바꾸면 어떨까.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궁극적이고 지속해서 유지해야 할 상황이 ‘행복’이라는 단어에 녹아있다. 모자람 없는 재력, 뛰어난 지성과 미모, 지치지 않는 체력과 건강처럼 행복의 기준은 모두에게 다르다.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는 행복을 세 번 묻는다. 첫 번째는 크리스틴이 스트레인지에게. 스트레인지는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고 얼버무린다. 두 번째는 지구616의 스트레인지가 시니스터 스트레인지에게 던진다. 시니스터 스트레인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크리스틴 앞에서 행복하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행복한 우주는 없었다고 대꾸한다. 세 번째 질문은 사건이 수습된 후 카마르 타지를 복구 중인 웡에게 돌아간다. 웡은 삶에는 고난도 행복도 있지만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고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차베즈는 꿈이 멀티버스를 보는 창이라고 했다. 꿈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수천억, 수조억 개의 우주에서 내가 겪는 일 중 하나라는 것이다. 스칼렛위치는 드림워킹(Dream walking)으로 다른 세계의 나로 빙의할 수 있지만 끝내 원하던 행복을 찾지는 못했다. 만약이라는 꿈은 슈퍼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우리도 쉽게 할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는 헛된 노력과 망상이 불러온 대혼돈의 비극적 결말들을 보았다는 사실만은 다르다. 결국 행복을 바라보는 시선도 분별력에 달렸다.

영화의 마지막. 스트레인지는 시계를 고친다. 크리스틴이 선물했던 시계다. 깨져있던 유리알을 갈고 시간도 맞춘 뒤 조심스레 서랍에 넣어둔다. 자주 꺼내 볼 일은 없겠지만 지금까지 멈췄던 그의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마법 같은 영화다. 우주를 뛰어넘고 현실을 조작하는 마법이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우주에서 가장 위험하지만 최고의 마법사 스트레인지가 2시간 동안 우리에게 거는 마법도 특별하지는 않지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마법의 주문은 이렇다. 당신의 지금 시간에서 ‘행복하십니까(Are you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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