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건축학 개론>의 한 장면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는 오랫동안 여성관객들을 위한 장르였다. 주로 외부의 방해와 금지로 비극적 이별을 맞는 남녀 커플을 보여주며 눈물에 호소하는 게 멜로라면, 로맨틱 코미디는 서로 다른 남녀가 ‘밀당’을 거쳐 상호 오해와 갈등의 극복하고 마침내 ‘키스’(혹은 결혼)로 마무리를 한다. 전자가 주로 눈물에, 후자가 주로 웃음에 기대며 극과 극의 대조를 보이지만 두 장르는 많은 점에서 닮았다. 대체로 이성애 사랑 중심이고, 특히 여성에게 결혼과 가정을 전제로 ‘사랑’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주입하거나 확인시키며, 소위 스펙 낮고 외모도 별로인 평범한 남자라도 마음만은 지고지순한 남자, 혹은 주변에 있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의 진짜 가치를 여성에게 설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인’ 가치 안에서도, 멜러와 로맨틱 코미디는 당대 여성들의 숨겨진, 혹은 차마 발화되지 못하는 욕망을 드러내거나 소리높여 외치는 장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근래 한국의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는 이러한 ‘장르법칙’을 상당부분 깨고 거스른다. 요즘 이 장르들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화자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과거 이 장르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이 일정부분 도치되어 있는 것은 물론, 권력관계도 일정 부분 뒤바뀌는 양상을 보인다. 마침내 외부의 장벽 혹은 서로의 오해를 이겨내고 맺어지는 것이 꼭 필연적인 엔딩이 아니어도 괜찮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 장르들은 오히려 여성보다 남성관객에게 더 어필하기도 하고, 여성들의 낭만적 환상을 충족시키거나 욕망을 대신 표현해 주기보다 남성들의 ‘반성문’으로 기능하는 면이 더 큰 것 같다. 가장 최근에 이러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로 <건축학개론>을 들 수 있다.

<건축학개론>은 <봄날은 간다> 이후 오랜만에 ‘남자들을 위한 멜로’를 표방한 영화다. 어려서, 미숙했던 것이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되는 지점들의 찌질함을 민망하리만치 낱낱이 밝히지만, 대신 첫사랑의 달달함으로 감싸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우리 모두에게 있었을) 그 ‘미숙함’을 반추하며 부끄러워하는 대신 첫사랑의 달콤한 포장에만 (의도적으로) 멈춘 채 이 영화를 반쯤만 읽어낸다. 그렇기에 ‘텐아시아’ 강명석 편집장이 적절히 지적했듯 (링크), 이 영화는 그저 첫사랑의 향수로만 소비되기보다 ‘남자의 성장영화’로 적극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강명석의 열렬한 옹호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영화에서 그리는 성장이 미성숙했던 과거를 직시하고 재구성하는 데 그치는 면이 더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직시’ 자체가 성장의 일면이기도 하고, 그럼으로써 ‘미성숙, 서투름’이라는 말로 포장되는 찌질함의 폭력이 좀 더 시니컬하게 폭로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 영화 <건축학 개론>의 한 장면

영화를 보고 온 뒤 몇 주간 영화를 곰씹어보다 나는 결국 승민(이제훈)이 서연(배수지)과 연애를 원치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보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일정한 거리 안에서 자신의 ‘짝사랑’이라는 열병이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 즉 자신의 감정 그 자체를 극대화하고 이에 몰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애’라는 건 감정의 문제를 넘어 관계의 문제다. 더욱이 상대가 내게도 일정 이상의 호의를 보여준다면, 이후 그 관계는 자연스럽게 고백과 연애라는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납뜩이의 충고가 있고나서야 고백을 준비하던 그가, 과연 ‘연애’의 단계로 넘어갈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는지, 아니 ‘연애’가 무엇인지 알고나 있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연애라는 것을 그저 추상적이고 모호한 존재로 여길 뿐, 오히려 이 미지의 영역에 대해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있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서연의 집 앞에서 맞게 된 ‘그 상황’은, 어쩌면 승민이 그제껏 지연시켜온 ‘연애로 넘어가야 할 순간’을 스스로 파기하며 도망치는 것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건축학개론>은 영화에도 언급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인 “첫사랑은 원래 이뤄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왜 참인지 예시를 통해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첫사랑은 환상으로만 가졌던 이성에 대한 어떤 상이 현실에서 첫 구체적 대상을 만나는 사건이지만, 연애는 필연적으로 무수한 시행착오와 갈등, 그리고 ‘환상의 붕괴’를 수반한다. 많은 이들은 여기서 자기방어를 위해 환상의 붕괴를 피하고자 도망치기 쉽다. 이런 도망자들에게 첫사랑은 숙명적으로 실패해야 할, 비극적 숭고함의 대상이 된다.

결국 “첫사랑은 원래 이뤄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참인 것은 첫사랑에 임하는 이들이 반쯤은 자발적으로 실패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이렇게 살짝 변화될 수 있겠다. “(짝사랑인) 첫사랑은 반드시 실패해야 한다.”

이러한 실패를 제대로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자신을 피해자로 만든다. 아마도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어장관리를 당한 채 마음을 농락당한 피해자”라는 식의 분노일 것이다. (거기에 어쩌면 서연의 순결을 모호하게 문제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 서연을 ‘쌍년’이라 규정한 건 승민의 친구 납뜩이지만, 승민은 자신의 약혼녀에게도 이 호칭을 들려줌으로써 서연에 대한 그 평가를 공식화하며 자신의 첫사랑을 ‘순정이 농락당한’ 것으로 서사화한다. 그런데 이 ‘쌍년’이라는 평가가 보다 다층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결과적으로 서연이야말로 ‘필패로 끝나야 할 첫사랑’이라는 서사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승민이 멈칫거리며 망설이던 지점을 서연은 여러 차례 뛰어넘었다. 둘만의 모든 추억들이 대체로 서연의 제안을 통해 만들어졌다. 서연은 취중 승민의 키스는 모르는 척 받아들였으되 선배의 키스 시도는 거절했고, 승민 앞에서 소변을 보았고,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승민을 초대했고, 그리고 시디플레이어가 없다며 시디를 돌려준 승민을 위해 둘만의 공간에 다시 그 시디플레이어와 시디를 남긴다. 과연 승민이 서연의 마음을 몰랐을까? 서연의 신호와 말과 행동을 해석하기엔 지나치게 순진하고 미숙했다고는 하지만, ‘그날’ 서연이 하루 종일 남긴 삐삐 연락은 차치하고서라도, 서연이 남긴 시디 플레이어와 시디를 받고서도 그는 서연을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 영화 <건축학 개론>의 한 장면

다시 서연의 집 앞에서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이 장면에서 여성관객인 나는 영화가 의도하지 않은 다른 긴장을 잔뜩 느꼈는데, 바로 ‘취중 성폭력’, 나아가 ‘취중 강간’의 가능성이 다분한 상황이라는 점에서다. 아무리 우리 현실이 여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취중 성폭력이 화간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짙다고는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도 그 구태의연하고 폭력적인 상황이 재현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 사건 이전, 승민이 술 취한 서연에게 키스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납뜩이가 “취한 사람에게 그러는 건 폭력이다”라고 명확히 기준을 그어준 바 있지 않은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승민이 택한 행동은 도망치면서 택시기사에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자신의 환상이 깨지고 첫사랑이 좌절된 것의 책임을 오히려 서연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이야말로 승민의 자기기만의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까?

결과적으로 이들의 관계에서 진짜 지고지순한 쪽은 서연이었고, 오히려 상처를 준 쪽, 심지어 좋아한다는 여자를 위험한 상황에 방치한 건 승민이다. 그럼에도 자기기만의 서사를 절대화했던 승민은 15년 뒤 서연이 다시 찾아왔을 때에야 그 서사의 기만성과 왜곡된 부분을 제대로 직시하게 된다. “도대체 왜 날 찾아온 거냐?”라고 소리쳤을 때 그 질문이 원망의 외침이기도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시야말로, 글 서두에 언급했듯 성장의 시작이다. 우리가 성인이 된 그의 회상을 통해 확인하듯, 그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이를 통해 비로소 제대로 정정되며 재구성된다.

▲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한 장면

여기서 우리는 역시 엄태웅이 자신의 기만성을 직시하고 고백하는 남자 캐릭터로 나왔던 또 다른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실연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도록 여전히 아파하는 인물로 설정됐던 엄태웅의 캐릭터, 병훈은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난 뒤 실은 여자친구를 ‘의도적으로 오해’했고 이를 빌미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지고지순한 사랑을 간직한 남자를 통해 여성관객들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면서도 동시에 남성의 반성문의 역할을 하는 과도기적 작품이었다면, <건축학개론>은 본격적으로 풀어나간 남자의 자기반성문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 점에서, <건축학개론>보다 3주 전 개봉했던 <러브 픽션> 역시 로맨틱 코미디라는 본래 여성들의 장르를 빌어 풀어놓는 반성문인데, <러브 픽션> 쪽이 좀 더 직설적인 반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러브 픽션>의 장르의 문제기도 하거니와, 이 영화의 주월(하정우)이 <건축학개론>의 성인 승민(엄태웅)보다 더 뻔뻔한 대신 솔직하고 연애 경험이 많으며, 자신이 쓰는 픽션을 통해 스스로를 투사해볼 기회가 좀 더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위에 언급된 총 세 편의 영화는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보다 남녀관계에 대한 관찰이나 해석이 좀더 섬세하고 덜 권위적이며, 여성의 심리를 ‘다 아는 척’하며 여성들이 동의 못 할 사회의 보수적 가치를 들이밀지도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성숙하고 사려깊은 인물들로 묘사된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구애하는 남자들은 그 여성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어필하고 선택받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하며, 그 ‘가치’의 가장 큰 부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진솔한 반성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이 영화의 감독들이 모두 70년대 초반생이라는 점, 그리하여 90년대 초반 페미니즘이 대학가를 뜨겁게 달굴 때 20대를 보내며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어느 정도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면이 분명히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개인적으로 추측한다.

▲ 영화 <러브 픽션>의 한 장면

물론 영화 속 풍경과 우리 현실은 아직 너무나 다르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건의 주인공이 여성이기만 하면 삽시간에 ‘XX녀’로 호칭돼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모두의 공적이 되는 일이 다반사다. 모든 여성이 남자들보다 성숙하거나 훌륭하지도 않을 뿐더러, 제대로 반성하고 사과할 줄 아는 남성의 숫자도 여전히 적다. 여성을 향한 끔찍한 폭력을 지시하는 발언이 ‘농담’이나 ‘저항’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2012년 대중에게 가장 인기를 끌며 흥행했던 영화에서 ‘술에 취한 여성에게 성적 접촉을 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게 당연한 상식으로 전제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면, 우리의 10년 후도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지 않을까. 오늘의 당연한 상식이 실은 어제의 새롭고 도전적이었던 가치였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새 그렇게 당연해진 것들이 많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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