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버라이어티 형식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화면에 얼굴을 비추며 시청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내용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분명 출연진들입니다. 이들 개개인의 재능과 캐릭터는 매주 조금씩 시청자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발견되고 형성되면서 관계를 맺어 나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많은 이들이 시청자들과 함께 정을 쌓게 되고 인기를 누리며 프로그램의 성공을 이끌기도 합니다. 무엇을 하느냐만큼이냐 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프로그램. 리얼 버라이어티의 성공 여부는 사실상 캐스팅에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출연하는 이들의 면면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들 출연진의 활약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것. 다른 어떤 예능 프로그램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 제작진의 존재감입니다. 엄청난 촬영 분량을 적절한 편집과 덜어내기로 1시간 분량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덧붙인 방송으로 다듬습니다. 우발적인 사건 투성이의 좌충우돌의 촬영 공간을 통제와 조율이 가능한 장소로 만들어 줍니다.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상호 관계를 사전 협의와 사후 편집으로 조율하고 완성합니다. 사건사고 사이에 마가 뜨기 쉬운 공간을 적절한 자막과 음향으로 메워주며 그 의미와 재미를 부각시킵니다. 이런 수많은 작업 없이는 그 어떤 리얼 버라이어티라도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성공의 키는 거의 전적으로 제작진에게 달려 있어요.

그런데 1박2일과 남자의 자격은, 아니 KBS의 수뇌진은 이런 제작진의 존재감을 과감히, 너무나 용감하고 무식하게 무시해버렸습니다. 해피선데이 PD를 비롯한 일선 제작진들이 방송정상화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며 시작한 새노조 파업에 동참하면서 생긴 공백을 이른바 대체인력으로 메우겠다고 선언한 것이죠. 실제로 지난 2주간의 방송 편집은 이미 촬영이 끝난 분량을 이들 뜨내기손님들이 손을 본 것들이 방송되었고, 앞으로의 촬영도 간부들을 비롯한 외부 인력을 중심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너네가 없어도 1박2일, 남자의 자격은 문제없이 굴러갈 것이라는 선언, 파업의 여파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경고이죠.

자, 이런 식의 땜빵 운영이 어떤 결과를 불러 올까요. 당장 지난주 두 프로그램의 내용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긴장감으로 가득했어야 하는 김종민 추격전의 결말은 지루함과 늘어짐 투성이의 구멍 숭숭난 방송이었습니다. 무려 3주간이나 이어졌던 남격 멤버들과 신화의 대결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마무리되었습니다. 1박2일의 강진 여행은 한 주 더 방송되어야 하고, 심지어 남격의 단점 커버 도전을 위한 제작진의 문제점 지적은 해당 제작진이 없는 상황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여전히 PD들은 화면 한 구석에서 진행하고 있지만 그들의 분량을 편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인 상황, 그야말로 주인이 없는 기형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결국 내용이 부실하니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고, 경쟁 프로그램인 SBS의 일요일이 좋다 콤비에게 턱밑까지 시청률 추격을 허용해 버렸습니다.

편집만으로도 구멍이 숭숭 뚫린 이러한 상황에서 이젠 임시 땜빵 제작진과 함께하는 촬영까지 예고되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이 기존 출연진의 관계와 캐릭터를 어떻게 이어받고 활용할 수 있을까요. 행여나 그들의 통제 하에 다른 방향으로 사건들이나 캐릭터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그 잃어버린 시간은 누가 책임지고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기존의 편집 리듬과 장기적인 방향 설정의 상실은 어떻게 채워놓을 생각일까요? 완성도가 확연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과연 이런 식의 파행 운영이 시청자들을 위한 것일까요?

하지만 이런 완성도의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제작진과 출연진의 신뢰의 붕괴 위험입니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이들 상호간의 믿음과 존중,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협동 작업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출연진이 활약하면 제작진이 뒷받침해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공동체 운명이죠. 그런데 핵심 제작진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출연진들만이 촬영에 들어가 새로운 내용을 만드는, 사실상의 제작진 교체와 다름없는 상황에서 촬영이 지속된다면 사태가 모두 마무리된 이후 재개될 정상 촬영에선 이 금이 가버린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요?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며 서로를 이해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쿨하게 진행할 수 있을까요?

결국 당장의 파행을 막겠다며 가짜 제작진을 투입해 촬영을 지속하겠다는 KBS의 꼼수는 프로그램의 장기적인 생명력과 핵심적인 신뢰를 붕괴시키는 자충수입니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가치와 운영 원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파업의 여파를 최대한 줄이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시청자의 뒤통수를 치며 포장하려는 속임수이죠. 당연히 파업 상황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프로그램과 시청자에게 전가하면서 자리 보존에만 신경을 쓰는 KBS의 사장님과 수뇌부의 인식은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합니다. 1박2일, 남자의 자격을 땜빵 가짜 제작진이 촬영하다니요. 김태호 없는 무도, 나영석 없는 1박2일 시즌1을 상상할 수 있나요? 지금의 대한민국은 재미난 프로그램도 정상적으로 볼 수 없게 하는 정말 이상한 세상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